※ 태백산에 단군이 강림하여 조선국을 세워 평양을 수도로 하고 이해를 단군기원
원년으로 함.

※ 이해에 기자가 토지제도를 창설하기 위하여 그 수도인 왕검성을(지금의 평양)에 정전법을 시행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이조 선조시대에 기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한백겸<1522~1615>이 평양에 남아있는 기자의 정전을 사찰한 바 이는 우물 정자가 아니고 밭전자의 형상이라 하였으며, 이조 영조시대에 서명응 유지는 우물정자라 형상이라고 하여 밭전자의 형상이라는 한백겸의 주장을 반대하였고 이조영조시대에 이익(1681~1763 호는 성호)이 기자의 정전은 사실은 우물정자의 형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등 여러 가지 이설이 있었음.

※ 6촌을 1푼으로 하고 10푼을 1척으로 하여 6척을 1보로 하는 양척으로 33보 평방을 1결로 하는등 양전제도와 과세제도의 기초를 세움.
(이시대에는 전답을 전이라고 불렀음)

※ 양전에 있어서 등급마다 양전보수를 정하였는데 6촌을 1푼으로 하고 10푼을 1척으로 하며 6척을 1보로 하여 전1결 사방 33보 2결은 사방 47보 3결은 사방 57보 3푼이었음.

※ 전조 및 전세의 율을 개정함.

※ 처음으로 농무별감을 둠.

※ 정치도감을 두고 제도에 양전을 시행함.

※ 과전법을 정함.

※ 결부의 제도를 정함.

※ 처음으로 양부일경을 두어 태양의 그림자 측량을 시킴.

※ 측우기를 비치 양수표를 설립하며 1442.5 측우의 제도를 자세하게 정함.

※ 6가지의 양척을 새로정함.

※ 양성지 <1415-1482 조선조의 학자,문신>에게 조선도,팔도각도등을 만들 게 함.

※ 양성지가 황극치평도를 만들어 임금께 올림(찬진) 양성지에게 지리도 만들 게 함.
   
시력기원전
(2333)
단군조선 건국
 
서력기원  
 1054  양척의 결정(量尺)
 1069  양척보수(量尺步數) 제정
 1277  전세율의 개정
 1277. 2  농무별감 설치
 1347. 2  제도에 양전설치
 1391. 5  과전법 제정
 1428. 1  결부의 제도 결정
 1434  앙부일부
 1441  측우기
 1444  양척6종 제정
 1453  조선도도 제조명령
 1454  황극치평도
 1455. 8  지리도 조제 명령
 1462. 5  호적의 시초
 1463. 11  동국지도
 1486. 12  동국여지승람완성
 1511. 8  천하여지도
 1521. 3  제주에둔전 설치함
 1701. 4  청국인 압록강측량
 1896. 4  전국13도 설치
 1898. 7  양지아문 설치
 1898. 9. 15  외국측량기사 초빙의 효시
 1901. 10. 20  지계아문 설치
 1901. 12  양지아문 폐지
 1904  양지국 설치
 1904. 4  지계아문폐지와 지계발행중지
 1905. 2  양지과 설치
 1905. 2  양지과 출장소 설치
 1905. 6  일본측량 기사초빙
 1906. 2  제도국 신설
 1906. 12. 28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공포
 1908. 1. 24  지적용어 처음 등장함
 1908. 8  동양척식주식회사법 공포
 1909. 3  민적법 공포
6월 역둔토 실지 조사
 1909. 11. 17  세부측량의 묘시 (융희3)
경기도 부천에서 시험적인 세부측량 실시
 1909. 11. 20  도근측량의 효시
 1910. 1  토지조사사업 제1차 사업 확정
 1910. 3  수준측량의 효시
 1910. 5  준비조사 외업의 시작
 1910. 6  일필지조사의 시작
 1910. 6  죽제권척사용 (융희4)
 1910. 6  기선측량의 효시
 1910. 6  대삼각측량관측의 효시
 1910. 6  경성부근의 대삼각측량 개시
 1910. 8. 29  한일 합방
 1910. 9  분쟁지조사
 1910. 9  노량진기선조사 측량 시작
 1910. 9. 30  임시토지조사국
 1910. 10  임시토지조사국본관 낙성
 1910. 12  토지조사 제 2차 사업계획확정
 1911  경성부 부근의 대삼각본점 측량 완료
 1911  보정양거척사용
 1911. 1  면적계산
 1911. 3  지적도조제착수
 1911. 3  축적 1/600측도구역지정
 1911. 6. 28  도근측량의 미터
 1911. 8  지위등급 조사의 효시
 1911. 8  특별세부측량 시작
 1906. 10. 31  토지가옥증명 규칙
 1911. 9. 12  삼각점도해평균법 제정
 1911. 11  지적장부 조제 착수
 1912. 1. 8  전라남도 면동리 재산규정 제정
 1912. 3  활판인쇄 정식작업
 1912. 3. 4  과세견취도 작성규정공포
 1912. 3. 13  특별소삼각측량 실시 규정 제정
 1912. 3. 14  특별소삼각점관자 결정
 1912. 3. 18  조선민사령 공포
 1912. 3. 18  조선부동산등기령 공포
 1912. 3. 22  조선부동산증명령 공포
 1912. 3. 22  조선부동산증명령 시행규칙 공포
 1912. 6. 1  삼각측량 방리환산률 제정
 1912. 6. 17  시가지 지가조사규정
 1912. 7  경성부세부측량
 1912. 8. 6  접도애지의 실측 변장기입
 1912. 8. 13  토지조사령 공포
 1912. 8. 13  토지조사시행규칙 공포
 1912. 8. 14  조선국유삼림미간지 및 삼림산물처분령
 1912. 11  일필지조사와 세부측량병행
 1912. 11  지위등급조사독립시행
 1913. 3  경성세부측량 완료
 1913. 4  토지조사 3차 사업계획 확장
 1913. 4  지형 측량의 묘시
 1913. 4  원도별 연속부번의 효시
 1913. 7  지적도에 압인기 사용의 효시
 1913. 1  기선측량 완료
 1913. 1  지방토지조사위원회의 효시
 1913. 1  원도 1도내의 도근 점수
 1913. 10. 5  삼각측량 실시 규정 제정
 1913. 10. 5  도근측량실시 규정
 1913. 10. 5  세부측도 실시 규정 제정
 1913. 10. 5  세부측도시행에 관한 심득제정
 1913. 12  이동신고심득 배부
 1913. 12  이동지정리사무 시작
 1913. 12. 11  교차지의 지목
 1913. 12. 27  경성부토지사정
 1914. 1. 12  일반측량실시 규정제정
 1914. 3. 16  지세령 공포
 1918. 11  토지조사사업 완료, 지적도 812,093매
분쟁지심사서 1,385권(분쟁지 33,937건, 99,445필지 해결)
토지조사부 28,357 권, 토지대장 109,998 장
지세명기대장 201,050권, 각종 지형도 925매
 1918. 11  측량내용:이동지 측량 1,818,364필
삼각측량에 따른 기선측량 13개소
대삼각본점 400점, 대삼각보점 2,401점
수준점 2,823점, 일등 및 이등 도근점 3,551,606점
일필지 조사 및 세부측량 19,101,989필지
지형측량 1,431,200방리
 1916~1924   임야조사 사업추진
임야도(117천매), 임야대장(22천권) 작성 : 3,480천필지 등록
 00  연 월 일
주 요 내 용
출 전

1895.3.26(음)
내부판적국 지적과
창설(양.4.20)
칙령 제53호로 내부관제가 공포됨, 제8조에 판적국에서는 호구적(戶口籍)과 지적(地籍) 등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다(이것이 근대 지적의 효시), 당시 내부대신 박영효, 협판 유길준, 판적국장 윤진석, 그 밑에 주사 권명훈, 동 신정희가 있었다.
고종실록 32년

1895.4.5(음)
치령 제74호로 각읍부세소장정을 제정하다. 이에 전제와 지적(제3조 제1항)과 토지부책을 관리하다.
<관보>

1895.4.17
지적과 사무규정
내부분과규정을 제정하고 판적국에는 호적과, 지적과를 두다(제11조). 지적과는 지적, 무세관유지의 처분 및 관리, 관유지 명목변환 사무를 관장
<관보>

1895.9.5
세무시찰관장정제정
칙령 제161호로 세무시착관장정을 제정하다. 양안 기타 토지에 관한 장부의 정부(整否)(제4조 제8호). 1896년4월19일 폐지되다.
<관보>

1895.9.24
역전답 조사
일본의 측량외침(1)
역전답 조사에 관한 건을 시달하다.
일본은 임시측도부 편제를 만들고 육지측량수 12명을 비룻하여 90명이 내한하여 조선 각지를 무단으로 측량하여 50,000분의 1 지형도를 만들다
<宮嶋>
<外邦史>

1895.10.1
일본의 측량외침(2)
일본 육지측량수 10명을 비롯하여 83명이 내한하여 조선 각지를 무단으로 측량하여 군사기밀도 50,000분의 1 지형도를 만들다.
<外邦史>

1895.10.4
일본의 측량외침(3)
일본측량수 7명을 비롯하여 56명이 내한하여 군사기밀도 50,000분의 1 지형도를 만들다.
<外邦史>

1895.11.17
고종32년 양력채용
이날을 개국 505(1896)년 1월 1일로 하다.
<百年表>

1896.1.1
독자연호 사용
태양력을 사룡하고 고종은 건양연호를 사용하다. (한국 최초의 연호)
<百年表>

1896
을미사판 시행
최초의 국유지측량 즉 을미사판을 시행하다.
<百年表>

1897.3.10
역전답 이관
각 역전답을 농상공부로부터 군부로 이관하다.
<지적사>

1898
광무2년 전형추가
5전형 외에 원형, 타원형, 호시형, 삼각형, 미형을 더하다.
양지아문
양전사목

1898.6.22
토지조사를 주청
내부대신 박정양과 농상공부 대신 이도재는 전국토지조사에 관한 청의서를 의정부 회의에 제출하다.
<지적사>

1898.7.6
양지아문 창설
칙령 제25호로 양지아문 직원 및 처무규정 제정, 의정부대신 윤용선이 반포하다. 총재관에 내부대신 이도재, 부총재관은 고영희, 이채연이 겸임되다(1902년 3월 17일 지계아문으로 통합되다.)
<관보>

1898.7.14
크램과 측량계약
양지아문 총재관 심상훈, 이도재, 대판 이채연은 미국 오하이주 측량사 크램(한국명 巨廉)과 <대한합동>을 체결하였다.
<奎>국한문23189;영문23190

1899
최초의 전답도형도 기해사감
충남 아산군 양안에 최초로 전답도형도 즉 사료가 나오다.
국유지측량인 기해사검을 시행하다(~1900)
<지적史>

1899.4.7
러시아공관 측량
크럼이 러시아 공관 부지를 측량하다.
지계아문 내문

1899.4.19
프랑스공관 측량
양무감리 임명
크럼이 프랑스 공관 부지를 측량하다.
장성군수 김성규가 전라남도 양무감리로 겸임되다.
지계아문 내문
<관보>

1899.4.21
양지아문령 제1호로 양지아문견습생규칙을 제정하다.
<관보>
1899.4.24

1899.6.16
우치다 고빙
미국인 양지기사 크럼의 요청으로 일본측량사 우치다를 보조자로 채용하기로 계약하다.
<구한국외교문서>

1899.9.11
양지결과에 항의
경기도 용인군민들이 양지결과에 대하여 항의하다.


1900
광무양전
서울지도 완성
양지아문에서 과천, 광주, 수원, 안산, 괴산, 목천, 문의, 아산, 연기, 온양, 음성, 전의, 청안, 청안, 충주를 양전하다.
규장각에 당시 양안이 간직되어 있다.
크럼과 한국인 측량사들이 서울 측량을 6월경 완료하고 <한성부지도>를 만들다.
<지적史>

1900.4
학령 제2호로 향교재산관리규정을 제정하다
<관보>

1900.4.12
양지속성과 설치
민영환 선생이 설립한(1895) 사립 홍화학교에 양지속성과를 특설하고 학생을 모집하다.
<황>
1900.4.12

1900.4.16
홍화학교 측량교육
사립 홍화학교에서 측량교육을 교수하다. (사립학교 최초로 측량을 교수) 고사는 일본 유학을 한 남순의 이고, 교재는 그의 저서인 <정선산학>이다.
<지적史>

1900.5.22
대동강-압록강측량
일본 군함 반성호가 대동강구 연안으로부터 압록강까지 측량을 시작하다.
<황> 잡보

1900.10.8
양무위원임명규칙제정
양지아문령 제1호로 양무위원임명규칙을 제정하다.
<관보>

1901
광무양전 착수
양지아문에서 안성, 양성, 양지, 여주, 음성, 이천, 죽산, 진위, 부여, 석성, 연산, 온양, 정산, 진잠, 진천, 한산, 회인, 연풍을 양전하고 규장각에 양안이 간직되어 잇다.
<奎>

1901.3.12
미국대사 부임
양지아문 총재관 박정양은 미국주참 전권대사가 되다.


1901.4.26
연안측량
일본함대 해문호가 인천항에 도착하였는데 일본 측량대 100여명이 오는 것을 기다려 연안측량에 종사할 예정이다.
<황>
동일자

1901.8.8
양무중지
한해(旱害) 때문에 양무를 중지하다.


1901.10.20
지계아문 설치
칙령 제21호로 지계아문 직원 및 처무규정(26조)을 제정하다. 양지아문 부총재관 이근호 대신 정주영을 임명하다.
<관보>

1901.11.11
지계아문 처무규정 제정
칙령 제21호로 지계아문 직원 및 처무규정을 제정(전문14조)하다
<관보>

1901.11.20
지계아문 분과규정 제정
지계아문 분과규정을 제정하다.
<관보>

1902
일본군함이 측량
광무양전
지도군수가 "일본군함이 와서 소옥을 짓고 측량을 한다는 사실"을 외부대사관 관찰사 서리 광주군수에 보고하다.
지계아문에서 평해를, 양지아문에서 안성, 양성, 양지, 진위, 석성, 영춘, 충주를 양전하다. 규장각에 당시의 양안이 간직되어 있다.
<지적史>
<奎>

1902.3.26
양지아문 폐지
1898년 7월 양지아문이 설립될 때부터 3년 8개월만에 폐지되고 양전업무는 지계아문에 흡수되다.
<관보>

1902.6.8
지계업무 개시
강원도부터 지계업무를 지행하는데 측량 후 관계(官契)를 발급하니 구권과 관게를 바꾸도록 하다.


1902.10.10
도량형규칙 제정
칙령으로 도량형규칙을 제정하다.


1903
광무양전
지계아문에서 강원도 간성, 경기도 수원, 용인, 한산을 양전하다.
규장각에 당시의 양안이 간직되어 있다.
<奎>

1904
광무양전
지계아문에서 동래, 산청, 진남, 합천을 양전하다.
규장각에 당시의 양안이 간직되어 있다.
<奎>

1904.1.11
지계아문 이속
지계아문을 탁지부로 소속시키다.


1904.3.4
역둔토 관장
포달 제126호로 내장원을 경리원으로 개칭하고 관세과에서 역둔토 업무를 관장하다(1907.11.27 포달 161호로 폐지)


1904.4.19
양지국 신설
칙령 제11호로 탁지부 양지국 관제를 제정하고 지계아문 직원 및 처무규정은 폐지하다.(칙령 제19호 1905.2.26 폐지)
<관보>

1904.8.29
메가타 오쿠라 대신 관저에서 내훈을 받음
메가타는 재정고문으로 내한하기전에 오쿠라성 대신 관저에서 오쿠라성 소네, 고무라 외무상, 사카다니 오쿠라성 차관, 미즈노 이재국장, 아라이 주계국장, 와카스키 서기관, 마쓰오 일본은행 총재와 회합하였다. 이 때 한국의 토지를 정리하여 소유권을 명확히 한다(제4항), 소요예산과 예정필수를 조사한다(제21항)는 지시를 받다.
<韓國に赴任にけ打合事項>, 일본국회도서관

1904.9.3
재정고문 메가타 내한 토지조사 시행
한일협약에 따라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가 스즈키를 대동하고 인천항에 상륙한다. 그는 3년 2개월동안 한국의 세제 특히 구한말 토지조사를 위하여 예산수립, 교육, 실연 등을 주관하다.
<지적史>

1905.2.26
양지국 폐지
칙령 제19호로 탁지부 관제를 개정하여 양지국은 사세국으로 되었고 사세국에서 양지업무를 관장하다.
<관보>

1905.4
측량공급 훈령
일본공사가 외부에 조회하기를 일본 해면기사가 와서 4월 상순부터 부산 이북과 원산 이남의 측량을 할 터이니 해당 지방관에 훈령하여 숙식과 식료를 청하는 대로 공급하다.
<황>
1905.1.24

1905.4.15
지령측량 관장
농상공부 분과규정을 광무과에서 지형측량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다.(제8조)
<관보>

1905.4.29
형법공포
법률 제2호로 형법을 공포하다.(분묘한계 제32조, 분묘침해율 제3절)
<法類>3

1905.6.26
쓰쓰미가 측량을 교수
일본 측량사쓰쓰미 가 양지과 측량기술견습소에서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측량을 교수하다. 당시 양지과장은 서기관 한규복, 기술분야는 기사 나카타가 담당하다.
<지적史>

1905.6.26 이후
구소삼각측량 시행
측량기술견습소에서 교육을 하며 11개소의 구소삼각측량을 시행하다.(지적법시행령 제22조 기타원점)
<지적史>

1905.11.7
을사보호조약 체결
한일협상조약을 제결하다. 이 조약을 제2차 한일협약, 을사보호조약, 을사5조약 이라고도 한다.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여 보호국으로 하다. 이 조약을 사가들은 을사늑약이라 한다.


1906
토지조사예산안 작성
재정고문 메가타는 구마타에게 조선토지사 예산안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하다. 구마타는 500만원을 안을 제출하였으나 부족하다 하여 1,200만원으로 다시 작성하다.
<마쓰모토의 마가타 전기>

1906.4.13
양지과 설치
탁지부 분과규정에 양지과를 두다. (제5조)
<관보>

1906.5.1
대구측량견습소개소
측량기술견습소 대구츨장소를 개소하고 소장은 도요타가 맡다.
<관보>

1906.5.22
가계수수료규칙 제정
가계발급규칙을 제정하고 탁지부령 제10호로 가계수수료규칙을 정하다.
<法類>5

1906.7
부동산법조사회설립
이토우의 추천으로 도쿄대학 교수 우메 박사를 초빙하여 부동산법조사회를 조직하고 우메가 회장(다른기록에는 고문)으로 취임하여 관습조사를 하다. 이때 보좌관 나카야마, 가와사키, 야무구치가 용빙되다.
<宮嶋>,
<조선구관제도조사사업개요>

1906.8
농림학교 분리
칙령 제39호로 농림학교 관제를 공포하여 농상공학교에서 분리. 독립하다.(1906.9.11. 농상공부령 제48호로 농상공부 소관 농림학교규칙을 제정하다.)
<관보>

1906.9.1
농림학교 개교
농림학교(현 서울대 농생명과학대학)는 농상공학교 예과 교실에서 개교하다. 초대교장은 농림국장 서병숙이 겸임하다.


1906.9.24
지방관제 제정
칙령 제50호로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지방관 관제를 공포하고 관찰사가 지적과 도량형사무를 관장하다.(제7조)(칙령 제40호 1907.12.13호로 폐지)


1906.10.3
평양측량견습소개소
측량기술견습소 평양출장소를 개소하고 소장은 이케다가 맡다.
<관보>

1906.10.28
진해만, 거제도측량
일본인 2명, 한국인 17명이 진해만과 거제도 군용지 측량을 하다. (~1906.12.30)
<財政>

1906.10.31
토지가옥증명규칙제정
칙령 제65호호 토지가옥증명규칙이 제정되다.
<관보>

1906.11.7
토지가옥증명시행세칙 제정
법부령 제4호로 토지가옥증명규칙세칙을 제정하다.
<관보>

1907
측량교수
서북학회에서 서북협성학교를 설립하여 측량을 교수하다.
현 광신중.상업고등학교이다. (1908.5.5 개학, 1908.4.10, 1908.4.28 측량생 모집)
사회유지가 서울에 사립 장훈학교를 설립하고 1908.6.14 속성측량과를 개설하여 학생을 모집하다.
<황>
<지적史>
<申>
1908.6.2

1907~1908
정미 국유지측량
역둔토를 비롯하여 궁장토, 목장토, 농원묘위토, 미간지 등 국유지 면적을 산출하다.


1907.1.30
토지가옥전당집행시행세칙 제정
법부령 제2호로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 시행에 관한 세칙을 제정하다. (1912.4.1 폐지)
<관보>

1907.2.7
석산측량
용산 군용지측량
한국인 5명이 개성부 석회 석산을 측량하다. (~1907.3.8)
일본인 1명, 한국인 27명이 군용지 용산의 도근, 세부측량을 하다. (~1907.4.6)
<財政>
<財政>


1907.2.9
석산측량
인천 염전측량
한국인 5명이 경성 수구문 밖 석산을 측량하다.(1907.4.6)
한국인 6며이 인천 염전을 측량하다.(~1907.3.18)
<財政>
<財政>

1911.4.17
토지수용령 공포
제령 제3호로 토지수용령을 공포하다.
<관보>

1907.5.16
토지측량규정 제정


재정고문본부에서
측량을 관장
대구잼관 때 가와카미는 ①대구시가지 토지측량에 관한 타합사항, ②대구시가지 토지측량에 대한 군수로부터 통달, ③대구시가지 토지측량규정을 제정하다.(한국최초의 지적측량규정)

재정고문본부는 훈령 제2호로 경리과에서 토목 및 측량에 관한 사무를 본다고 규정하다.
<財務>

1907.11.27
내장원 분과규정 및 제실재산정리국관제제정
궁내부령 제7호로 내장원 분과규정을 제정하다.(측량 및 제도에 관한 사항 제5조5항)
제실재산정리국 관제를 제정하여 제실재산정리국에 농림과, 측량과, 주계과를 두고(제1조) 측량과에서는 제실유 토지, 삼림.원야 등 측량과 제도, 경계답사, 지적정리사항을 관장하다.(시행일 12월 1일)
궁내부령 제8호로 궁내부대신 이윤용은 제실재산정리국 분과규정을 제정하다.


1907.12
양지과수업규정제정
대만의 경험을 토대로 양지과수업규정을 제정하다. 그러나 이 규정은 보존되지 않고 있다.


1908.1.21
삼림법 공포(최초의 임야조사측량)
법률 제1호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임시서리 법부대신 조중응은 삼림법을 공포하다. 이는 삼림에 대한 최초의 지적규정으로 1911.9.1 폐지되었다. 조선임야조사령 제10조에 구삼림법 제19조에 의하여 귝유로 간주된 임야는 구소유자 또는 상속자에게 소유권을 되돌려주다. (무모한법이기는 하나 이로 인하여 측량강습소, 측량사무소가 생겼고 측량교과서가 편찬되어 나오다.)
<관보>

<지적史>

1908.3.21
토지규칙 제정
칙령 제15호로 청진 토지규칙을 제정하다.
<法類>5

1908.7
최초의 지적도29매
탁지부 측량과에서 서울지역 소삼각측량으로 지적도를 제작하다. 축척500분의1 지적도인 <경기도 한성부지도>29매가 서울시 종합자료실에 간직되어 있다. (이것이 한국최초의 지적도이다)
<지적史>
서울시 종합자료실

1908.8.26
동척법 제정
법률 제22호로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을 제정하다.
<法類>下

1909.5.16
측량수수료 제정
대한측량사무소에서 100만평 수수료를 10환으로 정하다.
<申>

1909.6
역둔토 측량
모든 역둔토를 국유지로 실시조사 측량하다. 이것이 국유지측량으로는 효시이다.


1909.9.24
측량가 작시
북간도 대교동 교향학교에서 측량가를 지어 부르다

어화 우리 동포님네 측량가를 들어보소
대한강산 삼천리를 측퍈으로 기점 삼고
지남으로 정방하여 표간으로 지점잡고
첨공으로 직시하여 표제권척 거리되고
육수척에 축지하여 도지상에 획점하네.(뒷줄임)
<경향신문>
동일자

1909.9.30
토지조사 착수시기
전국 토지조사에 관한 준비는 목하 탁지부 임시재산정리국에서 매일회의하는 중인데 실지 착수할 시기는 내년 1월경으로 비용은 1,400만원으로 예산하였다. 이로 인하여 지방금융계에 활기가 생겨 영향이 있을 것이다.
<韓民>
1909.9.30

1909.10.16
토지조사 착수
토지조사사업에 대하여 탁지부 임시재산정리국에서 진행중이다. 11월 중순경부터는 겨성부근에서 모범적으로 1반에15명씩 성대하여(그 중 일본인 2명) 조사에 착수할 터인데 내년 1월1일 부터는 200반 한으로 조직하여 전국 전답의 공사유를 불문하고 이동조사를 한다.
<韓民>
동일자

1909.11.17
토지조사시험사업
부평군( 현 인천 계양, 부평구)에서 토지조사 시험사업을 시행하다. (~1910.2.4)
<土參>

1910.2.8
토지측량업자단속규칙
경기도령 제1호로 토지측량업자 단속규칙을 제정하다.
<관보>
동일자

1910.2.16
토지조사 예산
본년도 3월경에는 토지조사에 착수한다더니 그 의안이 참여관 회의에 부쳐졌으나 경비가 1,400만원을 요하므로 준비가 자못 대단하여 1, 2달 부37,000원을 예산에 계상하고 3월 이후는 추가예산을 요구하기로 목하 수속중이다.
<韓民>
동일자

1910.3.14
토지조사국 설치
육지측량사 나카타, 동 도요타의 입안을 채용하여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탁지부 대신 고영희는 칙령 제23호로 토지조사국 관제를 설립, 공포하고 다음날 임시재산정리국 주사 30명을 토지조사국 주사로, 동 기수 326명을 토지조사국 기수로 겸임 발령하다.
<관보>

1910.5.21
토지조사 개시 훈시
광통관에서 전 국원을 모아 놓고 토지조사국 총재 고영희, 부총재 다와라, 측량부장 쓰지야, 조사부장 사사키는 토지조사 개시에 앞서 훈시를 하다.


1910.6
대삼각본점 설치
육지측량사 우메즈 기사, 나카무라 기수, 조우시 기수, 홍종대 기수가 한조가 되어 대마도 일등삼각점 아라아케산과 동 미타게를 기선으로 거제도와 절영도를 구점으로 하는 삼각망 측량을 하였고 이를 기준으로 대삼각본점 400점을 설치하다. (이것이 최초의 한국 대삼각본점이다)
<대삼각계산례>
대마연락

1910.8.9-9.27
대전기선측량
기사 우메, 기수 나카무라, 홍종대, 고원 주우시가 300일간 대전기선측량(2,5000m)을 시행하다.
<三角結了>

1910.8.23
토지조사법
동시행규칙 등 공포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법률 제7호로 토지조사법을 공포하다.(제정은 우메겐지로우 박사)
탁지부대신 고영희는 탁지부령 제26호로 토지조사법시행규칙을 공포하다.
내각총시대신 이완용과 탁지부대신 고영희는 칙령 제43호로 재경기관인 고등토지조사위원회규칙을 반포하다.(1911.8.12 고등토지조사위원회관제가 제정되자 자연 폐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탁지부대신 고영희는 칙령 제44호로 자문기관인 지방토지조사위원회규칙을 반포하다.
<관보>

1910.8.29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
순종환제는 양위조서(讓位詔書)로 한일합방조약을 공포하고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다. 사가는 이를 경술국치라고 한다.


1910.10.1
임시토지조사국 초대총재 임명
초대 임시토지조사국 총재에 총독부 정무총감 아마카타 가 겸무, 부총재는 학부차관 다와라 가 계승하다.
<관보>

1910.11.4
토지조사 진행
토조 제15호로 토지조사 진행에 관한 건을 각 도에 통첩하다.
<土例>

1911
대삼각본점측량완료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이 해 봄에 경성부 부근의 대삼각측량을 충경삼각본점망의 일부로 하여 이를 완료하다.
<地籍史>

1911
보정양거척 사용
임시토짙조사국에서 도근측량에 처음으로 보정양거척을 사용하기 위하여 시작하였는데 이 보정양거척은 임시토지조사국 기술과장 도요타가 고안한 것이다.
<地籍史>

1911.3
지적도 제조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처음으로 지적도의 제조에 착수하였는데 각종 정식 및 지번, 지목은 수기법에 의하다.
<地籍史>

1911.5
도근측량 착수
임시토지조사국에서 경성시가지 도근측량에 착수하다.
<地籍史>

1911.8
특별세부측량 시작
종래 지압조사반에서 현지를 답사하여 개황도를 만들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개황도의 제조는 폐지하고, 세부측량과 동시에 각 필지의 강계 및 소유권을 조사하기로 하여 이 취지에 알맞은 특별세부측량을 경기도 진위군(현 평택군)에 시험적으로 실시하다. (그 후 약 8개월로써 이를 끝내다)
<地籍史>

1911.11
지적장부 제조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처음으로 토지조사부의 제조에 착수하고 1913.1 토지대장 제조, 1914.1 토지대장 집계부 및 지세명기장의 제조에 각각 처음으로 착수하여 1918. 5월 159,405 책을 제조 완성하다.
<地籍史>

1912.3.13
특별소삼각측량실시규정 제정
임시토지조사국 결정(決定) "특별소삼각측량 실시규정"으로 특별소삼각측량 기선의 방위각은 태양 또는 북극성의 자오선통과를 관측하여 직접 결정하도록하다.
<土例>3집 57쪽

1912.3.18
조선부동산등기령 공포
제령 제9호로 "조선부동산등기령" 이 공포 되었는데 이는 부동산등기에 관한 법령의 효시로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의 부동산 등기는 일본 법률인 "부동산등기법"에 의하도록 하다.
<관보>

1912.3.22
조서부동산증명령 공포
제령 제15호로 "조선부동산증명령"이 공포되고 그 해 4.1부터 시행하다. 토지건물의 증명 및 전당집행에 관한 종전의 법령을 폐지하고 그에 대체할 목적으로 제정된 것으로서 증명관리는 부윤, 군수로 하고 증명관서에 토지증명부 및 건물증명부를 비치할 것 등을 규정하다.
<관보>

1912.5.7
견취도 작성
견취도 작성에 관한 건을 시달하다.


1912.8.13
토지조사령 공포
제령 제2호로 조선총독부 데라우치가 토지조사령을 공포하였는데 이는 세칭 세부측량에 관한 기본법령이다. 토지조사법을 보장하여 제정한 것으로 토지조사법은 이 법령으로 폐지되다.
<관보>

1912.10.30
역둔토처분령 공포
칙령 제3호로 "역둔토 특별처분령"이 공포되고 1914.8.10 및 1918.1.23 2회에 걸쳐 일부 개정되었는데 역둔토의 매불, 대부 등에 있어서의 계약원칙 및 재해지에 대한 대부료의 면제 등에 관하여 규정하다.
<地籍史>

1912.11
세부측량 병행
일필지조사를 단독으로 하지 않고 세부측량과 함께 하기로하다.


1913.4
지류묘시 폐지
세부측량원도에 등고선 등 지류(地類) 묘시(描示)를 폐지하다.


1913.4
원도별 연속부번
종래는 지번을 지번지역(동리)의 북동우에서 기번하던 것을 이 날부터는 지번지역의 1호원도의 북변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원도에 포용하는 토지를 통한 연속부번을 하고 다음 원도에 옮길 때에도 되도록 이를 연속시키기로 하였으나 시가지를 형성하는 부분은 가로의 양측을 대향하여 교호부번 하도록 하다


1913.7
압인기 사용
지적도 제조에서 지번, 지목에 수기법을 폐지하고 그 대신 압인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지적에서 압인기를 사용한 효시이다.
<地籍史>

1913.10
기선측량 외업완료
임시토지조사국에 함경북도 고건원 기선측량을 끝으로 기선측량 13개소, 길이 39,758m의 외업을 완료하다.
<토지보고>

1913.10.5
삼각측량실시규정
도근측량실시규정
세부측도실시규정
세무측도시행요령제정
삼각측량실시규정(훈령 제16호), 도근측량실시규정(훈령 제17호), 세부측도실시규정(훈령 제18호), 세무측도시행요령(훈령 제19호)을 제정하다.
<土例>

1914.1.12
일반도측량실시규정 제정
임시토지조사국 훈령 제1호로 "일반도 측량 실시규정"이 제정되어 이것이 우리나라 지형측량에 관한 법령의 효시이다. 이는 전문 339조의 방대한 내용으로서 그 일부를 1914.11.11 훈령 제36호로 개정한 바 일반도(지형도)는 대삼각점, 소삼각점 및 측지도근점을 기초로 지적도를 축사한 측판상에서 측량할 것 등을 규정하다.
<土例>

1914.2.5
측지외업처무규정 제정
임시토지조사국 훈령 제2호로 "측지외업어무규정"을 제정하고 1915.9.10까지 6회에 걸쳐 개정하였다. 여기에는 도근측량과 세부측도의 외업을 집행함에 필요한 측지반의 편성, 측지반장, 검사원, 측량원, 측도원 등의 임무등을 규정하는 한편, 집무시간은 주간은 일출 1시간 후부터 일몰까지, 야간은 2시간 이상으로 하여 사무소 또는 숙박소에는 표기를 세우되 반장 및 검사원은 홍상백하로 하고 기타는 백상홍하로 할 것 등을 규정하다.
<土例>

1914.3.16
지세령공포
제령 제1호로 "지세령"을 공포하고 1914년 지세부터 적용함으로써 우리나라 지세령의 효시이다. 중요 내용은 지목은 19종(염전, 광천지는 뒤에 생긴 지목임)으로 하고 지세는 토지의 결수에 결가를 승(乘)하여 정하며, 부군, 도(島)에 토지대장을 비치하도록 규정하다.
<관보>

1914.3.24
이동지정리규정 제정
임시토지조사국 훈령 제7호로 "이동지정리규정"을 제정하고 1916.1.4 훈령 제1호로 일부를 개정하다. 이 규정은 지목변환, 분할 및 소유권이전 등 일체의 이동을 대상으로 하다.
<土例>

1914.3.24
양홍강계선
이동지정리 규정에 따라 지적도에 분할선 등 신강계선을 양홍(洋紅)으로써 그렸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양홍강계선의 효시가 되다.
<土例>

1914.4.25
지적도 실시
경성부 관내의 토지대장 및 지적도를 실시하다.
<土例>

<관보>

1914.4.25
지적공부시행
토지대장규칙공포
조선총독부령 제45호로 "토지대장 규칙"이 제정 공포되고 1928. 12. 29까지 5회에 걸쳐 개정되었다. 여기에는 토지대장 등록사항, 토지대장 양식, 지적도의 비치, 토지대장 및 지적도의 열람등본, 분할 후의 지적감소의 허용등에 대하여 규정하는 한편 토지를 신규등록 또는 분할할 때에는 부윤, 군수, 도사(島司)가 그 지반(地盤)을 측량할 것 등도 아울러 규정하다.

1914.4.25
지적공부 열람제도 창설
위 규칙 제4조에 "토지대장 혹은 지적도를 열람하고 토지대장 등본의 교부를 받고자 하는 자는 수수료를 첨부하여 부윤군수에게 청구할 것..."이라는 규정에 근거하여 토지대장 열람 및 등본, 지적도의 열람제도가 처음으로 생겼으며 지적도의 발행은 1918. 7. 17 토지대장규칙을 개정할 때 처음 규정한 것이다.


1914.6.30
제도적산실시규정 제정
임시토지조사국 훈령 제25호호 "제도적산실시규정"을 제정하고 1914.10.14, 1915.5.4 일부 개정한 바 지적도의 제조 및 지적산정에 관하여 자세하게 규정하여으며, 특히 적산에 있어서는 계적기에 의하거나 삼사법에 의하거나를 막론하고 각회의 측정결과는 모두 덮어놓아 서로 엿보지 못하도록 규정한 것이 주목을 끌고 있다.
<地籍史>

1914. 10
대삼각본점 외업완료
대삼각본점 400점의 외업을 완료하다.
<土地보고>

1914.11
대삼각보조점 측량완료
대삼각보조점측량 2,401점 외업을 완료하다.


1915.5.11
도로 등 삭제 규정
총독부 훈령 제32호로 지세사무취급수속(1914.6.27, 훈령 제34호)를 개정할 때에 "제7조의 2 토지대장에 등록한 토지의 지목을 도로, 하천, 구거, 제장, 성첩, 철도선로, 수도선로로 변환한 때에는 토지대장에서 이를 삭제할 것"이라 규정하였고, 같은 날짜에 총독부 훈령 제33호로 시가지세사무취급수속(1914.6.27, 훈령 제35호)을 개정할 때에도 역시 지세사무취급수속과 같은 규정을 둠으로써 토지대장에서 도로 등을 삭제하는 제도가 생기다.
<관보>

1915.5.12
토지분할신청제도
총독부령 제51호로 지세령 시행규칙을 개정하면서 제12조의2 토지대장에 등록한 토지를 분할할 경우 등에 측량을 요할 때에는 그 측량을 군수에게 신청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것이 측량신청제도의 효시이다.
<관보>

1916.10.20
임야조사 시험
경기도 부천군(현 인천광역시 계양구, 부평구)에서 임야시험조사 사업을 시작하다. (이것이 임야조사의 시작이다.)
<土地보고>

1916.10.31
도근측량완료
임시토지조사국에서 경상남도 사천군의 부속도서를 마지막으로 토지조사령에 의한 도근측량을 전부 완료하였는데 총 3,551,606점을 측량하고 종사인원은 연267,922명이다.
<土地보고>

1916.11.20
도근점 성과
세부측량 완료
도근점 3,551,606점을 측량하였고 종사연일 수는 267,922일이다.
경상남도 남해군의 부속도서를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토지조사를 위한 세부측량이 전부 완료되었는데 종사연인원 1,678,676인으로서 총필수 19,101,989필을 측량하다.
<土地보고>

1918.5.1
조선임야조사령공포
동령 시행세칙공포
제령 제5호로 조선임야조사령을 공포하다.
<관보>

1918.11.2정오
토지조사 종료식
근정전 안에서 토지조사 종료식을 거행하다. 스즈키 임시토지조사국장이 토지조사사업경과보고, 우사미 내무장관이 하세키와 총독의 식사를 대독한 다음 이완용 등의 측사가 있었다. 경희정 연못가에서 기념품, 상품, 토지조사 성과 및 기구전람회를 열다.
<每申>
1918.11.3

1918.11.4
임시토지조사국관제폐지
임시토지조사국 관제 및 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관제를 폐지하다.
<관보>

1918.12
축척변경 측량
임시토지조사국에서 황해도 겸이포 시가지의 축척변경측량의 일부인 세부측량에 착수하여 1929.2 그 작업이 완료한 바 이것이 우리나라 축척변경측량의 효시이다.
<地籍史>

1920.8.23
임야대장규칙제정
총독부령 제113호로 "임야대장규칙"이 공포되고 1922.7.12, 1923.10.15 및 1930.9.27에 일부 개정되었는데 대부분 토지대장 규칙을 준용하도록 하는 한편 부.군.도에 임야대장 및 임야도를 비치할 것과 임야의 지적의 증감을 허용하는 것 등도 아울러 규정하다.
<관보>

1921.3.18
토지측량규정 제정
총독부훈령 제10호로 "토지측량규정"이 제정되다. 이는 현행 "지적측량규정"의 전신이며 1925.5.5 보조 삼각측량과 삼각측량에 고나한 것을 총공부 훈령 제33호로 개정 보완핟.(특히 총독부령으로 제정되어 공포하지 않고, 총독부 훈령으로 제정하여 부내적으로만 적용시킨 것이 주목된다.


1922.6.28
지적약도 부여결정
총독부 재무국장이 각 도지사에게 "지적약도의 설비정리 및 보관에 관한 건"으로써 지세령 시행규칙 및 시가지세령시행규칙 개편으로 부면(府面)에 주고 장차 그 제작 및 증보는 부면의 부담으로 하게 되었다는 것과 지적약도는 철저히 보관하고 제 때에 이동정리를 할 것 등을지시하다.
<地籍史>

1922.7.1
임야대장규칙시행시속준칙 통합
총독부 재무국장이 각 도지사에게 세 제49호 "임야대장에 관한 사무의 취급수속 제정에 관한 건" 으로써 "임야대장규칙시행수속 준칙"을 통첩하고 1923.10.15 세 제44호로써 그 일부를 개정한 바 임야대장에 등록한 토지를 토지대장에 등록하였을 경우는 토지대장의 연월일란에 그 사정연월일,사고란에 사정의 지(旨), 적요란에는 임야대장의 지번을 주서(朱書)할 것과 부군도에는 임야대장집계부를 비치할 것 등을 규정하다.
<地籍史>

1923.6.25
도면열람, 등사허용 지시
총독부 재무국장이 각 도지사에게 세을 제673호 "지적도 또는 임야도의 열람에 관한 건"으로 도로, 수로 또는 철도의 시설 기타 수명의 매축 등에 따르는 토지의 이동에서 기업자가 측량종사원을 부군에 위탁하였거나 또는 기업자가 측량하는 경우 혹은 도(道) 지정측량자가 일반적인 이동측량을 할 때에는 정부가 자기이익의 취지하에서 이러한 기업자 등, 도지정측량자 또는 이들 보조종사원 등에게 지적도 또는 임야도의 열람, 등사를 허용하도록 하고 내첩(內牒)하다.
<地籍史>

1925.5.5
보조삼각측량과 삼각측량규정
총독부 훈령 제33호로 "토지측량규정"의 일부를 개정함에 있어거 보조삼각점의 관측 및 계산과 삼각측량 관측 및 계산에 대한 규정을 삽입하다.
<관보>

1927.6.16
토지조사기념비 건립
토지조사기념회 유종회(회장 和田一郞)는 서울 남산 중턱 약수곡 옆에 조선토지조사기념비를 세웠다. (6월 22일 제막식을 거행하였는데 유아사 정무총감, 가네야 군 사령관, 한창수 이왕직 장관 등이 참석하였다.)
<京城府史>

1934.4.30
지세, 지적사무 이관 결정
총독부령 제47호로 "조선총독부령 중 국세, 토지대장, 임야대장 또는 역둔토에 관한 규정"을 공포하고 5.1부터 시행하기로 한 바 특별히 규정한 것을 제외하고 총독부령 중 국세, 토지대장, 임야대장 또는 역둔토에 관한 규정으로서 부군도에 관한 것은 세무감독국장에 관한 규정, 부윤, 군수, 도사에 관한 것은 이를 세무서장에 관한규정으로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부군도에 관장하던 지적사무를 세무서에 이관하기로 하였으며, 한편 총독부 훈령에 관해서도 1934.5.1 훈령 제23호로 같은 취지의 조치를 취하다.
<관보>
<地籍史>

1934.5.1
세무감독국 직세과 사무분장 규정
총독부 훈령 제20호로 "조선총독부 세무감독국 사무분장규정"을 제정하였는데 세무부 직세과에서는 세무서의 직세과가 관장하는 사무의 감독에 관한 사항등을 관장한다고 규정하다
<관보>

1934.5.1
세무서 직세과 사무분장 규정
총독부 훈령 제21호로 "조선총독부 세무서 사무분과 규정"이 제정되어 직세과에서는 부과 감면에 관한 사항, 토지대장 및 임야대장, 지적도 및 임야도에 관한 사항 등을 관장하도록 규정하다.
<관보>

1934.5.1
지적사무 이관실시
4.28 직령 제111호로 제정된 총독부 세무관서 관제에 따라 세무감독국 및 세무서가 특설되어 지적사무도 각 도 로부터 이 날짜로 세무서에 이관되다.
<관보>

1935.6.12
임야측량규정 제정
총독부 훈령 제27호로 "임야측량규정"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해방후인 1954.11.12 지적측량규정이 공포 시행되기까지 그 효력이 있다.
<관보>
<地籍史>

1938.1.24
조선지적협회 설립
1938.1.17 조선총독 미나미의 설립허가를 받아 재단법인 조선지적협회를 경성지방법원에 설립등기하고(1.24) 조선총독부 관보에 공고하다. 사무소는 총독부 재무국 내에 두고 대표는 당연직인 총독부 재무국장 미즈타 나오마사 가 겸임하다. (초대) 1939년 5월부터 지적기술원양성강습소장을 겸하다. (~1949.6.16)
<등기>
<列傳>

1938.1.25
지적협회 설립에 따른 조치사항 지시
총독부 재무국장이 각 세무감독국장에게 "재단법인 지적협회 설립 및 광대한 지역에 걸치는 이동지정리제도 폐지의 건"으로 1938.4.1부터 지적협회가 업무를 개시할 터이니 세무관서와 협회와는 항상 긴밀한 연계를 유지할 것과, 1923.7.20 세을 제674호 "광대한 지역에 긍(亘)하는 이동지 정리에 관한 건" 및 같은 날짜로 된 세을 제675호 "지적측량의 지정에 관한 건" 등을 3.31에 폐지한다고 통첩하였는데 이것이 지적협회에 대한 주무관청의 통첩의 효시이다.


1938.4.1
조선지적협회
업무개시
1938.1.17 설립되고 1.24 등기를 필한 재단법인 조선지적협회가 업무를 개시함으로써 우리나라 지적측량의 대행업무가 시작되다.


1939.5.1
지적기술원강습소 창설
조선지적협회는 지적기술원양성강습소를 설치하고 소장은 회장인 미즈타 가 겸무하다. 교사는 구마타, 가지오카, 노리다케, 엄주만, 실습 이경철 이었고, 제1회 졸업생은 이경희, 김종선, 박지워느 김종만, 장동규, 박재곤 등 7명이다. (1939.10) (이것이 지적기술연수원의 모체이다)
<地籍史>

1939.11.10
조선인 창씨개명
제령 제20호로 조선인의 씨명에 관한 건이 공포되어 이른 바 창씨개명이 시작되다.
<관보>

1943.3.31
조선지세령 제정
1943.3.31 제령 제6호로 "조선지세령"이 제정 공포되고 4.1부터 시행되었는데 이로써 종전의 지세령은 폐지되고 지목으로써 염전 및 광천지가 새로 등장하였으며, 지가 대신에 임대가격이 생기는 등 지세제도의 면모를 일신한 것이다. 이는 1945.8.15 해방후에도 계속 그 효력을 가졌다가 1950.11.30 법률 제155호로써 공포된 "지세법"의 시행일인 1950.12.1로써 폐지되다. 특히 "조선시세령" 에는 그 부칙으로 "조선부동산등기령" 중에 있는 용어인 「1필지의 토지」는 「1지번의 토지」로 「분필」은 「분할」로 」「합필」은 「합병」으로 개정되다.
<地籍史>

1943.3.31
조선지세령시행규칙 시행
토지대장 시행규칙 폐지
조선임대대장규칙 시행
임야대장규칙 폐지
지목 염전 및 광천지 탄생
조선지세령시행규칙 시행

토지대장 시행규칙 폐지

조선임대대장규칙 시행

임야대장규칙 폐지

지목 염전 및 광천지 탄생
<관보>

1943.12.1
지적사무를 도(道)로 이관
세무감독국을 폐지하고 그 사무를 도에 이관함에 따라 지적사무도 도의 소관이 되었으나 세무서는 그대로 두다.
<관보>

1945.8.15 정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한국은 광복되다.
일본천황 히로히토(裕仁)는 태평양전쟁의 종전을 방송하였다.(종전의 '항복'의 우회적인 표현) 이로써 한국은 35년간의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되었다. 역사가들은 해방이라 하지 않고 '광복'이라고 한다.


조선지적협회 휴면
조선지적협회는 1949년 5월 1일 대한지적협회로 개칭하고 업무를 개시 할 때 까지 2년 8개월 15일간 휴면상태로 들어가다.


1945.9.7
미 군정 선포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여 군정을 선포하다.
<軍政官報>

1945.9.29
골든 중령을 재무국장에 임명
미군정장관 아늘드 소장은 골든(C. J. Gordon) 중령을 미즈타의 자리를 이어 재무국장에 임명하다.


1947.3.29
남조선 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의 건의로 조선군정장관 러취 소장은 법령 제131호로 정부의 명칭을 남조선과도정부라고 한다.
<軍政官報>

1948.8.15
대한민국 정부수립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고 하지중장은 미군정 폐지를 발표하다.


1949.5.1~1977.7.1
대한지적협회로 개칭, 업무개시
재단법인 조선지적협회를 동 대한지적협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업무개시를 하다.(1949.4.29)
재무부장관의 통첩, 지적협회 업무 재개시에 관한 건을 시달하다.
<관보>

1949.6.15
지적협회 회장 겸임
재무부 사세국장 안태식은 대한지적협회 회장을 겸임하다(!1953.10.2)
<등기>

1949.6.21
농지개혁법 제정
법률 제31호로 농지개혁법을 제정하고 실제경작에 사용하는 토지를 대상으로 하여 비농가 소유농지, 한도초과 농지 등은 국가 귀속 또는 정부가 매수하여 경작자에게 분배하다.


1950.6.25
6.25 동한 발발
지적업무 마비
북한은 오전

 
조상땅찾기 Findarea
서울시 강북구 번동 446-13 가든타워 824호 l 대표자 : 박창한 l 전화 : 02-998-8252
사업자등록번호 : 210-20-42454 ㅣ 통신판매업 신고번호 : 2012-서울강북-0380호
Copyright 2005 findarea.co.kr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