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4-16 11:53
한성부 호적, 계의 도시 서울
 글쓴이 : 파인드에리어
조회 : 80  

계의 도시, 서울
18세기 서울을 움직인 기본 단위, 계(契)

요약 조선후기 서울의 화려한 모습 이면에는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조직된 단위는 계(契)였다. 계는 17~18세기에 등장하여 정착했고, 19~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었다. 계는 본래 인적 결사체였으나 행정구역으로, 부역의 동원 단위로, 군사 조직의 단위로서 두루 활용되었다.
『동국여도(東國輿圖)』의 일부분
『동국여도(東國輿圖)』의 일부분
목차
보이는 서울, 보이지 않는 서울
방은 없어도, 계는 있었다
행정도시의 서울의 잔가지, 계
동리와는 달랐던 계의 차이점
거대한 역의 체제를 지탱한 계
군사 동원 단위로서의 민방위 체제
계를 통해 조직된 유기체로서의 서울
보이는 서울, 보이지 않는 서울
『청구요람(靑邱要覽)』 중 「도성도(都城圖)」의 일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청구요람(靑邱要覽)』 중 「도성도(都城圖)」의 일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종(鍾)을 중심으로 각종 전(广)이 늘어선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들 시전이 국역 체제에서 벗어난 것은 1894년이었지만, 해당 위치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었다.
18세기 조선의 수도 서울은 대개 화려하고 번화한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바로 성시(城市)에 대한 시문이나 그림이다. 그 속에는 당대 조선의 다른 어떤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서울만의 ‘발달’된 정경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종루(鐘樓)를 주변으로 펼쳐져 있던 백각전(百各廛)의 다양성과 조밀성은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 이미지가 되었다. 기다란 도로를 따라 연이어 세워진 건물에, 색색의 물건을 종류별로 판매하는 가게가 들어서 있고, 사고파는 사람과 흥정을 붙이는 사람을 비롯해 구경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파가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모습. 바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서울에 대한 관찰의 결과물이다.

『태평성시도』의 일부
『태평성시도』의 일부
서울의 화려하고 번화한 모습이 강조된 태평성시도는 중국풍의 묘사가 두드러지는 것으로서 이상 세계에 가까운 것이며, 당시의 실제 정경을 그대로 그려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 남겨진 서울의 모습은 그렇게 ‘보이는’ 서울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보이는’ 서울은 조선 초기에 비해 양적으로 팽창되고 질적으로도 향상된 상업 도시였다. 양인이든 천민이든 누구든지 전국 각지로부터 서울을 오가며 보고 들었던 서울의 표면에 해당한다. 물론 『태평성시도』처럼 사실적 묘사와는 거리가 먼 경우도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조선의 사대부가 이상적으로 그리곤 했던 중국적 요소가 가미된 결과다. 하지만 당시 묘사된 서울의 모습에 유통이나 소비, 또는 유흥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서울이 가지고 있던 면모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대동방여전도(大東方輿全圖)』,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대동방여전도(大東方輿全圖)』,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후기의 수도 서울은 전국적 물류와 인력이 집결되는 중심지였다. 지도 중앙의 붉은 영역이 서울이며, 아래의 한강을 통해 서해안으로 이어지고, 동서남북의 방사형으로 뻗은 길은 전국으로 연결되고 있다.
18세기 서울에서 그렇게 물질적으로 발달된 외양이 나타남과 동시에, 자유로운 상업 또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울을 순수한 상업 도시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왕조국가의 수도인 서울에는 왕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재화와 서비스가 조세 및 조달을 통해 집중되는 과정에서 유통 역시 활발히 이루어진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즉 왕실을 지향점으로 한 국역(國役) 체제의 유지를 위한 행정 도시로서의 면모가 서울의 이면(裏面)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방은 없어도, 계는 있었다
보고 들었던 서울이 이방인들이 체감한 것이라면, 보이지 않는 서울은 주민들에게 체화된 서울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서울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단 하나의 글자로 압축해서 표현해야 한다면, 여러 후보 중에서도 단연코 ‘계(契)’를 꼽을 수 있겠다. 서울의 행정 편제에서 계가 새롭게 등장해 정착한 때가 바로 17~18세기이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이래 서울의 행정구역은 ‘부(部)’와 ‘방(坊)’으로만 구획되어 있었다. ‘부’는 방위에 따라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의 다섯으로 구분된 5부였다.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서울 전체에 도로를 기준으로 나뉜 46∼52개의 방이 있었으니, 각 부마다 평균 9∼10개의 방이 할당되었던 셈이다. 부와 방의 아래에는 자연 발생적인 촌락에 해당하는 동(洞)이나 리(里)라고 불리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의 일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의 일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각지의 계가 하나하나 표시되어 있는데, 어떤 방에 속하는지도 병기되어 있다. 예컨대, ‘권정승계(權政丞契)’ 위에 표시된 동그라미 안의 ‘송(松)’은 반송방(盤松坊)을, ‘미전상계(米廛上契)’ 위에 표시된 동그라미 안의 ‘석(石)’은 반석방(盤石坊)을 가리킨다. 반송방과 반석방은 모두 서부(西部)에 속한 방이다. (『都城大地圖』, 2004, 39쪽.)
조선시대 전체적으로 방의 숫자가 일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서울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행정구역도 확대 또는 개편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재의 아현동, 연희동, 성산동, 가좌동, 증산동, 신사동, 갈현동, 불광동, 홍제동 등의 지역은 도성 밖 지역으로서 영조 때에 이미 북부(北部)의 일부로서 파악되고 있었지만, 방 이름은 부여되지 않고 있었다. 정조 때가 되면 이들 지역이 연희방(延禧坊), 연은방(延恩坊) 등의 명칭을 가지고 구획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방이 설정되지 않았던 시기에도 이들 지역에 아현계(阿峴契), 연희궁계(延禧宮契), 성산리계(城山里契), 가좌동계(加佐洞契), 증산리계(甑山里契), 신사동계(新寺洞契), 갈고개계(葛古介契), 불광리계(佛光里契), 홍제원계(弘濟院契) 등의 계가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행정도시의 서울의 잔가지, 계
의령남씨가전, 『금오당랑계첩(金吾堂郞契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의령남씨가전, 『금오당랑계첩(金吾堂郞契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의금부 관원의 명단과 모임 광경을 기록한 계첩(契帖)의 일부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친목을 즐기거나 풍류를 즐기기 위해 계모임을 그림이나 글로 남겨두곤 했는데, 동일 관청의 전・현직자를 중심으로 한 기록이 다수 현존하고 있다.
전통시대에 농촌에서 형성되었던 계는 상부상조, 또는 상호부조를 위한 조직이었다. 그래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계를 “주로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받거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만든 전래의 협동 조직”이라고 설명하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도 계를 “우리나라에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던 협동단체”라고 정의한다. 이런 경우의 ‘계(契)’는 ‘계(稧)’와 혼용되었다는 점, 현대에도 생명력이 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계모임’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특정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계다. 그렇다면 사전에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는, 조선 후기 서울에서의 행정단위에 해당하는 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육전조례(六典條例)』 「오부(五部)」 및 「방리(坊里)」조의 도입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육전조례(六典條例)』 「오부(五部)」 및 「방리(坊里)」조의 도입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각 부의 방별로 각종의 계가 조사・관리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방(坊)이라는 행정구역은 서울 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계는 오직 한성부에서만 출현한 고유의 단위였다. 18세기 서울에는 320개가 넘을 정도로 많은 계가 조직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부와 방 아래에 동이나 리 같은 마을이 있는데도 굳이 계를 설정하여 구분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꾸어 묻자면, 동・리와 달리 계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까? 부・방이라는 서울 행정의 근간이 동・리라는 지엽에 이르지 못한 공백을 계가 메워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계는 당대 서울의 이면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리와는 달랐던 계의 차이점
조선시대 한성부에서 관내의 동・리를 얼마나 철저히 조사하고 관리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 없다. 현재까지 파악된 18~19세기 서울의 동・리는 250여개로서, 계에 비해 그 숫자가 적다. 이는 동・리에 대한 면밀한 파악이 행정 당국의 과제나 관심사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조선 초기에는 100호(戶) 단위의 주민 편제를 위해 리를 설정한 적도 있었지만, 조선 후기의 동・리는 민간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또한 동・리는 그 명칭이 주로 우물, 다리, 지형지물 등을 따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로 지리적인 특성에 입각한 지역 단위의 구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부장호적(北部帳戶籍)』,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북부장호적(北部帳戶籍)』,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현존하는 한성부 호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북부(北部) 조지서계(造紙署契)의 3개 호(戶)가 보인다. 호수(戶首)는 각각 사노(私奴) 김생(金生, 56세), 사노 업룡(業龍, 경자생), 장인(匠人) 박현룡(朴賢龍, 을사생)이다.
반면에, 계는 정부에 의해서 모두 파악되고 있었으며, 관리 대상으로 성립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 설치와 폐지를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나 승인이 필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세기부터 계가 발생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개는 특정 목적을 위한 인적 결사체의 형태였다는 점에서, 농촌의 ‘계모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형성된 계는 한성부에서 방역(坊役)의 수행을 위해 동원하기 쉬웠다는 점 때문인지, ‘부-방-계’라는 체계를 형성하며 서울 행정구역의 하위 단위로 성립하게 되었다. 거칠게 말하면, 조선 초기 서울에서의 리가 담당했던 자리를 계가 대체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래서 계는 기본적으로 지역에 기반한 동・리와 중첩되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지 않고 하나의 동에 여러 계가 구성된 경우도 있었다.

『고문서집성(古文書集成)』 제45책, 「1699년 박상욱(朴尙郁) 호구단자」의 일부.
『고문서집성(古文書集成)』 제45책, 「1699년 박상욱(朴尙郁) 호구단자」의 일부.
가장 오른쪽에 “남부(南部) 훈도방(薰陶防) 주자동계(鑄字洞契) 호적단자(戶籍單子)”라고 적혀 있듯이, 특정 개인의 소속은 ‘부-방-계’ 단위까지 기입되었다. 이어서 “제3통 3호”라고 적었을 뿐, 동리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계’가 서울 인구를 구성하는 기초 단위였음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한성부의 방역이란 서울 사람들이 맡아서 처리해야만 했던, 일종의 부역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장빙(藏氷), 치도(治道), 제설(除雪), 운부(運負), 현등(懸燈) 등이 대표적이다. 즉, 서울이라는 도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빙고에 얼음을 보관 하는 일, 도로를 닦는 일, 눈을 치우는 일, 짐을 나르는 일, 밤길을 밝히는 등을 매다는 일 등을 누군가 해야만 했던 것이며, 그 구체적인 분담의 단위가 바로 계였던 것이다. 서울은 저절로 움직이는 도시가 아닌, 사람이 하나하나 움직여야만 했던 도시였다. 그리고 그 일을 맡은 것은 서울 주민 각각의 ‘개인’이 아니라, 여럿이 모여 형성된 ‘계’였다.

‘훈련도감포살수(訓鍊都監砲殺手)’, 『인조장렬후가례도감의궤(仁祖莊烈后嘉禮都監儀軌)』,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훈련도감포살수(訓鍊都監砲殺手)’, 『인조장렬후가례도감의궤(仁祖莊烈后嘉禮都監儀軌)』,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훈련도감의 포수(총을 가진 병사)와 살수(창을 가진 병사)가 왕실의 혼례에 동원된 모습. 의례가 있을 때 도성의 군인이 동원되곤 했던 사실은 의궤나 반차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군인이나 민간인 할 것 없이 서울 주민은 모두 동원의 대상이었다.
거대한 역의 체제를 지탱한 계
호적상 서울의 주민으로 등록되어 있던 모든 사람들은 정부에 의해 관리되는 계의 일원이었다. 계의 명칭에 동리명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지역적 구분과 계의 설정이 일치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계가 어디까지나 인적 결사체였다는 특징을 감안할 때, 어떤 사람이 어떤 계에 속하는지는 결국 그 사람의 직업이나 소속과 연계된 문제였다. 동리명이나 지형지물명을 제외하면, 계의 명칭은 주로 기관명, 시전명, 인물명 등을 따랐다. 예컨대, 계의 명칭 중에는 특정 기관의 ‘내계(內契)’라고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에는 해당 기관에 소속된 사람들이 그 계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갖가지 시전의 명칭이 들어가 있는 계는 해당 시전의 인적 조직이 계의 인적 구성과 일치하는 경우였을 가능성이 높다. 특정 인물의 이름이 계 명칭에 들어가 있는 경우에는 그 사람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필자미상, 『신미갑계회첩(辛未甲契會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자미상, 『신미갑계회첩(辛未甲契會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미년인 1631년에 태어난 사람들의 동갑 계모임. 친목을 위한 계모임을 묘사한 그림은 조선 중기 이래 여러 점이 남아서 현존하고 있다.
계가 인적 결사체였다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한 가지 더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 지도를 살펴보면, 중부처럼 도성 내에 인구가 밀집한 지역에는 계의 밀도가 높고, 도성 밖 지역처럼 인구가 많지 않은 지역에는 계의 밀도 역시 낮다. 또한 특정의 계는 인구의 증가에 따라 ‘1계’, ‘2계’ 등 번호를 붙여 세분화하였는데, 반드시 지역적 팽창이 수반되는 것은 아니었다. 계의 목록을 잘 정리하여 살펴보면, 장기적으로는 대체로 변화가 없었으나, 단기적인 생성과 소멸, 즉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가가 파악하려 한 것은 지역별 인구 규모가 아니라, 지역별 인력의 배정 현황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조선 후기 서울은 거대한 역(役)의 체제였던 것이며, 계를 단위로 하여 국가에 의해 관리 또는 동원되고 있었다.

『동국여도(東國輿圖)』 중 「도성도」의 일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동국여도(東國輿圖)』 중 「도성도」의 일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인구밀도가 높아진 조선 후기 서울을 묘사한 지도다. 구획별로 빼곡하게 들어선 가옥은 특정 색깔로 도색되어 기와집과 초가집으로 구별되고 있다.
군사 동원 단위로서의 민방위 체제
17세기에 등장한 이래 서울의 주민을 동원하기 위한 인적 편제로 활용되었던 계는 18세기 들어서 제도화되었고, 이는 19~20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현존하는 『어제수성윤음』 『동국문헌비고』 『호구총수』 『육전조례』 등 관찬의 각종 자료를 통해 계의 목록이 쉽게 확인된다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자료 중 일부에서는 도성 수비와 관련된 정보가 동시에 확인되고 있다. 예컨대, 훈전(訓前), 금좌(禁左), 영중(營中) 등의 구분이 보인다. ‘훈전’은 ‘훈련도감 전위(前衛)’를, ‘금좌’는 ‘금위영 좌위(左衛)’를, ‘영중’은 ‘어영청 중위(中衛)’를 각각 가리킨다.

『어제수성윤음(御製守城綸音)』 중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地圖)」의 일부.
『어제수성윤음(御製守城綸音)』 중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地圖)」의 일부.
빨간색으로 표시한 금후(禁後)와 금우(禁右)는 각각 ‘금위영 후위’, ‘금위영 우위’를 가리킨다.
이를 통해 계가 단순히 방역의 부과 단위로서만 기능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도성의 수비를 위한 군사 동원의 단위로서 계를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도성을 지키는 ‘수도방위군’은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었고, 이들 부대에 속한 군인들이 상비군으로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다. 군인을 제외한 나머지 서울 주민은 계를 편제 기준으로 하여 모두 이들 세 군영에 배속되어 일종의 민방위 대원으로서 활약해야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세 군영이 각각 전(前)・후(後)・좌(左)・우(右)・중(中)의 다섯 지역으로 분할되어 각 계를 관리하는 형태로 서울 인구 전체를 나누어 맡고 있었다. 다시 말해 계는 3 × 5 = 15개의 권역으로 나뉜 군사 조직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군사 도시로서의 서울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를 통해 조직된 유기체로서의 서울
처음에는 자연 발생적인 인적 결사체였던 서울의 계가 행정구역으로서, 부역의 동원 단위로서, 군사 조직으로서 활용되고 있었으며, 그러한 정비는 18세기 영・정조 때에 이루어졌다. 또한 계는 시기에 따라 적절히 신설되거나 분리되거나 소멸되는 등의 조정을 거치면서 단기적으로 유동하는 인구를 반영하였다. 건국 초기에 왕조의 새로운 수도로 계획된, 도시로서의 서울의 모습이 다시금 새롭게 정비되어갔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도시가 팽창되면서 확장된 행정구역인 성 밖에 대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도성 내의 주요 지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계는 지역을 관할하기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인간을 통제하기 위한 묶음의 단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짜인 계를 통해 서울은 움직이고 있었다. 18세기의 한성부, 즉 왕조의 수도 서울은 잘 조직된 계로 엮인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였던 것이다.

『고문서집성』 제58책, 「1902년 유원성(柳遠聲) 호적표」.
『고문서집성』 제58책, 「1902년 유원성(柳遠聲) 호적표」.
갑오개혁 이후 서울의 5부(五部)는 5서(五署)로 개편되었다. 이 호적표는 “한성부(漢城府) 북서(北署) 순화방(順化坊) 상패계(上牌契) 세포동(細浦洞) 제56통 제9호”의 호주 류원성(柳遠聲)의 것이다. 20세기 들어서도 서울의 행정 구역으로서 ‘계’가 여전히 유효한 단위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계의 도시, 서울 - 18세기 서울을 움직인 기본 단위, 계(契) (18세기, 세계 도시를 걷다, 2018.06.08, 조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