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11-24 16:20
상속권의 변천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290  

일정한 친족적 관계가 있는 사람 사이에 한 쪽이 사망하거나 법률상의 원인이 발생하였을 때 재산적 또는 친족적 권리와 의무를 계승하는 제도.

우리 전통사회의 상속제도는 크게 보아 제사상속(祭祀相續)과 재산상속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사의 영속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가산(家産)의 영속성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므로,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비교사적으로 보면 고대사회에서는 그리스이나 로마는 물론, 어느 민족에서나 계세사상(繼世思想)과 조상숭배신앙이 있었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조상숭배는 조상을 외경하고 영혼을 숭배, 제사하는 신앙형태로서, 첫째로 영혼불멸의 관념과, 둘째로 영혼은 내세(來世)에서도 현세(現世)에서와 마찬가지로 생활하며, 그 생활필수품의 충족을 살아 있는 자손에게 의뢰하는데, 이 영혼에 대한 공양을 태만하면 자손에게 불행이나 위해(危害)로 복수하며, 반대로 성의껏 충분히 공양하면 행복과 수호를 주는 것으로 믿는 종교적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죽음’이라는 사실은 이와 같은 영혼불멸관이나 조상숭배를 낳는 심리적 조건이 되는데, 죽음은 살아 남은 자손의 마음 속에 한없는 적막감·고독감·무력감을 낳게 하므로, 그들 자신이나 생활공동체로서는 중대한 위협이 되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영혼의 현세에의 복귀나 현세에 대한 수호를 강렬하게 희구하였던 것이다.

부여에서는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시체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얼음을 사용하였으며, 고구려에서는 시체를 옥내에 두어 3년 뒤 길일(吉日)을 택하여 매장하며, 부모나 남편의 상(喪)에는 3년을, 형제의 경우는 3개월을 복상(服喪)하였고, 초종(初終)에는 곡(哭)을 하며 장사를 지낼 때는 북치고 춤추며, 매장이 끝나면 사자(死者)가 생시에 입고 사용하였던 옷과 소·말을 묘 옆에 놓아두는데, 모인 사람들이 이를 다투어 가져갔다고 한다.

또, 널을 사용하여 후장(厚葬)을 하며, 금전이나 재물을 들여 돌을 쌓아 봉(封)을 만들고 송백(松柏)을 심었으며, 집의 좌측에 큰 집을 지어 귀신을 봉사하고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을 받들었다.

백제의 습속도 상제(喪制)는 고구려와 같으며, 부모와 남편은 3년상이고 다른 친족은 장사지낸 뒤 제복(除服)하였다. 신라도 관(棺)을 사용하여 염장(殮葬)하며 분릉(墳陵)을 만들고 왕이나 부모·처자를 위하여 1년을 복상하였다.

죽은 사람을 매장할 때는 생전에 사용하였던 장신구를 찬 상태에서 매장하였고, 무기·일상용품·토기·금은보석과 같은 장신구를 부장(副葬)하였으며, 죽은 사람의 시종인(侍從人)을 순장(殉葬)하는 습속도 부여를 비롯하여, 고구려는 동천왕 때까지, 신라는 지증왕 2년경까지 행하여졌으며, 가야시대도 행하여졌다.

조상숭배관념도 일반적으로 강하여, 고구려나 백제시대도 시조묘(始祖廟)를 세웠으며, 고구려의 신대왕 때 국상(國相)이 죽자 7일간 파조(罷朝)하여 후장(厚葬)하고 수묘(守墓)를 위하여 20가를 두었다.

신라에서도 남해왕 때 시조묘를 세웠고, 소지왕 때 수묘이십가(守墓二十家)를 두었으며, 지증왕 때 상복법(喪服法)을 반포하고, 혜공왕 때에 오묘제(五廟制)를 세웠다.

이러한 사묘제도(祠廟制度)는 중국의 유교영향을 받은 것으로 왕이나 귀족들 간에 행해졌던 형식이지만, 일반평민도 마찬가지로 다분히 가부장적인 가족제도를 취하고 있었으므로, 조상의 제사는 자기의 혈통을 이은 자손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부녀의 정조(貞操)를 절대시하고 제사를 계승할 아들을 낳지 못하면, 축첩(畜妾)하거나 산천에 빌어서 아들을 낳았으며, 그것도 안 될 때는 양자를 들여서라도 입사봉사(入嗣奉祀)를 하였다.

유교의 종법(宗法)의 수용과는 관계없이 우리 고대인들은 고유의 신앙으로서 계세사상과 조상숭배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교가 수용됨에 따라 왕이나 귀족층에서 형식을 조금씩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불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유교적 의식은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고대로부터의 사상·신앙은 그 후대에 계승되고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우리 가족제도의 한 특징을 규정짓고 있다.

계세사상에 의한 지위의 상속과 함께 그것과 결합하여, 혹은 별도로 재산상속도 행해졌을 것이나 그 관습이나 법은 전혀 알 길이 없다. 후세의 관습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으나 경솔히 추정할 수는 없다.

다만, 말과 소가 중요한 사유재산이었으므로 그것과 함께 금은보화가 상속의 대상이었으며, 토지의 사유도 부여 때부터 이미 있어왔던 점, 그리고 가부장권이 강대하였던 점으로 보아, 재산상속이 행해졌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 제사상속과 가계계승

조상숭배의 관념과 습속이 형식화된 예제(禮制)에 의하여 상(喪)·제(祭)를 행하게 된 것은, 유교의 수용과 보급에 따라 유교의 형식을 취하게 됨으로써 비롯된다.

고려시대는 여러 제도에서 당(唐)을 본받았으므로 상례·제례에 관해서도 당제(唐制)를 수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처음 태조 때는 사친(四親)을 추존(追尊)하였으나 대묘(大廟)를 세우지 않았다.

992년(성종 11) 비로소 오묘(五廟)를 정하여 대묘를 세웠으나,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모두 불교식으로 상제를 행하였으므로, 유교식의 상제는 극히 일부에서만 행하여졌다. 따라서, 봉사라는 관념과 습속은 있었으나 유교적·종법적인 가계계승과 결합하지 못하고, 단순한 불교적 의식에 그쳤을 것으로 보인다.

집에는 반드시 신사(神祠)를 세워 이를 위호(衛護)라 하였고, 또 문종 때에는 관리들이 혼당(魂堂)을 세워서 부조(父祖)를 봉사하였다고 하나, 무속이나 불교의식에 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유교식의 상제는 고려말에 주자(朱子)의 ≪가례 家禮≫가 전하여짐으로써 유학자들이 이를 연구하여 보급함에 따라 제도로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이르러 입묘봉사제도(入廟奉祀制度)가 공포되었는데, 대부(大夫) 이상은 3대, 6품 이상은 2대, 7품 이하부터 서인(庶人)은 부모만을 봉사하고, 가묘(家廟)를 세워 기제(忌祭)를 비롯하여 절사(節祀)를 받들도록 하였고, 따로 사대부가제의(士大夫家祭儀)를 제정하여 모든 의식은 한결같이 주자의 ≪가례≫를 기준으로 하게 하였으며, 이듬해는 대명률복제식(大明律服制式)을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가묘제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상제와 복제도 일부 유가에서만 행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유교식 상제가 제도적으로 강행되었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봉사와 종법이 분리된 상태였으므로, 고려시대에 제사상속제도와 관습은 조선시대와 같이 정비되지 못하였다.

제사와 직접 관련이 없는 가계계승(家系繼承)은 입사(入嗣)라는 용어에 따라 상속법을 이루었다. 왕위계승에 관해서는 태조훈요(太祖訓要)에 장자계승을 원칙으로 하고 장자가 적격자가 아니면 차자(次子), 차자가 적격자가 아니면 그 형제의 집안에서 적격자를 세우도록 하였고, 이것은 민간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반 백성에 적용할 입사법은 1046년(정종 12) 2월에 시행되었는데, 그 순위는 첫째 적장자, 둘째 적장자의 적장자[嫡孫], 셋째 적장자의 동모제(同母弟) 즉, 중자(衆子)이며 장유(長幼)의 순서에 따르며, 넷째 적손의 동모제 및 첩손(妾孫), 다섯째 서자(庶子) 즉, 첩자(妾子), 여섯째 외손자의 순이었다.

또, 1068년(문종 22)에 정해진 법에 의하면, 아들이 없는 자는 형제의 자, 즉 친조카를 입양하여야 하며, 친조카도 없는 경우는 타인의 3세 전의 기아(棄兒)를 수양(收養)하여 계후(繼後)할 수 있는 것으로 하였으므로, 외손자가 없으면 일곱째 질(姪), 여덟째 수양자의 순위로 된다.

입사법의 특색은 부계혈족이 없는 경우 외손이 사손(嗣孫)이 될 수 있고, 이성(異姓)인 수양자에게도 계사자격을 인정한 점이다. 따라서, 고려의 입사법은 가통을 계승하는 승가계통(承家繼統)이지 봉사(奉祀)와 종통(宗統)을 계승하는 승사계종(承祀繼宗)이 아니었다.

(2) 재산상속

고려시대의 재산상속에 관하여서는 통일적인 법제가 없고, 중요한 사항에 관하여는 판(判)·제(制)와 같은 단행왕법(單行王法)으로 규제하였으며, 일반적으로는 관습법에 따랐다. 즉, 상속에 관한 분쟁이 있는 경우 재판에서는 관습법을 승인 또는 수정함으로써 판례법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상속이라 함은 사망으로 인하여 사망자가 소유했던 재산상의 법률관계를 일정한 친족이 승계하는 사인상속(死因相續)을 뜻하는데, 고려시대는 부모가 생전에 자손에게 그 소유재산을 분재하는 생전분재가 원칙이었으며, 생전분재가 없었거나 생전분재에서 누락된 재산이 있을 경우 부모의 사후(死後)에 자손이 분재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한 뜻에서는 상속재산을 조업(祖業)·가업(家業)·가산(家産)·재산(財産)·재(財)라고 하였다.

이러한 재산은 조상으로부터 받아서 자손에게 전해야 하며, 이러한 조상전래의 재산인 조업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처분하는 것은 불효라고 생각하였고 법으로도 금하였다.

생전분재와 관련하여 밝혀야 할 것은 ≪고려사≫ 형법지(刑法志)의 호혼조(戶婚條)에 있는 “조부모·부모의 생존시에는 자손은 별적이재(別籍異財)할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하면 도(徒) 2년, 복상(服喪)중에 별적이재하면 도 1년에 처한다.”는 규정인데, 이것은 조부모·부모의 유산은 반드시 복상을 마친 다음에 분재해야 한다는 것이며, 당률(唐律)이나 송형통(宋刑統)과도 같은 규정이다.

그러나 이 형법지의 규정은 하나의 이상법(理想法)에 불과하였을 뿐 실효성이 없었으니, 유교적인 복상제도가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는 사정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상속인의 범위와 순위는 상속재산을 ‘조업’이라고 하였고, 본손(本孫)·사손(使孫)이 최후의 상속인이었던 점이 조선시대와 같으며, 본손 또는 사손은 조부를 공통조상으로 하는 4촌 이내의 자손임에 틀림없다.

제1순위는 자녀이며, 딸도 출가여부를 불문하고 아들과 함께 상속하였으며, 자녀가 사망한 경우는 손자녀가 대습상속(代襲相續)하였다. 자녀 중 수양자녀(收養子女)·시양자녀(侍養子女)도 포함되었다.

제2순위는 자손이 없는 경우의 배우자인 남편 또는 아내인데, 고려말의 법에 의하면 아내의 유산은 남편이, 남편의 유산은 아내가 개가(改嫁)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모두 종신 동안 상속하며, 사망 전에 계후자(繼後子)나 수양자녀·시양자녀를 입양하면 이들이 상속하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남편의 유산과 아내의 유산으로 분리되어 각자의 본손(사손) 즉, 4촌 이내의 근친이 상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범위 내의 근친이 없으면 유산은 국가에 귀속되었다.

자녀를 비롯하여 같은 순위의 상속인 간의 상속분은 균등하였다. 딸은 출가여부를 불문하고 아들과 같았다. 이러한 균분상속제도는 균분의식과 함께 국가에 의해서도 보장되고 있었으므로, 부모가 생전분재를 할 경우에도 심히 차별할 수 없었고 사후분재인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말에 이르면 유산의 불균분으로 인한 분쟁이 폭주하여 따로 임시재판관청을 설치할 정도였는데, 균분하지 않은 경우에 ‘고관평분(告官平分)’하는 것은 실효성 있는 법이요 관습이었다.

상속재산의 내용은 토지·노비·가옥을 비롯하여 동산(動産)이며, 가장 분쟁이 많았던 재산은 노비로서, 재산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위에 든 상속법제는 노비와 동산의 경우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토지의 경우는 자녀가 공동상속하고 상속분이 균분이었는지에 관하여 학설이 구구하며, 아직 통설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고려시대도 토지의 사유가 상당히 발달하였으나 당시의 전시과(田柴科)체제하에서 토지는 전시과전(田柴科田)·향리전(鄕吏田)·군인전(軍人田)·등과전(登科田)·사전(賜田) 등의 구분이 있고, 토지 자체의 급여인가 아니면 수조권(收租權)만의 급여인가, 자손상전(子孫相傳)이 허용되었는가의 여부, 순수한 사적소유지인가 등 토지의 공적·사적 성격에 따라 법의 규제가 다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상속법제도 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문제였던 것은 1046년(정종 12)의 판(判)에 ‘제전정연립(諸田丁連立)’의 규정인데 전정(田丁)은 앞서 서술한 입사법 (立嗣法)과 완전히 같은 순위 즉, 적장자 우선으로 하여 연립(連立)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관하여 한 학설은 전시과체제하에서 토지는 적장자가 단독상속하고, 적장자가 없는 경우 판(判)에 정한 순서에 따라 단독상속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에 전시과체제가 무너지고 농장(農莊)이 성립, 확대됨에 따라 토지의 사적 소유가 늘어남으로써 분할상속화의 경향을 띠게 되었고, 드디어 고려말의 과전법하에서 분할상속이 공인되었다고 하여, 토지의 적장자단독상속과 노비 등의 자녀균분상속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반대하는 학설은 고려시대는 초기부터 토지의 국유제가 아니라 사유제가 확립되어 토지도 자녀균분상속제였으며, 전정연립에 관한 규정은 부모로부터 분재받은 토지와는 구별되는 토지 즉, 국가로부터 지급되는 토지인 전정상속의 순위에 관한 법제적 규정이며, 실제로는 적장자우대가 아니었다고 한다.

공음전시(功蔭田柴)는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수여되는데, 적장자우선원리에 따르지 않고 직계자손인 남자에게 상속되는 것이 원칙이고, 아들이 없는 경우는 여서(女?)·친질(親姪)·양자·의자(義子)의 순서로 한 명이 선정되어 상속되었다. 음직(蔭職:과거를 보지 않고 父祖의 공으로 얻은 벼슬)도 직계자손·생질·여서·수양자·내외손의 순위로 그 중 한 명을 뽑아 수여하였다.

(1) 개 념

조선시대의 제사상속은 중국의 주(周)시대에 연원을 두고, 주자(朱子)가 연구한 종법에 따라 체계화된 것이다. 고려 충렬왕 때 ≪주자전서 朱子全書≫가 들어온 것을 계기로 유교가 선양되었고, 1390년(공양왕 2) 종법에 따라 사대부가제의(士大夫家祭儀)를 공포하고, 이어 복제를 새로 만들어 한결같이 명률복제식(明律服制式)에 따르게 하였다.

이에 따라 그 전과는 달리 적서종지(嫡庶宗支)의 분(分)이 중요시되고 오직 남계혈족인 종자종손(宗子宗孫)에 의해서 승계하게 됨으로써, 종전의 승가계통(承家繼統)이 승사계종(承祀繼宗)으로 되고, 입사(立嗣)의 법이 봉사 내지 승중(承重)의 법으로 불리게 되어, 조선왕조의 법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이와 같이, 봉사와 종통(宗統)의 계승이 신분상속(身分相續)의 주지(主旨)로 됨에 따라 승중·승조(承?)·승가(承家)·계사(繼嗣)·계후(繼後)·입후(立後)·봉사라는 말은 모두 제사상속을 의미함과 동시에, 선대(先代)의 인격 내지 신분을 승계하는 뜻으로 되었다.

따라서, 제사승계를 제외한 가장권 내지 호주권의 승계라는 관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를 표현하는 용어도 없는 것이 우리 나라 신분상속의 특징이었다.

(2) 제사상속인의 순위와 범위

제사상속인의 순위는 ≪경국대전≫ 예전(禮典) 봉사조(奉祀條)에 규정되어 있는데, 그 순위는 ① 적장자, ② 적장자의 적장자, ③ 적장자의 중자(衆子:맏아들 외의 모든 아들), ④ 적장자의 첩자, ⑤ 중자, ⑥ 중자의 적장자, ⑦ 중자의 중자, ⑧ 중자의 첩자, ⑨ 양첩자(良妾子), ⑩ 양첩자의 적장자, ⑪ 양첩자의 중자, ⑫ 양첩자의 첩자, ⑬ 천첩자(賤妾子), ⑭ 천첩자의 적장자, ⑮ 천첩자의 중자, 천첩자의 천첩자이며, 적서(嫡庶)·귀천(貴賤)·장유(長幼)의 순서에 따라 각기의 직계자손으로 미치게 하였다.

이를 통해 소목(昭穆: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의 서(序)에 맞게 함으로써 세대적 계통을 중시하며, 적장자의 첩자손이 적출중자보다 우선하도록 하고 있다.

고려의 입사법과 다른 점은 적장자의 중자손과 첩자손이 적장자의 적제(嫡弟)보다 우선하며, 중자와 첩자의 자손도 순위에 넣었으며, 첩자를 양첩자와 천첩자로 구분하여 양첩자를 천첩자에게 우선하게 하고, 외손과 이성양자(異姓養子)의 계후자격을 박탈한 점이다.

첩자녀의 상속인 자격을 인정함과 함께 예전 입후조(立後條)에도 적처(嫡妻)와 첩에게 아들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제사를 승계할 양자를 입양하도록 규정하였으나, 첩자에 의한 가계계승을 정통성과 관련하여 바라지 않는 경향이 있어, 예전 봉사조에는 첩자가 있더라도 이를 제쳐두고 제(弟)의 아들로 상속하게 할 것을 원하는 경우는 이를 허용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특히, 17세기부터 첩자천시관습과 의식이 심화됨에 따라 일반적으로 첩자의 봉사자 자격이 실제로는 박탈되고 첩자가 있더라도 반드시 입양을 하여 적계(嫡系)로 하여금 종통을 잇는 것이 관습으로 되었다.

대를 이을 적장자가 없으면 중자가 봉사자로 되는 것이 법전에 규정되어 있으며, 그 무후(無後:대를 이어갈 자손이 없음)의 뜻에 관해서는 위에 든 순위의 후손이 없는 경우를 지칭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후’를 적자가 없는 경우인가, 또 첩자도 없는 경우인가 그리고 입후를 할 수 있는지 또 입후를 할 수 있다면 선정자는 누구이며 그 선정시기는 언제인가 등에 대하여 형망제급(兄亡弟及)과 관련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리하여 중기부터는 일반적으로 기혼장자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고 그에게 적자가 없을 때는 그 적장자를 위하여 사후양자(死後養子)를 해야 하고, 입양하지 않은 경우에 한하여 차자(次子)가 형망제급하는 게 관습이 되었다.

즉, 아들 없는 기혼장자를 위해서는 반드시 사후양자를 해야 하며 사실상 입양을 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그 봉사순위는 당연히 차적자손(次嫡子孫)에게는 미치지 않으며, 차적자손을 봉사손으로 세우려면 반드시 입양의 방법에 따르도록 한 것이다.

물론, 장자가 혼인하기 전에 사망한 경우에 차제(次弟)가 장자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차적봉사(次嫡奉祀)이지 원래의 형망제급이 아니며 혼인한 자라야 세대(世代)에 계상될 수 있었다.

봉사의 대수(代數)에 관하여는 ≪경국대전≫ 예전 봉사조에 문무관으로서 6품 이상은 3대, 7품 이하는 2대, 서인(庶人)은 단지 부모만을 봉사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봉사자의 신분여하에 따라 봉사대수가 다르므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다.

부모만을 봉사하는 서인이 사망하고 그 적장자가 봉사하는 경우는 단지 부(父) 1대를 봉사함에 그치고, 제사자로서의 지위의 승계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도 제사상속에 준하여 승중이라고 칭하게 됨에 따라, 조선 중기 이후는 법전의 규정이 지켜지지 않고 대개 4대를 봉사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그러나 4대봉사를 한다고 해서 만든 계급이 계사(繼嗣)로 의식한 것은 아니고, 상민계급에서는 향화(香火)를 받드는 것을 봉사로 의식하고, 종조(宗?)와 윤서(倫序)를 계승하는 것은 별개의 일로 의식하였다. 즉, 양반계급에서만 봉사와 계사가 불가분적으로 명확히 결합되어 있었다.

(3) 폐적(廢嫡)

봉사자로 된 자 또는 될 자가 일정한 사유로 인하여 제사자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것을 폐적이라고 하는데, 법전의 규정은 없으나 18세기 중엽까지는 폐적의 법관습이 행하여졌다.

폐적사유는 맹인(盲人)·주사(誅死)나 유배(流配) 등의 처형·폐질(廢疾)·주사(主祀)를 감당할 수 없는 사유·품행불량·불효·불충·패역불순(悖逆不順)·실종(失踪)·생모의 개가(改嫁) 등이었다.

폐적은 1473년(성종 4)부터 관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으며 사당(祀堂)에 고하였다. 폐적되면 장자는 중자의 지위로 떨어지고 차적봉사를 하거나 입양을 하였다.

(4) 외손봉사와 이성계후(異姓繼後)

고려시대에 인정되었던 외손이나 이성양자에 의한 계후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법률상 금지되었으나 그 유속(遺俗)은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아들이 없는 경우에 질(姪)이나 동종지자(同宗支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손자를 시양자(侍養子) 또는 수양자(收養子)로 입양하여 유산을 물려주고 봉사하게 하였다.

또한 자녀가 없는 경우에 아내의 친정질(親庭姪)이나 처이질(妻姨姪)들을 입양하거나 남편이 죽은 뒤에 아내가 친정질(親庭姪)을 수양하는 것, 자녀 없는 사람이 유기아(遺棄兒)나 친지(親知)의 아들을 수양하는 관습 등은 조선 초기까지는 일부 지배계층에서도 이를 고래의 관습이라 하여 옹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종법이 본격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한 후기부터는 양반계층에서는 이성계후를 배척하게 되고 주로 상민층에서만 행해졌다.

친자식이 없는 경우에 정이 끌리는 아이를 어려서부터 양육하면 그간의 정이 친자식과 다름없으므로, 유산을 물려주고 후사(後事)를 위탁하며 봉사하게 하는 것은 인간자연의 정이며, 양부모들은 이를 계후봉사(繼後奉祀)로 생각하였다. 유학자들은 이것을 단순한 정의(情義)에 따른 복상(服喪)이고 단순히 향화(香火)를 받드는 데 불과하며 계사가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 이성봉사는 종법적 이념에 입각한 계사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 형식을 빌린 것으로서, 당국도 서민들의 이성봉사는 구태여 금하지 않았으며, 이성계후를 위한 입안(立案) 신청에 대해서 ‘계후’·‘입후봉사’ 로서의 입안을 발급해주었다.

(5) 제사상속의 효과

제사상속인은 부조(父祖) 또는 그 이상의 종통(宗統)을 계승하므로, 이를 주사인(主祀人) 혹은 주사손(主祀孫)이라고 하며, 종통계승권과 봉사주재권을 계승하는 결과 족보·제구(祭具)·사당(祠堂)이 있는 가사(家舍), 그리고 봉사비용에 바쳐진 봉사조(奉祀條)인 재산(토지·노비)을 승계하였다.

봉사조재산은 부모를 위한 것, 조부모를 위한 것, 또는 그 이상의 조상을 위한 것 등이 있는데, 원래는 봉사라고 하는 특정의 목적을 위하여 설정된 재산이므로, 제사상속인은 관리·사용·수익권만 있고 처분권은 없으며, 모든 자손들로 구성되는 문중 혹은 종중의 합유적(合有的) 내지 총유적(總有的) 공유재산이었다.

그러나 봉사손이 종손(宗孫)으로서 우대되고 종통의 중요성이 깊이 인식됨에 따라, 종손이 단독소유하는 성격을 띠게 되는 예도 있었는데, 소유권 귀속의 성격은 지방 또는 가문에 따라 혹은 종손의 사회·경제적 지위여하에 따라 달랐다.

한편, 17, 18세기까지는 제사윤회(祭祀輪回)의 관습이 있어서 5대조 이상의 시제(時祭)만을 종손이 담당하고, 부모나 조부모의 제사는 형제자매들이 돌아가면서 윤번제로 봉사하였다.

이것은 재산상속이 자녀균분상속제도였고, 부모·조부모와의 사이의 은정(恩情)을 고려한 때문으로 짐작되는데, 주로 제사의 장소만이 다를 뿐이고 종통과는 무관하였다.

그러나 후기부터는 이 윤회관습은 자취를 감추고 종자·종손이 전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이전은 가문에 따라 자녀윤회·중자윤회·적장자봉사가 공존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재산상속에 관한 관습과 법은 조선시대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경국대전≫ 형전(刑典) 사천조(私賤條)에는 상속인의 순위와 범위·상속분·유언·상속에 관한 소송에 관하여 매우 상세하고 치밀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 상속에 관한 규정이야말로 조선의 고유법이며, 법전에 규정됨으로써 영구불변의 조종성헌(祖宗成憲)으로서 19세기까지 개정되지 않고 효력을 지녔으며, 어느 다른 제도에 못지 않게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1) 개 념

상속재산을 표시하는 일반적 용어인 조업(祖業)은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재산의 총칭이며, 거기에는 조상들의 얼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중국처럼 가족공산제가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재산과 어머니의 재산은 법률상 명확히 각자의 고유재산으로 구별되어 있으나, 이것도 상속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승된 조업과 결합되어, 다시 자손에게 전승될 재산으로서의 조업의 구성 부분이 되었다.

이와 같이, 유산의 구성 부분은 조업과 아버지의 재산, 어머니의 재산인데, 상속되어야 할 유산으로서는 반드시 구별하여 조업, 부모 또는 부처(夫妻)를 기준으로 해서 처리하였다.

자손에게 상속될 유산은 우리의 고유한 용어로는 ‘衿’이라는 한문자를 사용하되 그 훈(訓)을 따서 ‘깃’이라고 읽었다. ‘깃’은 ‘남긴다’는 뜻의 고어인 ‘기티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며 ‘몫’의 뜻으로도 전용되었다.

상속은 생전분재(生前分財)가 원칙이고 생전분재를 하지 않았거나 생전분재에서 누락된 재산이 있는 경우에 사후분재(死後分財)를 하였다. 즉, 일반적으로 부모는 생전에 주로 연로하거나 질병으로 인하여 사망이 임박하였을 때에 분재하였고, 또한 자녀가 분가 또는 출가할 때마다 분재하였으며, 분재시에는 분재문서를 작성하였다.

따라서, 유산이 피상속인의 사망으로 인하여 상속인에게 계승되어 유산을 분할하는 사인상속은 원칙이 아니었으며, 부모가 유산을 나누어준다는 뜻의 분급(分給)·분여(分與)·여(與)가 상속의 뜻이었다. 생전분재가 없거나, 생전분재에서 누락된 유산이 있는 경우는 상속인들이 3년상을 마친 뒤에 모여서 협의에 따라 유산을 나누었는데, 이 유산분할의 협의를 화회(和會)라고 하였고, 자녀쪽에서 나누어 가진다는 뜻에서 분집(分執)·분깃[分衿]·깃득[衿得]이라고 하였다.

이 분재는 철저한 법정상속(法定相續)이었으며, 유언상속이나 임의상속이 행해지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상속인의 순위나 상속분에 관한 법의 규정을 함부로 어길 수 없었다. 유언의 자유는 있었으나 자녀의 상속분을 침해하는 유언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류분제도(遺留分制度)는 없었다.

(2) 상속인의 순위와 범위

제1순위는 자녀로서 적출자녀·서자녀(庶子女:양첩자녀나 천첩자녀)·수양자녀(收養子女)·시양자녀(侍養子女)를 모두 포함하며, 딸은 출가여부로 차별받지 않았다. 자녀가 피상속인인 부모에 앞서 사망하거나 분재 전에 사망한 경우는 그 자녀의 자녀 즉, 손자녀나 외손자녀가 대습상속(代襲相續)하였다.

제2순위는 자녀가 없는 경우 생존배우자이다. 자녀 없는 남편의 유산은 아내가 상속하며 아내가 입양하지 않고 사망하면 남편의 유산은 남편의 본족(本族)이, 아내의 유산은 아내의 본족이 상속한다.

자녀 없이 아내가 사망한 경우는 남편이 상속하며 역시 입양함이 없이 남편이 사망한 경우도 아내와 남편의 각 유산은 각기 그 본족이 상속한다.

본족이란 4촌 이내의 혈족을 의미하며 본족 중에서 촌수에 따라 상속한다. 생존배우자가 상속한 경우에 피상속인인 배우자의 유산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처분권이 없고 사용수익권만 인정되었으나 실제로는 처분하는 예가 많았다. 특히, 아내의 경우는 남편이 죽은 뒤에 사후입양을 하는 것이 상례였으며, 더욱이 수절할 것을 조건으로 종신상속하였다.

제3순위로는 배우자나 자녀도 없이 사망한 자의 유산은 그의 본족이 상속하는데, 역시 촌수에 따라 형제자매·질(姪)·백숙부(伯叔父)와 고모(姑母)·종형제자매(從兄弟姉妹)의 순위로 상속하였다. 끝으로 이상의 본족이 모두 없는 경우에 비로소 국가에 귀속한다.

이와 같이, 상속인의 범위가 4촌으로 한정된 것은 4촌을 근친으로 본 때문이며, 유산은 조업이며 조부모를 공동조상으로 하는 자손은 4촌까지라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며, 이 4촌의 혈종을 본족 또는 사손(使孫)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유산이 국가에 귀속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개는 계후자(繼後子)·수양자·시양자를 입양하여 이들에게 상속되었으며, 상속인이 없는 유산도 미리 친족이나 마을에 증여하여 사후제사를 위탁하였다.

특히, 아들뿐만 아니라 딸도 같은 순위로 상속인이 될 수 있었던 입법례는 베트남과 함께 우리의 고유법제이며, 중국에서는 남송(南宋)시대에 일시 딸의 상속을 인정한 때가 있었을 뿐이며, 일본에서는 장자독점상속(長子獨占相續)이었다.

(3) 상속분

상속분(相續分)은 친생자녀냐 아니냐에 따라 즉, 적출자녀·의자녀(義子女)·양첩자인가 아니면 천첩자녀·수양자녀·시양자녀인가에 따라 다르고, 또 승중자(承重子)·중자녀(衆子女)에 따라 상속분에 차등을 두었다.

첫째로, 적출자녀 상호간에는 남녀여부·혼인여부의 구별없이 균분(均分)이 원칙이었으며, 제사를 계승할 승중자에게는 고유의 상속분에 2할을 가급(加給)하고, 족보·제구와 조상의 사당이 있는 집 즉, 부모가 거주하였던 가옥을 상속하였다. 제위토(祭位土:所出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땅)는 종중재산여부에 따라 다르나 일반적으로 승중자가 관리하고 사용수익하였다.

둘째로, 첩자녀는 양첩자녀와 천첩자녀로 구분하였는데, 아버지의 유산에 대하여 적출자녀와 공동상속할 경우에 양첩자녀는 적출자녀의 6 대 1, 천첩자녀는 9 대 1의 비례이며, 아버지에게 적녀(嫡女)만 있는 경우는 비율은 위와 같으나, 승중첩자(承重妾子)만은 봉사조로 고유의 상속분에 그를 가급하였다.

또, 아버지에게 적출자녀가 전혀 없는 경우는 양첩자녀 사이에는 균분하되 승중양첩자녀에게 그를 봉사조로 가급하고, 천첩자녀는 4 대 1의 비율로 지급하였다.

한편 양첩자가 없고 양첩녀만 있는 경우는 승중천첩자에게는 그의 상속분에 그를 봉사조로서 가급하고, 양첩자녀가 전혀 없는 경우는 일반원칙에 따라서 균분하되 승중천첩자는 2할을 가급하였다.

셋째로, 적모(嫡母)의 유산에 대해서는 첩자녀는 혈연관계가 없으므로 상속이 제한되었다. 적모에게 적출자녀가 있는 경우에 첩자녀는 적모의 유산을 상속할 수 없으며, 딸만 있는 경우는 딸이 상속하되 승중첩자는 제사를 계승하며, 아버지의 제사와 함께 적모의 제사도 받들므로 적녀 6에 대하여 1을 봉사조로 상속하며, 적모의 자녀가 전혀 없는 경우는 그 유산은 적모의 본족에게 귀속하였다.

다만, 첩자녀는 적모의 슬하에서 양육되는 일이 있으므로, 그 양육의 정리(情理)를 일반화하여 양첩자녀는 6 대 1, 천첩자녀는 9 대 1의 비율로 상속하였다. 넷째로, 전모(前母) 즉, 아버지의 전처나 계모(아버지의 후처)에 대하여 후처소생자녀나 전처소생자녀는 자연의 혈연관계가 없기 때문에 의자녀라고 하였다.

그런데 원칙적으로 후처소생자녀는 전모의 유산을 상속하지 못하며, 전처소생자녀는 계모의 유산을 상속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모 또는 계모에게 자녀가 없으면 그들의 본족에게 상속되나, 의자녀들은 본족과 4 대 1의 비율로 상속하되 승중의자(承重義子)에게는 고유의 상속분에 3을 가급하며, 딸만 있는 경우는 승중의자만이 봉사조로서 4 대 1의 비율을 상속하고 대부분의 유산은 딸이 상속하였다.

다섯째로, 수양자녀와 시양자녀는 적출자녀나 첩자녀의 유무에 따라 비율을 달리하였다. 적출자녀나 천첩자녀가 모두 없고 수양자녀만 있는 경우는 이들만이 상속하고, 시양자녀만 있는 경우의 시양자녀는 양부모의 본족과 공동상속하는데 본족 6에 대하여 1의 비율이었다. 적출자녀가 있는 경우는 수양자녀는 6 대 1을, 시양자녀는 9 대 1이며 수양자녀와 시양자녀와의 비율은 3 대 2이다.

적출자녀가 없고 첩자녀만 있는 경우 시양자녀는 양부의 유산에 대하여 양첩자녀와 6 대 1, 천첩자녀와는 3 대 2이며, 수양자녀와 시양자녀 사이는 6 대 1의 비율이다. 양모의 유산에 대해서는 시양자녀는 9 대 1, 양첩자녀는 6 대 1의 비율이며, 나머지는 본족에게 귀속하고 수양자녀와 양첩자녀의 비율은 같다.

끝으로, 계후자는 적출자녀와 같은 지위이며 혈연이 의제되므로 계후자와 첩자녀·수양자녀·시양자녀 사이의 비율은 적출자의 경우와 같다.

(4) 균분상속의 법적 보장과 관습의 변화

부모에 의한 생전분재의 경우는 위에서 서술한 상속분이 반드시 그대로 지켜지지 않고 별급(別給)이나 유언에 의하여 결과적으로 비율에 차등이 있을 수 있었고, 특히 적출자녀에 대해서는 심한 차별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후분재의 경우는 균분의 원칙이 제대로 관철되었다.

더욱이, 부모가 자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많은 재산을 증여하는 것은 난명(亂命)이라 하여 그 효력이 부정되고, 심히 불평등한 분재를 하였을 경우는 ‘관작재주(官作財主)’라 하여 소송으로 다투면 재판관이 균등하게 분재하였다.

또, 유산을 독점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 다른 상속인은 기한의 정함이 없이 언제든지 소송에 의하여 다툴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다.

우리 나라의 균분상속제는 영세불변의 조종성헌(祖宗成憲)으로서 강제됨과 동시에 강력한 지지의식의 지탱을 받고 있었던 것인데, 대체로 18세기를 고비로 하여 변용되기 시작하였다. 봉사조가 증가함과 동시에 장자와 중자 사이에 차별을 두어 장남을 우대하게 되고, 딸의 상속분도 점차 줄어 아들·딸을 차별하게 되었다. 따라서 제사도 윤회로부터 장자전행(長子專行)으로 바뀌기 시작하였고, 봉사조도 장자의 소유로 의식하게 되었다.

또한, 오랜 전통으로 내려온 강력한 균분의식을 무시하지 못한 경우는 장자와 중자간, 자녀간에 차별을 하지 않고 봉사조만을 과다하게 배정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장자를 특대하는 편법을 쓰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균분의식도 바뀌게 되어 전시대에는 차별한 경우에 소송으로 다투었으나, 이 무렵부터는 묵인 내지 긍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조말에 이르기까지 심한 차별은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변화는 지방에 따라 그리고 가문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종법(宗法)에 의한 종통(宗統)의 유지와 계승을 중요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 상속법의 법원(法源)

일제당국은 우리 나라에 원칙적으로 일본법을 시행하기로 하였으나, 친족·상속에 관해서는 관습이 전혀 다른 우리 나라에 일본민법을 적용할 수 없으므로, <조선민사령 朝鮮民事令>에 따라 상속에 관해서는 우리 나라 관습법을 적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상속에 관한 기술적인 규정은 적용하여도 무방하다고 보아, 1912년 7월부터는 일본민법 중 상속의 승인에 관한 제1017·1019·1021·1026조와 상속재산의 분리에 관한 제1027·1037·1041·1050조를 의용(依用)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이외의 분야에는 관습법·판례법을 비롯하여 각종 관제관습(官製慣習) 등이 적용되었다.

① ≪관습조사보고서≫, ②사법부장관·조사국장관의 통첩(通牒)·회답(回答), ③ 정무총감·중추원의장·중추원서기관장의 통첩·회답, ④ 법원장·판사의 통첩·회답, ⑤ 사법협회민사심의회의 결의·회답·질의응답, ⑥ 판례조사회결의(判例調査會決議), ⑦ 구관 및 제도조사위원회결의(舊慣及制度調査委員會決議), ⑧ 조선고등법원판결 등이 바로 그것이다.

(2) 상속의 종류

제사상속과 재산상속 외 호주제도를 인정한 결과 호주로서의 지위의 승계인 호주상속제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봉사는 제사자로 된다는 뜻이지 특히 승계의 뜻을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지자, 1933년 3월 3일의 조선고등법원판결이 “제사상속의 관념은 선대(先代)를 봉사하며 조상의 제사를 봉행하는 도의상의 지위를 승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판시했다.

이때부터 제사상속은 법외(法外)의 관습으로 방치되고, 그 기본적 원리를 호주상속에 적용함으로써 상속은 호주상속과 재산상속의 두 종류가 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호주상속인이 제사자로서의 지위도 승계하는 것으로 하였으나, 호주로서의 지위의 승계가 반드시 제사자로서의 지위의 승계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따라, 예외없이 호주의 지위를 승계함과 동시에 호주가 소유했던 전재산도 함께 상속하는 일본의 가독상속(家督相續) 원리가 이식될 가능성이 있게 되었다.

(3) 상속의 개시

호주상속은 호주의 사망, 호주의 출계(出繼), 호주의 파양, 여호주가(女戶主家)의 입양, 여호주가의 남자출생, 여호주의 출가(出嫁), 여호주의 거가(去家), 차양자의 남자출생, 차양자가 호주인 가(家)의 입양의 경우에 개시된다.

재산상속은 호주의 사망, 호주의 출계, 호주의 파양, 호주의 경질(更迭), 여호주의 출가, 여호주의 거가와 같이 호주상속과 동시에 개시되는 경우와 가족의 사망, 가족의 파양의 경우와 같이 호주상속과 별도로 개시되는 경우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4) 상속관습법의 변용

일제가 호주제도를 인정하고, 호주에 대하여 가족의 혼인, 입양과 파양에 대한 동의권, 가족의 분가에 대한 결정권과 동의권, 가족의 거소지정권(居所指定權), 가족의 직업에 대한 지정권, 가족의 재산에 대한 관리권과 수익권, 가족의 재산처분에 대한 허가권, 가족에 대한 교육, 감호, 징계권을 확인해 주고 호주의 지위와 권리를 일본의 호주의 경우와 같이 절대화하려고 기도함에 따라, 호주상속과 재산상속의 관습은 서서히 일본의 관습으로 동화되어갔다.

우선, 호주상속에 관해서는 1917년부터 호주로 된 양자의 파양을 금지하고 상속인 폐제(廢除)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산상속에 관해서는 상속인의 범위를 직계비속·배우자·직계존속·호주에 국한하고, 수양자·시양자와 같은 이성양자(異姓養子)를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이들의 재산상속권을 박탈하였다. 가장 두드러진 변동은 딸의 재산상속권을 박탈한 것과 장자독점상속화의 기도이다.

호주상속과 재산상속이 동시에 개시되는 경우는 딸의 재산상속권을 박탈함은 물론, 상속인이 형제만 있는 경우의 상속분은 장자가 3분의 2, 차남이 3분의 1을, 형제가 3인 이상인 경우는 장자가 2분의 1, 차남 이하는 2분의 1을 균분하며, 서자는 적출자의 2분의 1로 하였다.

더욱이 유산은 장자가 일단 독점상속하는 것으로 하였으므로, 차남 이하는 당연히 분재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호적상 분가한 뒤에 분재청구권(分財請求權)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분가에 대한 동의권은 호주인 장자에게 있으므로, 호주가 분가에 동의하지 않는 한 차남 이하는 분재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게 하였다. 호주가 분가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는 호주권의 남용이 된다고 하였으나, 한편 호주가 분가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유산을 탕진한 경우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외면하였다.

물론, 일반관습은 관제관습법(官製慣習法)과는 달리 조선시대 이래의 법관습이 그대로 행해졌다. 어떻든 위와 같은 관습의 변용은 일본식 호주제도에 따른 장자독점상속을 관철시킴으로써 법의 동화를 획책하기 위한 것이었다.

(1) 현행상속법의 성립

민족항일기의 상속관습법은 광복 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으나, 정부수립 후 <민법>이 제정될 때 종래의 관습법을 토대로 하면서 특히 재산상속에 관해서는 근대적 상속법제를 수용하여 <민법>의 제5편에 성문의 상속법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호주상속에 관해서는 민족항일기의 호주상속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규정하였으며, 총칙·호주상속인·호주상속의 효력이라는 구조로 <민법> 제980조부터 제996조까지로 짜여졌고, 재산상속은 총칙·재산상속인·재산상속의 일반적 효력·상속분·상속재산의 분할·단순승인·한정승인·포기·재산의 분리, 재산상속인의 부존재·유언의 총칙·유언의 방식·유언의 효력·유언의 집행·유언의 철회·유류분(遺留分)의 구조로 <민법> 제997조부터 제1118조까지이다.

상속법은 <민법> 제정 후 20년 만인 1977년에 특별수익자의 상속분에 관한 <민법> 제1008조, 법정상속분에 관한 제1009조가 개정되고, 동시에 유류분제도가 새로 창설되었다. 특기할 것은 <민법>은 원칙적으로 <민법> 시행일 전의 사항에 대해서도 이를 적용하기로 하여 법률불소급원칙(法律不遡及原則)에 대한 중대한 예외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상속과 유언에 관하여는 <민법> 시행일 전에 개시된 상속에 대해서는 <민법> 시행 뒤에도 구법의 규정을 적용하게 하였으므로, 상속에 관한 한 민족항일기의 상속관습법이 효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2) 현행상속법의 특색

현행상속법은 구관습법을 계승하였으나 호주제도 및 호주상속제도를 약화시키고 여자의 지위를 향상시킴으로써 호주상속제도가 내포하고 있던 제사상속의 정신을 변용시켰고, 재산상속의 경우 유처와 딸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아울러 상속인의 보호를 기도한 결과 다음과 같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첫째, 구법은 호주상속에는 반드시 재산상속을 수반하였으나, 현행법은 호주상속이 생전상속인 경우는 재산상속을 수반하지 않으며, 재산상속은 오직 사망에 의해서만 개시된다. 다만, 생전호주상속이 개시되는 경우는 족보·제구·분묘 및 금양임야(禁養林野)와 600평 이내의 묘토(墓土)인 농지는 승계된다.

둘째, 구법상 여호주는 남자의 출생 또는 입양까지의 잠정적 지위에 불과하였으나, 딸이 친가의 호주가 된 뒤 입부혼인(入夫婚姻)을 하는 경우는 호주의 지위를 보전하고 친가의 계통을 계승할 수 있다.

셋째, 호주상속과 재산상속이 동시에 개시되는 경우에 호주상속인과 그 형제자매 등 공동상속인은 상속분을 포기하지 않는 한 고유의 상속분을 상속하고 분할청구를 할 수 있다.

넷째, 조선시대의 재산상속인의 범위는 4촌까지였던 것이 민족항일기는 직계비속·배우자·직계존속 및 호주로서 동일호적 내에 있는 자로 한정하였으나, 현행법은 동일호적 내의 유무를 불문하고 8촌 이내의 방계혈족까지 확대하였다.

다섯째, 민족항일기에 제외되었던 딸의 상속권을 부활하고 피상속인과의 호적의 동일여부를 불문한다. 상속분은 피상속인과 동일호적 내에 있는 딸은 남자의 상속분의 2분의 1, 출가 등 사유로 호적을 달리한 경우는 4분의 1로 하였으며, 1977년의 개정으로 동일호적 내에 있는 딸은 아들과 균등하게 되었다. 호적의 동일여부는 딸뿐만 아니라 어머니·할머니·자매 등 여자의 경우도 적용된다.

여섯째, 유처의 상속권이 강화되었다. 유처는 직계비속 또는 피상속인의 직계존속과 같은 순위로 상속인이 되며, 상속분은 1977년의 개정 전에는 직계비속과 공동으로 상속하는 경우 남자 상속분의 2분의 1, 남편의 직계존속과 공동상속하는 경우 남자와 균등하며, 직계존속도 없는 경우 단독상속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977년의 개정으로 직계비속과 공동상속하는 경우는 아들의 상속분의 5할을 가급하고, 직계존속과 공동상속하는 경우는 직계존속의 상속분의 5할을 가급하게 하였다.

일곱째, 혼인 외의 출생자인 서자녀(庶子女)는 재산상속에 있어서 혼인중의 출생자(적출자)와 차별하지 않는다. 다만, 호주상속순위는 혼인중의 출생자인 남자가 우선한다.

끝으로, 1977년의 <민법> 개정으로 유류분제도를 신설하였다. 유류분액은 피상속인의 직계비속과 배우자의 경우 법정상속분의 2분의 1, 직계존속과 형제자매의 경우 3분의 1이다.

이상과 같은 우리 나라의 현행 상속법은 호주상속제도를 둔 점 외는 세계의 입법례나 입법추세에 비추어 손색이 없으며, 균분상속제로 인하여 농지의 세분화를 가져올 우려가 있었으나, 농촌에서는 세분화되지 않도록 유언 혹은 상속인 사이의 협의에 따라 자동조종되고 있다.

현재, 호주상속제도를 폐지하고 상속인의 범위를 4촌 이내로 축소하려는 입법의견이 있으나, 호주상속제도의 유지론도 강력히 맞서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經國大典」
「韓國家族制度硏究」(金斗憲, 서울大學校 出版部, 1969)
「한국의 법」(박병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韓國家族法上의 諸問題」(李熙鳳, 日新社, 1976)
「韓國家族의 史的硏究」(李光奎, 一志社, 1977)
「慶北地方古文書集成」(李樹健, 1981)
「韓國家族制度史硏究」(崔在錫, 一志社, 1983)
「扶安金氏愚磻古文書」(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3)
「韓國古代의 繼世思想과 祖上崇拜信仰」(邊太燮, 『歷史敎育』3·4, 1958·1959)
「韓國의 傳統家族과 家長權」(朴秉濠, 『韓國學報』2, 1976)
「高麗朝에 있어서 土地의 子女均分相續」(崔在錫, 『韓國史硏究』3, 1981)
「高麗朝의 相續制와 親族組織」(崔在錫, 『東方學志』31, 1982)
「高麗의 財産相續形態에 관한 考察」(李義權, 『韓國史硏究』41, 1983)
「高麗時代의 土地相續에 대한 再檢討」(申虎澈, 『歷史學報』98, 1983)
「朝鮮時代 均分相續制에 관한 硏究」(金容晩, 『大邱史學』23, 1983)
「高麗時代 父母田의 子女均分相續再論」(崔在錫, 『韓國史硏究』44, 1984)
「朝鮮親族法相續法」(勝田東三, 大阪 屋號書店, 1933)
「李朝の財産相續法」(朝鮮總督府 中樞院, 1936)
「朝鮮祭祀相續法論序說」(朝鮮總督府中樞院, 1939)
「高麗朝における土地の嫡長子相續と奴婢子女均分相續」(旗田巍, 『東洋文化』22, 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