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4-13 15:59
조상 땅 찾기 제적등본에 관한 고찰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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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땅 찾기 제적등본에 관한 고찰

서론

 조상 땅 찾기 지적전산망 신청과 토지소송에서 조상님과 상속인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공적인 자료로는 제적등본이 유일하며, 족보는 보충적으로 입증하는 자료가 됩니다. 6.25사변, 화재, 자연재해 등으로 제적등본이 소실되어 복구하는 과정에서 호주와 전호주만 복구되었고, 호주의 조부님 성명을 기재하는 란은 따로 없는 관계로 지적전산망 신청과 토지소송에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관할 법원 호적계에 부본이 존재하면 다행이나 원본, 부본 모두 소실된 경우에는 토지소송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조선시대 호구단자를 이어 광무 원년(1907년)에 조제된 호적표가 발전되어 1909년 민적령에 의하여 최초의 제적등본인 민적부가 조제되었습니다. 민적부 이전 자료인 한성부 호적과 각 지방의 호적표는 일부 존재하며, 일본에 남아있는 것도 있습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로부터 임야를 양여, 매수한 경우에도 신청서에 제적등본을 첨부하였으므로 국가기록원의 조선총독부 지적자료에 일부 남아있는 것도 있습니다.


본론

1. 호구조사규정(戶口調査規定) 의 변천

 옛 부터 호구(戶口)의 조사는 국력의 측정면에서 중요하게 여겼다. 호구는 국가의 인력동원이나, 조세수입이나, 인구이동이나, 국가시책의 수행면에서 중요한 국력의 원천이 된 것이다. 그러기에 조선왕조도 호적조사(戶籍調査)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註1] 규정하고 있다. 즉 호적은 매 3년마다 고쳐 만들어 호조(戶曹)와 한성부(漢城府) 그리고 도(道)와 그 고을에 비치하도록 규정하였다. 서울이나 지방에는 5호(戶)를 1통(統)으로 하고 통에는 통주(統主)를 두었다. 지방은 5통마다 이정(里正)을 두고 매 면(面)마다 권농관(勸農官)을 두었다. 이 경우 지역이 넓고 호수가 많으면 재량(裁量)토록 하였으며 서울은 매 1방(坊)마다 관령(管領)을 두도록 규정하였다. 『수교집록(受敎輯錄)』을 보면 [註2] 호적작성에 있어서 많은 규정을 하고 있다. 즉 한성부의 호적장부에 호적이 없으면 호조에 이첩하여 대조해서 분간하도록 명종 14년에 명령이 내리고 있다. 현종 때에는 호적에 기입되지 않고 충의(忠義)에 거짓으로 기록된 자는 모두 군역(軍役)에 충당시키고 여자로서 호적에 누락되었거나 나이 70세로서 호적에 누락되고 그 아들이 입적(入籍)된 경우는 다만 그 자신만을 수속(收贖)하고 그 아들은 정배(定配)치 말도록 하였다. 그러나 호적에 누락된 자가 자수할 경우에는 특별히 면죄할 뿐만 아니라 과거응시도 허용하였다.
이같은 규정은 숙종 때에도 여러 가지 규정이 생겼다. 사인(私人)의 노비(奴婢)로서 그 주인을 배반하기 위하여 호적 중에 타인의 아버지를 자기의 아버지로 하거나 생존한 아버지를 사망한 것처럼 입록(入錄)한 경우나 또는 서자손(庶子孫)의 명칭을 면하기 위하여 자기의 적모(嫡母)와 외조모를 타인의 비(婢)라고 입록할 경우에는 강상죄(綱常罪)의 누범(累犯)으로 규정하고 정리(情理)의 과중자는 전가족을 변지(邊地)에 이거(移居)시켰다. 또한 그 아버지를 서삼촌(庶三村)이라고 하거나 그 어머니를 삼촌숙처(三寸叔妻)라고 하거나 그 숙부모를 자기의 친부모라고 하면서 노비를 점령하려던 쟁송자(爭訟者)는 사족(士族) 여부를 막론하고 변지에 이거시켰다. 연령을 증감한 것도 1년이면 자신과 가장(家長)을 각각 장(杖)100, 3년 이상이면 장 100과 도(徒) 3년에 처하고, 5년 이상이면 군에 충정(充定)케 하였다. 연령을 증감한 것이 6년 이상이면 관령(管領) 통수(統首) 이정(里正) 감고(監考)에게 장형(杖刑) 60 도형(徒刑) l년에 처하고, 점차로 형등급(刑等級)을 가하여 10년 이상이면 군에 충정케 하였다. 장정(壯丁)을 호적에서 누락시킨 경우는 가장을 벌하되 1인이면 장형 100 도형 3년에 처하고, 2인이면 군에 충정하고, 3구(口) 이상이면 전가족을 변지에 이거시키고, 관령 · 통수 · 이정 · 감고에 대하여 장정 누락자가 1인이면 장형 80, 3인이면 장형 100 도형 3년에 처하고, 5인 이상이면 군에 충당시켰다. 향소(鄕所), 감관(監官), 읍리(邑吏)로서 장정 누락자가 5인 이상이면 장형 100 도형 3년에 처하고, 부관(部官) 수령(守令)으로서 장정 누락자가 10인 이상이면 파직시켰던 것이다.
호적작성에 있어서 호(戶)를 누락시킨 경우 호주는 물론이고 사대부(士大夫)나 공사천(公私賤) 할 것 없이 모두 군적사목(軍籍事目)에 의하여 변지에 이거시키고, 관령 · 통수 · 감고 · 이정에 대해서는 누락호(漏落戶)가 1호이면 장형 100 도형 3년에 처하고, 누락호가 3호이면 장형 100을 가하여 군에 충당하고, 누락호가 5호 이상이면 전가족을 변지에 이거시키게 하였다. 향소 · 감관 · 읍리에 대해서는 누락호가 5호 이상이면 장형 100 도형 3년에 처하고, 70호 이상이면 장형 100을 가하여 군에 충정시켰다. 부관 수령에 대해서는 누락호가 5호 이상이면 파직시키고, 10호 이상이면 파직시킨 후 영구히 임용하지 않도록 규정하였다. 호적에 누락자는 사족(士族)과 상한(常漢)을 막론하고 전가족을 변지에 이사시키고, 뇌물을 받았거나 사실을 안 자는 중형(重刑)으로 처단한다. 뿐 아니라 호적을 취소하거나 누락된 것 같이 한 경우에는 대소 범죄를 막론하고 법률에 따라 처벌하되 전가족도 누락죄에 따라 변지에 이거시키고 3년간 노역(勞役)시켰다.
입적(入籍)하는 경우를 보면 고례(古例)에 따라 호구의 기입증서를 작성하여 호주에게 교부하는데 호구를 발라서 가리거나 자획과 인문(印文)을 변경시킨 경우에는 도답육부인신율(盜踏六部印信律)로 처벌하였다. 사송(詞訟)이 제기된 경우에는 먼저 호구조사 후에 수리하되 입적되지 않은 자는 법률에 따라 과죄(科罪)하고 사송을 접수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록 호적은 하였다고 하여도 호구가 없는 경우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처벌하였다. 타인의 노비를 암록(暗錄)한 것이 발견된 때는 비리호송(非理好訟), 압량위천율(壓良爲賤律)로 처벌시켰다. 대소송사(大小訟事)에는 현재 호구를 사건 첫머리에 기록하게 하였던 것이다.
장정 3인을 호적에서 누락시킨 가장과 호에서 누락된 주호(主戶)가 5호 이상인 경우에는 유사통수(有司統首), 감고, 이정, 누락자 자신에 대하여 사족(士族)이면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에 충당시키고, 평민이면 조군(漕軍)과 수군(水軍)에 충당하고, 공천(公賤)이면 엄형(嚴刑) 후 기한없이 서북지방의 먼 곳으로 유배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호적에서 누락된 호가 10호 내지 50호인 경우는 담당관리, 향소, 감관은 장형 100을 처하여 충군(充軍)하고, 부관과 수령은 파면시키되 영구히 임용치 않고, 50호 이상 누락시킨 경우는 부관과 수령은 체포하여 정배(定配)시키고 감관과 색리(色吏)는 3차 엄형하고 전가족을 변지에 이주시켰다. 호적에 5명 이상을 위증(僞增)시킨 경우에는 감관과 색리는 장 100 도형 3년에 처하고, 수령은 파면시키게 하였다. 10명 이상을 위증시킨 경우에는 장 100을 쳐서 충군하고, 수령은 파면시켰다. 그리고 호적작성하여 교부 후 직명(職名) 역명(役名)을 고친 자는 정기개록시(定期改錄時)를 기다려 소도(小刀)로 자획과 인문을 발라서 가린 후 개서(改書)하여 호적사목(戶籍事目)에 의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註3]
이처럼 조선왕조 전시대를 통하여 호적의 정리는 상당히 엄격하게 취급하고 있다.

2. 한성(漢城)의 호구변천(戶口變遷)

 옛 부터 수도의 호구조사는 실시되어 왔다. 조선왕조 건국 후 한양 천도와 함께 새로운 서울의 건설도 진행되었으며 호구조사도 이루어졌다. 조선 건국 후 호구조사는 태종 4년(1404)과 태종 6년(1406)으로 되어 있다. 이때 호구조사는 두가지 연대로 표기되어 있다. 하나는 여기서 보는 태종 4년때의 연대표기이고 또 하나는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보이는 태조 4년 때의 호구조사의 내용이다. 태조 때와 태종 때의 조사내용을 비교해 보면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 태조 · 태종의 표기에 혼돈이 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호구내용도 경상도와 풍해도(風海道)의 두 곳에서 약간 차이를 보일 뿐이다. 즉 태조 · 태종 4년의 경우를 보면 경상도는 태조 4년의 것이 호(戶)가 1이 많을 뿐이고 풍해도는 태조 4년의 구(口)가 40이 많을 뿐이다. 그후 호구조사는 세종 5년(1423)에도 실시되었다. 이제 그 내용을 보기 위해 <표 : 조선 건국 초 호구조사표>에서 보면 태종 4년을 표준으로 볼 때 전국의 호수가 153,404이고 인구가 322,786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2년 후인 태종 6년의 경우를 보면 호수가 180,246이고 인구가 370,365로서 태종 4년에 비해 호는 26,842 인구는 47,579가 증가하였다.[註15]
여기서 인구조사를 보면 태종 4년의 조사에서 한성부,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 그리고 경기도는 빠졌으며 태종 6년의 조사에서도 한성부와 개성유후사는 빠져 있다. 그러므로 한성부의 호구조사는 세종 때에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 전국의 호구조사가 정확한 것인가는 재론의 여지가 많다. 그 이유는 태종 때의 호구조사의 목적이 오늘날 말하는 인구센서스와는 다른 것이다. 태종 때의 호구조사의 목적은 역(役)을 담당할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정년(丁年) 남자를 조사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 조사된 호구는 실수와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라 보아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구에 있어서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뿐이고, 호에 있어서도 1가호(家戶)를 1호로 계산하지 않고 외방(外方)의 전결(田結)이나 경중(京中)의 신분에 따라 1가호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호를 이루지 못한 경우라든가, 또는 삼정(三丁)을 1호로 계산한 경우 같은 것이 있어서 정확한 호구계산에는 차이가 큰 것이었다.[註16]
또한 <표 : 조선 건국 초 호구조사표> 의 총수가 다르다고 보아야 되는 경우를 보면 "경기좌우(京畿左右) · 양광(楊廣) · 경상(慶尙) · 전라(全羅) · 서해(西海) · 교주(交州) · 강릉(江陵) 등 8도의 마병(馬兵) 보병(步兵) 및 기선군(騎船軍)의 총수는 200,800여인과 자제(子弟) 및 향역리(鄕驛吏) 등 제유역자(諸有役者)는 100,500여인이다"[註17] 라고 한 것을 보면 8도의 마 · 보병, 기선군과 자제 및 향역리 등 제유역을 합하여 301,300여인이 된다. 이 수는 태종 4년의 수에 비하여 2만여가 적은 것이고, 태종 6년에 비해서는 7만여가 되는 것이다.[註18] 이로서 태종 4년, 6년의 인구 통계는 8도의 마보병과 기선군 그리고 자제 및 향역리 등 제유역자만을 통계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들이 태조 2년 이후 각각 2만여와 7만여의 증가를 보인 것인데 이 때의 기록들은 남자의 정년(丁年)만을 기록한 점이 매우 주목된다. 이처럼 조선초기 전국의 호구는 정년남자만 본다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수를 나타내고 있다.
태종 때는 한성부의 호구조사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세종 5년(1423)부터 비로소 한성부의 호구조사가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세종 5년부터 조사된 한성부의 호구를 그 뒤에 조사된 것과 합하여 호구의 증가내용을 보면 <표 : 서울의 호구증감표>와 같다. [註19]
<표 : 서울의 호구증감표>에서 호구를 보면 숙종 4년이 적어지고 경종 3년부터 영조 5년의 3회에 걸쳐 10년간이 지난 후에야 숙종 43년과 비교하여 호수는 증가되었으나 인구는 아직도 적은 상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인구는 고종 원년에 이르기까지 영조 8년(1732)의 서울인구를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울인구가 20만명이 넘은 1732년, 정조 4년(1780)과 정조 7년(1783), 순조 7년(1807), 헌종 3년(1837), 철종 3년(1852), 고종 원년(1864)뿐이지만 그것도 영조 8년의 서울인구를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호수는 감해지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증가일로로 나타나고 있어서 호수증가와 인구증가는 상반된다고나 할까, 증가양상이라는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3. 고종 이후의 호구증가(戶口增加)

 19세기 중엽으로 들어오면서 세도정치(世道政治)의 극성은 민란을 일으켰고, 특히 진주민란(晋州民亂)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살상, 그리고 동학(東學)의 창교(創敎)에 따른 정부의 탄압 등 일련의 커다란 사건들은 질병의 유행과 기근에 따른 유망민(流亡民)의 증가와 함께 우리나라 인구감소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인구의 자연증가율이 있으므로 큰 역사적 사건과 꼭 결부시켜 말할 수는 없을 지 모르나 실제로 헌종 원년(1835)부터 철종 14년(1863)까지 28년간의 남녀인구의 증가율을 본다고 하더라도 증감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경우 호구조사의 부실을 들 수도 있고 또 헌종 14년의 경우는 전후년에 비하여 약 배 정도가 많은데 이런 경우도 조사의 잘못으로 여겨지지만 그같은 예외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호구증가율의 내용에 대해서 보면 <표 : 헌종 · 철종연간 호구표>과 같다.[註20]
이제 고종 즉위 후인 1864년부터 융희(隆熙) 3년인 1909년까지 서울의 인구증가상황에 대해서 살펴 보기로 한다. 이 기간은 고종 3년(1866) 병인박해(丙寅迫害)부터 고종 19년(1882) 동학교도들의 삼례집회(參禮集會), 보은집회(報恩集會), 서울의 복합상소(伏閤上疏) 등이 계속적으로 일어남으로써 내정면(內政面)에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하여 제대로 호구조사 등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고종 원년(1864)부터 융희 3년(1909)까지 호구통계를 전국적인 것과 한성부로 나누어 보기로 한다.
먼저 고종 원년(1864)부터 융희 3년(1909)까지 한성부의 오부(五部) 별로 호수와 인구수의 변동상을 일람표로 작성하였다. 그리고 한성부의 호구가 전국의 호구와의 비율이 어느 정도 되는가를 대조하는 뜻에서 전국의 호구는 통계수만을 표기하였는 바 그 내용은 <표 : 한성부 호구 연도별 증가표>와 같다.
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호구조사는 식년식(式年式)에 따라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복잡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매년 각지방별로 호구조사의 보고는 계속되었다. 다만 통계 면에서 어느 정도 정확한가는 확인할 바 없으나 인구변동상을 볼 때 커다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매년 성실하게 이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호구조사에서 보면 고종 16년(1879)의 기묘식년(己卯式年)에서 1,932,528호로서 호의 경우 최고를 기록하였다. 인구에 있어서는 고종 13년(1876)이 3,423,615명으로 가장 많은 수이며 전후연도의 수에 비하여 최고의 기록을 보이고 있다. 이는 다른 연도에 비하여 조사상의 잘못이 있지 않는가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적은 인구는 고종 19년으로 인구수가 가장 많은 고종 13년에 비하여 243,561명이나 적은 6,413,847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종 19년(1882)에 와서는 가장 큰 사건인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있었을 뿐인데 도시민이 서울을 떠나 피난한데 기인한다고 할지 어쨌든 정치변동의 변수 속에서 변화가 크게 일어났다. 이를 참고하기 위해서 고종 원년(1864)에 이룩된 갑자식(甲子式) 경외호구(京外戶口)의 수를 보면 경상도가 제1위이고 인구밀도는 그 비율로 보아 호수와는 약간 다르게 나타나고 있어서 호구증가의 양상이 일정한 비율로만 되지 않고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갑자식 경외호구의 일람표를 작성해 보면 <표 : 고종 원년 갑자식 경외호구>와 같다.[註22]
고종 원년(1864)부터 융희 3년(1909)까지의 한성부 호구 연도별 증가를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서울의 호수와 인구의 증감에 따른 내용을 호수변화와 인구증가의 내용을 그래프로 작성해 보면 <표 : 한성부 전체호수증가표>, <표 : 한성부 전체인구증가표>과 같다.
<표 : 한성부 전체호수증가표>, <표 : 한성부 전체인구증가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고종 12년에 호수가 급증하고 있는데 이는 조사의 착오인 듯 하다. 그런데 서울의 호수가 전체적으로는 줄어들다가 1909년에 갑자기 증가하는 바 이것 역시 조사통계의 잘못이 아닌지 앞으로의 통계작성에서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 인구를 보면 여자가 대단히 많다. 이것은 결혼관계 등 사회면에서도 대단히 흥미로운 것으로 여겨지나 여기서는 통계만을 표시하여 둔다.
위에서 지금까지의 호구변동관계는 우리나라의 행정보고(行政報告)를 통해 작성된 것을 토대로 하여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후에 일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주권침해가 되면서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과 아울러 호구를 비롯한 각 분야의 통계조사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전국의 호구조사도 재한외국인(在韓外國人)과 함께 조사되기 시작하였다.[註23] 그 결과 호구조사도 각 지역별로 되어 있다.
고종 이후는 여러 나라와의 근대적인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어 각국인이 우리나라의 개항장(開港場)과 서울 등 대도시에 와서 거류(居留)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도 동양의 다른 나라 사람은 물론, 수적인 차이는 있지만 미국인, 러시아인, 영국인, 독일인, 이태리인 등 구미 각국인들이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에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와서 거류하게 되었는데 가장 많은 것은 일본인이요, 그 다음은 청국인이며 그외의 각국인은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서울의 호구수의 조사도 다양하게 나타나는 결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서울 거류의 외국인에 대한 연도별 증가상황 등은 작성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고 1905년 이후의 통계에서 대체적인 것은 짐작할 수가 있다.
이제 그 내용을 보기로 하면,[註24] <표 : 한국인 인구 지방별>은 1907년도의 조사로서 서울을 비롯하여 인접지역의 군(郡)을 참고로 몇 개를 예시한 것이다.
다음에 서울을 비롯하여 대도시의 인구비례와 비교하여 인구밀도를 보면 <표 : 한국현주호구>와 같다. [註25] 이때는 외국인의 거류도 상당히 증가했으며 특히 일본인의 수는 침략세력의 배경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라 하겠다. 서울의 인구는 대구, 평양, 원산 등 큰 도시보다도 대단히 많은 수이고 외국인의 거주상황을 보아도 대단히 많아졌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서울이 이미 국제도시로의 발전은 되고 있으나 근대 도시시설의 미비 속에서 침략국가의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표 : 한국현주호구> <표 : 한국내 지방별 호구표>에서 보면 1909년 말의 서울인구가 1,774,599명인데 1910년말 서울인구는 238,495명으로 1909년에 비하여 1,536,104명이나 적은 수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억지로 추측한다면 주권을 상실하는 과정에서 수도를 떠나 지방으로의 피난 · 이주의 경우를 들 수 있겠으나 확인이 되지 않고 통계작성상의 잘못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시 참고로 1910년에 조사된 한국인 출생, 사망, 결혼과 이혼 지방별표를 통해서 본 서울에서의 사정은 <표 : 한국인 출생 · 사망 · 결혼 · 이혼 지방별표>와 같다.[註27]
이제 끝으로 우리가 주권을 잃은 1910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호수와 인구수를 지방별로 보고 또 한국내 외국인을 가장 많은 일본인과 기타 외국인으로 나누어서 일람표로 보면 <표 : 한국현주호구>와 같다. [註28]
이를 보면 1910년의 인구총계가 13,128,780명으로 1909년의 총계인 12,934,282명에 194,498명이 증가한 셈이다. 그러나 1910년의 통계를 우리 일성록(日省錄)이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조사된 통계와 비교하여 보면 1909년의 우리 기록의 전국 총인구가 12,363,404명으로 나타나 있는 바 『조선총독부통계연보』의 1909년 것과 비교하면 429,122명이 많은 셈이다. 같은 통계인데도 이처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결국 조사자의 잘못이나 전국인구수를 통계하는데 있어서 계산의 잘못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두개의 통계표 가운데 어느 것이 보다 정확한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1,200만의 큰 수는 대략 같아서 1910년의 우리 인구를 1,300만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4. 호구조사와 민적법

 흥선대원군의 집정후에 『대전회통(大典會通)』이 편찬되어 조선왕조시대의 법전(法典)이 총정리되어 근대로 넘어 오는 과정에서 우선 매듭지어진 셈이다. 『대전회통』으로서 완벽한 것이 된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전통적인 위치에서의 법률체계는 이로서 매듭지어진 것이요, 그 후는 법률내용이나 규정방법이나 표기방법에 있어서 모두가 크게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대전회통』에서 호구정리에 관한 규정을 보기로 한다.
먼저 『대전회통』에 따르면[註4] 호적은 3년에 한번씩 개편(改編)하여 본호조(本戶曹),한성부(漢城府), 본도(本道), 본읍(本邑)에 비장(備藏)하여 둔다고 하였다.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는 본조(本曹)에 호적을 비장하여 두는 것은 지금은 폐지되었고 매식년(每式年)에 장적(帳籍)을 강도(江都)에 비장하게 했으며 구적(舊籍)은 볕에 쪼여 말렸다. 호적의 정비를 위해 지방은 5호로 1통(統)을 삼아 통주(統主)가 있고, 외방에는 5통마다 이정(里正)이 있고, 1면(面) 마다 권농관(勸農官)이 있다. 이는 지역의 광협(廣狹)과 호수(戶數)의 다소(多少)에 따라 그 수를 늘리게 하였다. 서울에는 1방(坊) 마다 관령(管領)을 두었다. 『속대전(續大典)』에 따르면 식년(式年)에 호적을 작성할 때는 외읍(外邑) 각면의 감관(監官)은 사대부(士大夫)로서 선택 임명하게 하고 있다. 사대부와 서민(庶民)은 모두 가호(家戶)의 위치에 따라 통(統)을 작성한다. 이 경우 외지에서 이주해 온다든가 외지로 이거하는 경우에는 원거주지의 관인(官人)과 신거주지의 관인이 공문서를 서로 대조한 후에 기류(寄留)를 허용하였다. 입적자(入籍者)에게는 호구등본(戶口謄本)을 작성하여 급부(給付)하였다. 만약 입적하고도 호구등본을 갖지 않는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서 논죄(論罪)하게 하였다. 호구등본의 글자를 함부로 고쳐 놓거나 인문(印文)을 고쳐놓는 자는 도답육부인신율(盜踏六部印信律)로써 논죄하고 대소송사(大小訟事)를 심의할 때는 호구등본을 제출하게 하고 그 첫머리 난외(欄外)에 이를 기록해 두게 하였다. 경외(京外)의 재판관(裁判官)은 만약 호적상에 의심되는 점이 있으면 그 사유를 갖추어 한성부 및 당해읍(當該邑)에 이문(移文)하며 한성부나 당해읍은 이를 원고와 피고가 모두 볼 수 있는 곳에 등시(謄示)하여 회답하며 장부(帳簿)는 송부(送付)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매식년에 중 · 외인호(中 · 外人戶)의 총호구수를 기록한 책자를 왕에게 상계(上啓)하여 계인(啓印)을 받은 후 사관(史官)에게 하부(下付)하게 하였다.『대전통편』에는 주례(周禮)에서 백성의 호구수를 바치는 제도에 따라 매년말에 중 · 외의 호구수를 서울에 보내어 왕의 계인을 받은 후 사관에게 하부하게 하였다. 그런데 호적을 기한 내에 상송(上送)치 않은 경우에는 관찰사(觀察使)에 대해서는 추고(推考) 처분을 하고 수령(守令)은 파직시켰다. 이때 한성부는 각도의 원근을 고려하여 기한을 정하고 이를 각도에 지위(知委)하였다. 누호자(漏戶者)[註5] 와 누정자(漏丁者)[註6] 누적자(漏籍者)[註7] 연령을 증감한 자[註8] 허호자(虛戶者)[註9] 모록자(冒錄者)[註10] 호적을 작성한 후 1개월 이내에는 자수(自首)를 청허(聽許)하여 자수하는 경우에는 죄를 사면하여 주었다. 그리고 남자 장정으로서 16세 이상이면 호패(號牌)를 패용토록 하였다.
이처럼 호적작성에 있어서 호구조사나 장적(帳籍)의 작성이나 호구(戶口)의 누락(漏落)에 이르기까지 아주 자세히 규정하여 철저한 정비를 서두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같은 호구조사법은 건양(建陽) 원년(1896)에 이르러 현대와 같은 법률로 제정하였는데 이는 전국내의 호수(戶數)와 인구의 편적(編籍)과 작통규정(作統規定)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보더라도 정확한 호적작성을 위하여, 또 국가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본법률을 제정한 목적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역시 호적에 누락시킨 경우는 엄한 벌칙 규정도 정하고 있다. 이때 호구조사는 근대식 조사의 처음이기에 원문(原文)을 보면 다음과 같다.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

제1조 전국내 호수와 인구랄 상세히 편적(編籍)하야 인민(人民)으로 하여금 국가에 보호하난 이익을 균점(均霑)케 함
제2조 십호(十戶)랄 연합하야 일통(一統)을 작(作)하고 해통내(該統內)에 문산(文算)이 유(有)하고 행위단정(行爲端正)한 인으로 통수(統首)랄 정하야 일통내(一統內) 인민을 영율(領率)함
제3조 호적과 통표(統表)난 한성오서(漢城五署)와 각부(各府) · 목(牧) · 군(郡)에셔 매년(每年) 1월내로 수취수정(收聚修正)하야 2월 내로 한성부와 각해도(各該道) 관찰부(觀察府)에 송치(送致)하면 한성부난 3월내로 내부(內部)에 정납(呈納)하고 각도 관찰부에셔난 4월내로 내부에 정납하면 내부에셔 5월내로 호적과 통표를 편집하야 상주(上奏)케 함
제4조 인민 중에 원호(原戶)를 은닉(隱匿)하야 누적(漏籍)하거나 원적(原籍) 내에 인구(人口)랄 고의누탈(故意漏脫)하난 자난 인민의 권리를 허유(許有)치 아니할 뿐 아니라 법률에 조(照)하야 징벌(懲罰)함
제5조 본 규칙을 고위(故違)하거나 기한(期限)을 위월(違越)하난 인민은 해장관(該長官)이 처벌하고 주무관리(主務官吏)난 한성판윤(漢城判尹)과 해관찰사(該觀察使)가 내부에 전보(轉報)하야 징벌하고 한성판윤과 각관찰사난 내부대신(內部大臣)이 경중(輕重)을 수(隨)하야 징계(懲戒)함
제6조 호적 통표 호패식양(戶牌式樣)을 집행하난 세칙(細則)은 내부대신이 수시(隨時)하야 부령(部令)으로 함
제7조 본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함 [註11]」

 이와 같이 갑오경장(甲午更張) 후 여러 가지 법률이 많이 제정 공포 시행되었는데 그에 따라 본 호구조사도 새롭게 제정되었다. 본법(本法)이 비록 근대적인 조사방법으로 바뀌어지고는 있으나 근본적인 법의 정신은 그 이전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본법은 그후 다시 시행세칙(施行細則)이 제정되었는 바 건양(建陽) 원년(1896) 9월 3일에는 내부령(內部令) 제8호로서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이 반포 시행되었다.[註l2] 이로써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근대적인 호구조사제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본령은 호적과 작통(作統)과 호패(戶牌)의 3관(款) 17조목으로 되어 있고 호적식양(戶籍式樣)과 통표식양(統表式樣)과 호패식양(戶牌式樣)의 규식(規式)도 아울러 부록으로 공표되고 있다.
먼저 제1관의 호적관계를 보면 호적지(戶籍紙)는 내부(內部)에서 그 양식을 새로 만들어 각 관찰부(觀察府)에 보내면 관찰부에서는 각부(各府) · 목(牧) · 군(郡)에 보내고 각부 · 목 · 군에서는 각면(各面)의 집강(執綱)에게 보내고 면집강(面執綱)은 리(里)의 존위(尊位)에게 보내고리의 존위는 각각 해당 호주에게 전달하여 주도록 규정하여(제1조) 호적 작성용지의 배포과정을 규정하였다. 즉 도에서 부 · 목 · 군으로, 거기에서 다시 면으로, 면에서 다시 리로 보내면 리에서 각 개인에게 전달해서 작성하도록 한 것이다. 이때 호적은 별도의 양식(<표:호적식양(戶籍式樣)>)에 따라 각각 그 호주는 지정된 명목(名目)대로 각 해당란을 기입하도록 하였다. 이때 호적지양본(戶籍紙兩本)의 연합한 한장 지면에 같은 모양으로 전서(塡書)하야 해당 관할 관청(官廳)에 정납(呈納)하면 해당 관청에서 개인영장(蓋印鈴章)한 후에 양본연합처(兩本聯合處)를 분할하야 오른쪽은 해당 관청에 두고 왼편은 해당 호주에게 반급하게 하였다.(제2조) 그리고 호주의 부모 형제자손이라도 각호에 분거(分居)하야 호적이 따로 있을 때는 해적내(該籍內)에 전입(塡入)치 아니하야 인구가 재첩(載疊)치 아니케 하며 일호주(一戶主)가 원호(原戶)는 성적(成籍)하였는데 타호(他戶)에 별거(別居)하야 별거하난 호적을 신성(新成)하난 때는 해적내에 원적(原籍) 모지방(某地方)을 난외영행(欄外**行)에 주명(註明)하여 고열(考閱)에 편의케 하였다.(제3조) 민중 가운데 무가무의(無家無依)하여 원적을 따로 작성치 못하고 족척(族戚)이나 아는 사람의 호내에 기거(寄居)하거나 또는 자기 일신만 기식(寄食)하여도 기구(寄口)에 첨입(添入)하여 인구조사에 누락됨이 없도록 하였다.(제4조) 그리고 분호(分戶)하는 경우에는 원적을 해당 관할 관청에 보고하며 분적(分籍)케 하였다.(제5조)
다시 개적(改籍)의 경우를 보면 이거(移居)할 때는 전거주지(前居住地)의 관청에 보고하고 현거주지의 관청에 구적(舊籍)을 보고하여 개적케 하였다. 이때 본통내(本統內)에서 제 몇호가 제 몇호에 이거하는 때도 해당 관할 관청에 보고하여 개적케 하였다.(제6조) 그러나 호적을 유실하거나 또는 불에 탄 때는 해당 관할 관청에 보고하고 다시 성적(成籍)케 하였다.(제7조) 호주가 죽은 때는 원적을 해당 관할 관청에 보고하고 그 자손형제간에 새로 대신하는 호주성명으로 다시 개적케 하였다. (제8조) 또한 가옥을 새로 짓거나 증축하거나 혹은 무너지거나 혹 소표(燒漂)하거나 인구가 생산하거나 신고(身故)한 때는 개적케 하였다.(제9조) 이렇게 해서 호적이 성급(成給)된 후에는 각부 · 목 · 군에서 하나를 등서(謄書)하여 관찰부에 보내면, 관찰부에서는 각읍에서 납부한 호적을 하나는 관찰부에 두고, 한질을 등사하여 내부(內部)에 보내게 하였다. 다만 한성부에서는 오서구역내(五署區域內) 호적을 한질은 한성부에 두고, 등사한 한질은 내부(內部)에 수납케 하였던 것이다.(제11조) 그리하여 호적을 내부(內部)와 한성부 · 관찰부 그리고 부 · 목 · 군에도 구비하여 두도록 조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작통(作統)의 경우도 규정하였다. 이때 통표는 통수(統首)가 해당 통내 각호주의 호적을 조사하여 통표식양에 의하여 지정된 명목대로 전서케 하였다.(제12조) 이때 작통하다가 영호(零戶)가 있어 5호 미만인 때는 본리(本里) 모통중(某統中)에 부속하고, 5호 이상은 미성통(未成統)이라 칭하야 본리 최근통(最近統) 통수 지시를 받게 하였다. 다만 이때 영호는 해당 리(里)에 가호증축(家戶增築)함을 기다려 10수가 되면 1통을 짓게 하였다.(제13조) 이때 통수는 통표를 수정하여 한질은 해당 통내에 두고, 한질은 리의 존위에게 보내면, 리의 존위가 해당 리내 제통표를 모아 책자로 만들어 본리(本里)에 두고, 한질을 등사하여 면의 집강에게 보내면, 면집강이 해당 리내 각리 제통표를 모아 성책(成冊)하여 본면(本面)에 두고, 한질은 등사하여 각각 해당 부 · 목 · 군에 납부한다. 그러면 각 부 · 목 · 군청에서 해당 지방내에 각면리의 제통표를 모아 책자로 만들어 본관청에 두고 한질을 등사하여 해당 관찰부에 보내면, 관찰부에서 해당 도내 각부 · 목 · 군의 제통표를 모아 책으로 만들어 관찰부에 두고 등사한 한질은 내부에 보내도록 하였다. 이 경우 다만 한성부내의 오서구역에는 통수가 해당 방내(坊內)의 순검교번소(巡檢交番所)에게, 다시 교번소에서는 각각 해당 서(署)에게, 각 해당 오서(五署)에서는 한성부에, 한성부에서는 내부(內部)에 제출케 하고 있다.(제14조) 그리고 호적은 새로 작성할 때나, 분적할 때나, 호적개정할 때는 호주는 통수에게, 통수는 리의 존위에게, 리의 존위는 면집강에게, 면의 집강은 해당 관할 관청에 직접 청하게 하였다. 다만 한성 오서구역에는 호주가 통수에게, 통수는 해당 방내 순검교번소에게, 교번소에서는 5개의 각서에, 각서에서는 한성부에 직접 청하게 하였다.(제15조)
끝으로 호패(戶牌)에 관한 규정을 보면 매호에 해당 지명(地名)과 제 몇통, 제 몇호와 호주성명, 직업을 상세히 기재하여 호패를 문수(門首)에 붙이되 양식은 호패식양(戶牌式樣)과 같이 하였다.(제16조) 그리고 이거(移居)시에는 호패를 고쳐서 달되 호주의 성명과 직업만 개정하고 제 몇통, 제 몇호는 그대로 두되 해당 호의 위치를 변경치 못하게 하였다. 단 본통(本統)내에서 이거할 때도 이에 따르도록 규정하고 있다.(제17조)
이래서 호구와 센서스의 조사에 필요한 규정은 물론, 통을 규정하여 이사할 때도 호구의 파악에는 지장이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종전까지의 호구 파악방법과는 다른 것이 된 것이다. 이제 조사카드 양식(樣式)을 보면 <표:호적식양>,<표:통표식양>,<표:호패식양>과 같다.
이같은 호구조사는 다시 1909년 즉 우리가 주권을 상실하기 전년인 융희(隆熙) 3년에는 내부훈령(內部訓令) 제39호로서 「민적법집행심득(民籍法執行心得)」을 발표 시행하게 하고 있다. 반포 연도는 융희 3년으로 되었으나 심득(心得)이라는 용어사용 등으로 보아 일본의 법률용어가 일제침략하에서의 통감부(統監府)의 설립 후에 그대로 사용된데서 보면 대단히 성격이 크게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민적법규정(民籍法規定)을 보면 다음과 같다.[註I3]

민적법(民籍法)

제1조 민적(民籍)에 관한 사항을 기재하기 위하야 경찰서(警察署) 경찰분서(警察分署)와 순사주재소(巡査駐在所)에 민적부(民籍簿)를 비치함. 민적법 제1조 각호의 사실이 발생함에 의하야 민적부로부터 제(除)한 자(者)난 면별(面別)로 편철(編綴)하야 제적부(除籍簿)로 함.
제2조 민적에난 지명(地名)과 호번호(戶番號)를 부(付)함이 가(可)함.
제3조 민적기재의 순위는 좌(左)와 여(如)함. ① 호주 ②호주의 직계존속(直系尊屬) ③ 호주의 배우자 ④ 호주의 직계비속(直系卑屬)과 그 배우자 ⑤ 호주의 방계친(傍系親)과 그 배우자 ⑥ 호주의 친족이 아닌 자, 첩은 처에 준함.
제4조 기아(棄兒) 발견의 경우에는 일가창립(一家創立)으로 처리함이 가함. 단 양자(養子)로 수양코자 하난 자 유(有)한 시(時)난 일가창립으로 한 후 양자로 처리하고 또 부양자(扶養子)가 유한 시난 그 부적(附籍)으로 처리함이 가함.
제5조 일가절멸(一家絶滅)한 경우에난 그 지(旨)를 기재하고 제적함이 가함.
제6조 부적자(附籍者)의 민적은 매일가족(每一家族)을 별지(別紙)로써 편성하야 부적 주민적(住民籍)의 말미에 편철(編綴)함이 가함. 부적자의 민적에는 부적주(附籍主)의 성명과 그 부적한 지(旨)를 난외에 기재함이 가함.
제7조 면장(面長)은 항상 부내(部內)의 민적이동에 주의하야 신고를 해태(懈怠)히 하난 자 유한 시난 차(此)랄 채고함이 가함. 면장은 구두(口頭)로써 민적에 관한 신고를 수(受)한 시난 구두신고서(口頭申告書)에 기재함이 가함
제8조 면장은 민적법 제1조의 신고서를 수합하야 기월분(期月分)을 익월(翌月) 십오일까지 소할(所轄) 경찰관서에 송치(送致)함이 가함.
제9조 경찰관서에서 수한 신고서 중 타관(他管)에 계한 자난 소할 경찰관서에 송치(送致)함이 가함.
제10조 민적부는 갑호식양(甲號式樣) 구두신고서난 을호식양(乙號式樣)에 의하야 조제(調製)함이 가함.

 이와 같이 호구의 파악을 위해 기재된 민적은 경찰서, 경찰분서, 순사주재소에 비치하게 하였으며 기재요령, 신고요령 등이 규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민적부를 경찰관서에 비치하게 하였는 바 본법의 제정이 융희(隆熙) 3년 즉 1909년인데서 감안하면 호구조사와 아울러 통감부(統監府)의 침략정책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특이한 일은 기아(棄兒)가 있을 경우 일가(一家)를 창립해서 처리하는 것으로 했으며 부적자(附籍者)의 경우도 규정하고 있는 점 등이라 하겠다.
이제 민적부의 기재양식을 예시해 보면 <표 : 민적부>와 같다.
그러면 민적의 기재사례를 보기로 하자.[註14] 먼저 본적란(本籍欄)에는 하도(何道) 하부(何府, 군(郡)) 하방(何坊, 면(面)) 하동(何洞, 리(里)) 하통호(何統戶)라 기재토록 하고 본(本)의 난에는 시조출생지(始祖出生地)의 지명을 기재토록 하였다. 예컨대 그 시조가 전주에서 출생한 때는 전주라고 쓰는 것과 같다. 단 호주와 본이 같은 자는 기재할 필요가 없다고 규정하였다. 이처럼 본은 출생지로써 함이 원칙인데 거주지로서 하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다음 전호주란(前戶主欄)에는 전대호주(前代戶主)의 성명을 기재토록 하였으며 호주된 원인과 연월일의 난에는 그 원인이 호주의 사망에 의하거나 또는 일가창립에 의하거나 또는 분가(分家)에 의하여 호주된 구별 및 그 호주가 연월일을 기재토록 하였다. 예컨대 「호주 홍길동 사망에 인하야 융희 7년 7월 7일 호주됨」이라고 함과 같다. 이 경우 호주된 원인은 전호주(前戶主)의 사망, 분가, 일가창립 및 폐절가(廢絶家) 재흥(再興) 등에 인한 것이다.
다음 부와 모의 난에는 그 실부(實父)와 실모(實母)의 성명을 기재하고 타가(他家)로부터 입(入)한 경우에는 그 생가(生家)에 있는 부모의 이름을 기재케 하였다. 이때 서자(庶子)의 부모를 기재하는 경우에는 그 적모(嫡母)의 이름을 기재하지 말고 실모(實母) 즉 생모(生母)된 첩의 이름을 기재케 하였다.
다음 출생별의 기재 난에는 그 부(父)를 중심으로 하고 해당되는 신위(身位) 즉 장남 차남 또는 장녀 차녀라 기재하는 것이다.
이때 호주를 중심으로 하여 지칭하는 신위와 가족을 중심으로 하여 지칭하는 신위는 반드시 같지 않는 경우가 있는 바, 예컨대 호주에게는 손이 되나 부에 대해서는 아들이 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이밖에도 성명란과 생년월일 등의 기재요령을 밝히고 또 사유란에는 신분의 이동사항(異動事項)까지 기재하게 하였다.
이처럼 호구조사에서 이제 민적법을 공포하여 실시케 하였다. 이 법은 1909년 즉 융희 3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우리 민족이 일제침략으로 주권을 상실하기 전년에 이루어진 것이다.



족보의 증명력 판례

대법원 2000. 7. 4. 자 2000스2 결정 【호적정정(본)】 [공2000.10.1.(115),1944]


【판시사항】족보의 증명력【결정요지】 족보는 종중 또는 문중이 종원의 범위를 명백히 하기 위하여 일족의 시조를 기초로 하여 그 자손 전체의 혈통, 배우자, 관력(관력) 등을 기재하여 제작·반포하는 것으로서, 족보가 조작된 것이라고 인정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혈통에 관한 족보의 기재 내용은 이를 믿는 것이 경험칙에 맞는다.【참조조문】 민사소송법 제187조 , 호적법 제120조 【참조판례】 대법원 1997. 3. 3.자 96스67 결정(공1997상, 1227) 【전 문】 【재항고인】 재항고인 (소송대리인 변호사 김영일) 【원심결정】 서울가법 1999. 12. 20.자 99브87 결정 【주문】 원심결정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가정법원 합의부로 환송한다.【이유】 재항고이유를 본다.1. 원심결정 이유에 의하면, 원심은 재항고인의 본(본)이 원래 경주(경주)이나 호적편제 당시 착오로 김해(김해)로 잘못 기재, 신고됨으로써 실제의 본과 다르게 등재되었다는 재항고인의 주장에 대하여, 기록에 편철된 각 제적등본, 각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 본관확인서, 족보사본, 각 인우보증서의 각 기재와 참고인 김한덕의 진술만으로는 이를 인정하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소명자료가 없다고 하여 항고를 기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2. 가. 족보는 종중 또는 문중이 종원의 범위를 명백히 하기 위하여 일족의 시조를 기초로 하여 그 자손 전체의 혈통, 배우자, 관력(관력) 등을 기재하여 제작·반포하는 것으로서, 족보가 조작된 것이라고 인정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혈통에 관한 족보의 기재 내용은 이를 믿는 것이 경험칙에 맞는다고 할 것인바(대법원 1997. 3. 3.자 96스67 결정 참조), 재항고인이 소명자료로 제출한 소갑 제7호증(경주김씨 승지공파 세보)의 기재에 의하면, 재항고인의 조부인 소외 1{족보상 소외 2로 되어 있으나, 족보상의 소외 2의 자(자)와 제적등본상의 이름이 동일하고, 제적등본과 족보상 그 사망월일이 동일하며, 배우자가 김제김씨로서 동일한 점 등에 비추어, 소외 1과 족보상 소외 2는 동일인으로 보인다}은 경주김씨 승지공파 60세손인 소외 3의 4남으로서 61세손이고, 재항고인의 부(부)인 소외 4(족보상 소외 5로 되어 있으나, 제적등본과 족보상 한글 이름이 동일하고, 출생월일이 동일하며, 배우자의 성과 생년월일이 동일한 점 등에 비추어 제적등본상의 소외 4와 족보상의 소외 5는 동일인으로 보인다)은 경주김씨 승지공파 62세손이며, 재항고인은 소외 4의 아들로서 호적상으로는 이름이 재항고인으로 되어 있으나 호적상과 족보상의 부모, 생년월일, 배우자의 성명 등이 일치하는 점 등에 비추어 족보상의 소외 6과 동일인으로서 경주김씨 승지공파 63세손임을 알 수 있으며, 달리 위 족보가 허위이거나 조작된 것인 점 등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나. 그 밖에 재항고인이 제출한 본관확인서, 인우보증서 등의 기재 및 참고인의 진술도 재항고인의 위와 같은 계통, 특히 그의 본이 경주인 점에 부합하고 있는바, 혈통을 중시하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 사고방식상 자기의 혈통을 부정하거나 다른 혈통을 자기의 혈통으로 인정하는 것은 이례적인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위와 같은 자료들을 쉽게 배척할 것은 아니라고 볼 것이다.다. 그럼에도 원심이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이유로 재항고인의 주장을 배척하고 항고를 기각한 것은 채증법칙을 위배하여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친 위법을 저질렀다고 할 것이므로, 이 점을 지적하는 재항고이유의 주장은 이유 있다.3. 그러므로 원심결정을 파기하고, 사건을 원심법원에 환송하기로 하여 관여 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대법관  이임수(재판장) 이돈희 송진훈 윤재식(주심)

 

호적부의 추정력


대법원 2008.9.29. 자 2006마883 결정 【가처분이의】 [미간행]


【판시사항】호적부의 기재가 신분관계의 존부에 관한 사항인 경우, 그 기재에 반하는 증거로써 그 추정을 번복할 수 있는지 여부(원칙적 소극)【참조조문】 구 호적법(2007. 5. 17. 법률 제8435호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부칙 제2조로 폐지) 제15조(현행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참조) 【참조판례】 대법원 1979. 2. 27. 선고 78다2152 판결(공1979, 11852), 대법원 1997. 11. 27.자 97스4 결정(공1998상, 98) 【전 문】 【재항고인】 재항고인(소송대리인 법무법인 로시스 담당변호사 김미영외 2인) 【상 대 방】 상대방(소송대리인 변호사 이기문) 【원심결정】 인천지법 2006. 7. 4.자 2005라279 결정 【주 문】 재항고를 기각한다.【이 유】 재항고이유를 본다.호적은 사람의 신분관계를 증명하는 공문서로서, 호적부의 기재는 법률상 그 기재가 적법하게 이루어졌고 그 기재사항이 진실에 부합된다고 추정되지만, 그 기재에 의하여 신분관계가 창설되는 것은 아니므로 그 기재에 반하는 증거로써 그 추정을 번복할 수 있으나( 대법원 1979. 2. 27. 선고 78다2152 판결 등 참조), 그 기재가 신분관계의 존부에 관한 사항인 때에는 이를 번복할 만한 명백한 반증이 없는 한 그 추정이 번복되지 않는다 ( 대법원 1997. 11. 27.자 97스4 결정 등 참조). 기록에 의하여 살펴보면, 망 항고외 1( (한자 생략))의 제적등본(소갑 제3호증)에는, 그 본적이 경기 강화군 삼산면 석포리 (주소 생략)이고, 그 서자로 등재되어 있는 재항고인은 항고외 1과 김씨 사이에서 1918. 12. 3. 출생하고 항고외 2와 혼인하여 1녀( 항고외 3)를 낳은 후 1951. 6. 25. 사망하였고, 항고외 2는 1952. 1. 4.에, 그 딸인 항고외 3은 1952. 1. 14.에 각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는 한편, 재항고인의 호적등본(소을 제1호증 및 소을 제2호증)에는, 재항고인이 1961. 1. 5.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의 허가를 얻어 취적하였는데, 1919. 12. 3. 전호주 항고외 4( (한자 생략))의 자(자)로서 개풍군에서 출생하여 1949. 2. 15. 전호주 사망으로 호주상속하였고, 항고외 2와 혼인하여 그 사이에서 3남 4녀를 출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므로, 명백한 반증이 없는 한 재항고인이 망 항고외 1의 제적등본에 서자로 등재된 재항고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같은 취지의 원심 판단은 정당하고, 재항고이유의 주장과 같은 채증법칙 위반, 판단누락, 석명의무위반 등의 위법이 없으며, 이 부분 원심 판단이 정당한 이상 등기의 추정력에 관한 원심 판단의 당부는 결론에 영향이 없으므로 그에 관한 재항고이유의 주장은 나아가 살펴보지 아니한다.그러므로 재항고를 기각하기로 관여 대법관의 의견이 일치되어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대법관  안대희(재판장) 김영란(주심) 이홍훈 양창수





제적등본의 성명


대법원 1995.5.9. 선고 94다39123 판결 【소유권확인】 [공1995.6.15.(994),2081]


【판시사항】가. 제3자 명의의 소유권이전등기가 경료된 토지에 관하여 국가를 상대로 소유권 확인을 구할 이익이 있는지 여부나. 취득시효 완성 당시의 소유자가 아닌 국가에 대하여 취득시효완성으로 인한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 확인을 구할 이익이 있는지 여부【판결요지】 가. 토지에 관하여 이미 제3자 명의로 소유권보존등기가 마쳐져 있고, 토지대장상으로도 그 제3자가 소유자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에 그 토지의 정당한 소유자라고 주장하는 자는 국가가 제3자의 소유를 부인하면서 계속 국가소유를 주장하는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위 등기명의자를 상대로 하여 자신의 소유임을 확정하는 내용의 등기말소 내지 소유권 확인 판결을 받아야 하고, 별도로 국가를 상대로 소유권 확인을 구할 이익은 없는바, 이는 제3자 명의로소유권이전등기가 마쳐진 토지에 관하여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법리이다. 나. 시효완성으로 토지의 소유권을 취득하기 위하여는 그로 인하여 소유권을 상실하게 되는 시효 완성 당시의 소유자를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청구를 하는 방법에 의하여야 하는 것이지, 제3자에 불과한 국가를 상대로 자기에게 소유권 또는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이 있음의 확인을 구할 이익은 없다. 【참조조문】 가.나. 민사소송법 제228조 / 나. 민법 제245조 【참조판례】 가. 대법원 1993.9.14. 선고 92다24899 판결(공1993하,2746), 1994.3.11. 선고 93다57704 판결(공1994상,1187), 1994.6.10. 선고 94다1883 판결(공1994하,1928), 1994.12.2. 선고 93다58738 판결(공1995상,424) / 나. 대법원 1992.12.22. 선고 91다47116 판결(공1993상,550) 【전 문】 【원고, 상고인】 조일심 【피고, 피상고인】 대한민국 【원심판결】 서울민사지방법원 1994.6.24. 선고 93나41524 판결 【주 문】 원심판결을 파기한다. 제1심판결을 취소하고, 이 사건 소를 각하한다. 소송총비용은 원고의 부담으로 한다. 【이 유】 상고이유를 보기에 앞서 직권으로 살핀다. 당원은 토지에 관하여 이미 제3자 명의로 소유권보존등기가 마쳐져 있고, 토지대장상으로도 그 제3자가 소유자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에 그 토지의 정당한 소유자라고 주장하는 자는 국가가 제3자의 소유를 부인하면서 계속 국가소유를 주장하는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위 등기명의자를 상대로 하여 자신의 소유임을 확정하는 내용의 등기말소 내지 소유권확인 판결을 받아야 할 것이고, 별도로 국가를 상대로 소유권확인을 구할 이익은 없다는 법리를 거듭 밝히고 있는 터로서(당원 1993.9.14. 선고 92다24899 판결; 1994.3.11. 선고 93다57704 판결; 1994.6.10. 선고 94다1883 판결; 1994.12.2. 선고 93다58738 판결 참조), 이는 제3자 명의로 소유권보존등기가 마쳐진 토지뿐 아니라 소유권이전등기가 마쳐진 토지에 관하여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법리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있어 원고가 청구원인으로 주장하는 바는 이 사건 토지는 원래 원고의 선대인 소외 망 문금옥(문금옥 또는 문금옥)의 소유였으나, 다만 그 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를 하는 과정에서 면사무소 직원 또는 등기공무원의 착오로 등기부상 소유자의 이름이 사실과 다르게 문면옥(문면옥)으로 기재된 결과 위 문금옥의 유일한 상속인인 원고가 이제 와서 상속등기를 하고자 하여도 등기부상의 소유명의자인 문면옥과 제적등본에 나타난 위 문금옥의 성명이 서로 달라 상속등기가 불가능한 상태이고, 달리 문면옥과 위 문금옥이 동일인임을 입증할 방법이 없어 결국 이 사건 토지가 국가에 귀속될 운명에 있으므로, 피고에 대하여 이 사건 토지가 원고 소유임의 확인을 구한다는 것이고 가사 위 문금옥과 문면옥이 동일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위 문금옥의 생존시에 이미 이 사건 토지를 시효취득하였으므로 피고를 상대로 소유권확인을 구한다는 것이므로, 살피건대 원고의 선대인 위 문금옥과 등기명의자인 문면옥이 동일인이라면 원고로서는 등기절차에서 원고가 정당한 상속인임을 인정받는 방법에 의하여서만 구제받을 수 있다 할 것이고, 이 사건 토지에 관한 상속등기가 끝내 이루어지지 아니하여 궁극적으로 이 사건 토지가 국가에 귀속될 운명에 있다 하더라도 이와 달리 볼 수는 없다 할 것이며, 기록상 피고가 이 사건 토지를 국가의 소유라고 다투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피고를 상대로 이 사건 토지의 소유권확인을 구할 소의 이익 내지 확인의 이익은 없다 할 것이고, 위 문금옥과 등기명의자인 문면옥이 동일인이 아니어서 위 문금옥 또는 원고가 이 사건 토지를 시효취득하였다 하더라도 원고가 소유권을 취득하기 위하여는 그로 인하여 소유권을 상실하게 되는 시효완성 당시의 소유자를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청구를 하는 방법에 의하여야 하는 것이지, 제3자에 불과한 피고를 상대로 원고에게 소유권 또는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이 있음의 확인을 구할 이익은 없다 할 것이다 (당원 1992.12.22. 선고 91다47116 판결 참조). 따라서 원고의 이 사건 소는 소의 이익 내지 확인의 이익이 없어 부적법함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원고의 청구를 인용한 제1심판결이 부당하다면서 제1심판결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으므로, 이 점에서 원심판결은 위법하여 파기를 면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민사소송법 제407조 제1호에 의하여 자판하기로 하여 제1심판결을 취소하고, 이 사건 소를 각하하기로 하며 소송총비용은 패소자의 부담으로 하여 관여 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대법관  김석수(재판장) 정귀호 이돈희(주심) 이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