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4-12 17:27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 지수걸(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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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의 지방통치 시스템과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

  ― 윤해동 저, 󰡔지배와 자치󰡕(역사비평사, 2006)에 대한 논평 ―

 

                                    지수걸(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 문제 제기




  󰡔지배와 자치󰡕의 머리말은, “일제시기 민족운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결여의 감각이 촌락으로 나를 이끌고 간 것이 아닌가 한다”(5쪽)는 고백으로 시작되고 있다. 필자도 20여년 전 󰡔일제하 농민조합운동 연구󰡕(역사비평사, 1993)를 내면서, “조직 중심의 역사, 지도자 중심의 역사라는 낡은 문제의식을 은연 중에 고집함으로써 아래로부터 위로의 역사라는 관점을 견지하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엘리트주의적이며, 정치 편향적인 농민운동사를 쓰고야 말았”음을 실토한바 있다. 하지만 책을 출간할 때는 물론이고, 비슷한 시기 학술단체협의회가 주최한 ‘역사적 유물론’의 적실성 문제에 대한 토론회 때도 특별한 ‘방법적’ 대안은 없었다. 위 심포지움에서 일제하 사회운동사 연구의 과제로 필자가 제안한 방법적 대안이란,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이나 역사사회학(역사적 사회과학)의 성과들 가운데서 뭔가를 배워야 한다는 것 정도였다.1)

  하지만 일제시기 지역사회운동 사례들, 예를 들면 공주지역의 도청이전 반대운동과 순천지역의 소작인조합운동(소작쟁의) 등을 검토하면서2) 필자는, △ 기존 연구들은 대부분 지역사회에서 발생한 각종의 정치적 사건들을 총독부 권력과 조선 민중의 직접적인 충돌사건으로 이해한 경향이 없지 않다는 것 △ 하지만 총독부 권력과 식민지 민중은 아무런 매개없이 대립․갈등한 것이 아니라 일제가 자신의 지배를 지방사회 내부에 관철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형성한 이른바 ‘관료--유지 지배체제’를 매개로 대립하고 갈등하였다는 것 △ 따라서 지역사회에서 발생한 각종 사건을 분석할 때는 반드시 ‘관료--유지 지배체제’ 하에서 형성되곤 했던 독특한 정치투쟁의 지형(아래 그림 참조)을 고려하는 것이 긴요하다는 것 △ 달리 말하면, 지역사회에서 발생한 다양한 정치적 사건을 분석하려면 마르크스가 프랑스혁명사 3부작을 집필하면서 활용한 ‘事件史的인 接近方法’과 ‘構造史的인 接近方法’3)의 통일이 필수적이라는 것 등을 확인할수 있었다.

  그러면, 구조사적 관점과 사건사적 관점이 제대로 어우러진 운동사를 집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후 필자는 이같은 문제의식 하에서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 문제, 특히 지방정치의 주도층인 유지집단과 혁신청년집단 문제에 대한 몇 편의 사례연구를 발표하였다.4) 이들 연구에서 활용한 ‘관료-유지 지배체제’, ‘유지집단’, ‘혁신청년집단’, ‘유지정치’, ‘민원진정 활동’ 등의 용어는 일제하의 지방정치사를 ‘사건사적’인 관점에서 재구성하기 위한 필자 나름의 ‘방법적 개념’들이었다.

  윤해동도 필자와 유사한 고민 끝에 2권의 저서를 세상에 내놓았는데, 󰡔식민지의 회색지대󰡕(역사비평사, 2003)는 이분법적(이항대립적)인 역사인식의 폐해를 시론 수준에서 거론한 저작이라고 한다면, 최근에 출간한 󰡔지배와 자치󰡕는 구체적인 실태 분석을 통해 일제의 농촌(촌락)지배나 이에 대한 촌락민의 대응이 얼마나 복잡하고 이중적이었는가를 논증한 저작이라 할수 있다. 하지만, 자기 비판의 관점과 방식이 달랐기 때문인지, 위 저서들에 보이는  일제하의 지방정치사, 특히 지방통치 시스템이나 지방정치 주체들에 대한 이해방식(분석틀)은 필자와 상당히 다르다.

  첫 번째 차이는, 윤해동은 도와 면, 특히 면을 중심으로 총독부의 지방통치 시스템을 그려냈으나, 필자는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를 중심으로 지방통치 시스템을 이해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요컨대, 윤해동은, 군보다는 면이 농촌(촌락)지배의 중심(매개) 역할을 담당했다는 식으로 지방통치 시스템을 이해했으나, 필자는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를 중심으로 이를 이해하고자 했으며, 이같은 차이는 각종 지방통치 기구나 정치활동의 주체(정치적 역할과 기능, 정체성과 의식)들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이해를 결과했다. 예를들면, 지방정치의 주체문제와 관련하여, 윤해동은 면장이나, 구장․중견인물(중견청년)과 같은 촌락의 중간지배층을 주목한 반면, 필자는 군수나 군 단위 공공단체나 조합(학교평의회, 농회, 금융조합, 산업조합, 소작조정위원회 등등)에서 활동한 유지(공직자)집단을 더 주목했다.

  두 번째는 지방통치 시스템의 ‘근대성’이나 ‘공공성’ 문제를 이해하는 방법(관점)의 차이다. 가령, 󰡔지배와 자치󰡕는 도와 면, 또는 부와 읍이 가진 法人格(또는 자문기구 및 의결기구)을 강조하면서, 통치 시스템의 근대성(‘도구적 합리성’, 혹은 식민지적 근대성), 즉  ‘제도 자체의 비인격적 특성’이나 ‘근대적인 문서주의 행정 제도’ 등을 부각시킨바 있는데, 이같은 논의들은 윤해동이 제기한 식민지 근대성론이 공공성론의 핵심 이슈들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윤해동과 달리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 특히 군 기구와 군 단위로 결성된 각종 공공단체나 조합, 그리고 이런 매개들을 통해서 전개된 비공식 부문의 정치(민원․진정활동, 혹은 이른바 ‘유지정치’) 등을 강조하면서, 지방통치 시스템이나 프로세스 자체의 식민지성, 혹은 조선왕조 시기 이른바 ‘수령-사족(이향) 지배체제’5)와의 관련성(역사적 연속성)을 더 강조해온 편이다.

  윤해동의 󰡔지배와 자치󰡕는, △ 일제시기 지방통치(행정)사에 대한 총괄적인 정리, 특히 면제와 촌락기구를 중심으로 총독부의 지방통치 시스템을 면밀히  분석했다는 점 △ 시기별로 면장을 포함한 면 기구, 또는 촌락내 구장이나 중견인물(청년)의 기능과 역할변화를 검토했다는 점 △ 특별히 ‘총동원 체제기’ 촌락 내 동계류 조직(공익조직)의 분화와 재편 양상을 면밀하게 분석했다는 점 등에서 볼때, 연구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성과라 여겨진다. 게다가 윤해동의 글들은 늘 새롭고 논쟁적이다. 하지만 󰡔지배와 자치󰡕는 일제시기 지방통치의 핵심 기구(공간)이자 매개(기제)라 할수 있는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를 시야에 넣지 못함으로써, 촌락 지배를 포함한 총독부의 지방통치 시스템 자체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식민지 공공성, 혹은 근대성 논의와 관련해서도 여러 측면에서 균형을 상실했다. 이같은 문제제기와 관련하여, 1장에서는 총독부의 지방통치 시스템과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의 상관성, 그리고 2장에서는 지방정치, 특히 유지정치의 전개양상 등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간단히 정리한뒤, 3장에서는 촌락(기구)의 정치사회적 위상 변화 문제, 4장에서는 윤해동의 식민지 공공성론과 근대성론에 대한 비판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2.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의 특성




  󰡔지배와 자치󰡕에서 윤해동이 제안한 이른바 ‘촌락의 삼국면 구조론’은 필자의 ‘관료-유지지배체제론’처럼 일제의 지방통치체제(지방지배와 자치의 실상)을 분석하기 위한 일종의 방법적 개념이자 분석틀이라 할수 있다. 윤해동은 위 저서에서 ‘지배와 자치’의 실상을 ‘촌락의 삼국면(3局面) 구조’, 즉 △ 면(면제 아래 포괄되는 지역 전체)을 중심으로 한 “식민지배와 지배의 제도화 측면” △ 협의의 촌락을 매개로 한 “행정을 통한 지배와 하위 촌락민들의 생활 및 자치를 매개하는 측면” △ 촌락 내부조직을 중심으로 한 “촌락의 자치와 내부 분화의 측면” 등이 서로 어떻게 연동하고 있었는가를 구명했는데, 이같은 입론 위에서 윤해동은 일제시기 면제의 실시와 더불어 지방통치 시스템이 도-면 2계층제로 정착되었다는 점, 즉 총독부의 지방제도 정비 과정에서 도와 면, 특히 면의 기능과 역할이 강화된 반면 군(군수)의 지위는 지속적으로 약화되었다는 점 등을 강조한바 있다.6)

  󰡔지배와 자치󰡕는 면(기구)과 군(기구)의 성격을 규정할때마다, ‘면(面) = 근대적(도구적, 식민지적 근대) 효율적 통치기구’, ‘군(郡) = 군현제 사회의 유제, 혹은 약화일로를 걸었던 잠정적 기형적 통치기구’라는 식으로 양자를 대비시키고 있는데,7) 아래와 같은 언급들은 저자가 면제(面制) 실시를 얼마나 중요한 지방통치사상의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해방 후 촌락을 중심으로 한 지방지배의 측면에서 본다면 한국사회는 면의 제도화와 아울러 면을 중심으로 한 언표행위 속에서 생활해왔다고 할수 있다. 말하자면 ‘면(面)의 시대’를 살아왔던 것이다. 대체로 1980년대까지도 촌락의 삼국면구조는 유지되고 있었다. 이는 탈식민주의적 상황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시간의 중기적 지속성을 바탕으로한 국면사의 한 양상으로서 촌락의 역사를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31쪽)




  물론 기존의 연구성과들이 강조한 것처럼 일제하의 군은 도나 면, 부와 읍과는 달리 법인격(자문기관 및 의결기관 부재)은 물론이고 조례 재정권, 지방세 징수권 및 기채권 등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일제시기 지방통치 시스템이나 지방정치의 전개 양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도와 면 기구보다는 군 기구를 포함한 군 단위의 관료-유지 지배체제, 특히 이를 매개로 전개된 유지정치의 실상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제시기 총독부의 지방(촌락)지배는 도나 면, 혹은 부나 읍 기구가 아니라 군 기구,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군 단위의 관료-유지 지배체제를 매개로 관철되었기 때문이다. 일제시기 군수는 도지사(총독부)의 지휘 감독하에서 면기구(면장 및 면서기, 촌락 구장 임면)는 물론이고 군 단위 공공조합이나 단체(그 하부의 촌락 내 공공조합이나 단체)를 지도 감독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8)  이같은 사실은, 군의 「사무분장표」만을 보아도 알수 있다.9)

 

                          <표 1)> 군 사무분장 표준
  부서
 사무분장 내용
 
서무계
 ① 기밀 ② 직원의 진퇴 및 신분 ③ 포상 및 의식 ④ 직인관리 ⑤ 문서접수 ⑥ 통계 ⑦ 도서 보관 ⑧ 공고 ⑨ 숙직 및 廳中取締 ⑩ 국비, 지방비 부비 기타 특별경제 회계 ⑪ 물품 출남 보관 ⑫ 재산 관리 및 처분 등에 관한 사항 ★ (부의 서무계 업무) 
 
① 면 및 기타 공공단체의 감독 ② 兵事 ③ 교육학예 ④ 구휼 및 자선 ⑤ 社寺, 종교 및 향사 ⑥ 사회사업 ⑦ 도시계획 ⑧ 지방개량 ⑨ 경비 ⑩ 도로, 하천, 항만 및 수리 ⑪ 수도 및 하수도 ⑫ 영선 ⑬ 위생 ⑭ 학교비 및 향교재산 ⑮ 인감 증명 ⑯ 농상공업 ⑰ 삼림, 수산 ⑱ 광업 기타 산업 ⑲ 타부서의 소관이 아닌 것 등에 관한 사항 ★ (부의 내무계 업무) 
 
재무계
 ① 사용료, 수수료 기타 세외 수입 ② 稅則 위반자의 처분 ③ 역둔토 관리 ④ 토지대장 및 임야대장 ⑤ 세원 조사 ⑥ 세무에 관한 면허장, 허가장 및 鑑札 교부 ⑦ 금융기관 ⑧ 지방경제 ★ (부의 재무계 업무는 이외에 국세, 지방세, 부세, 학교조합비 및 학교비의 부과 징수에 관한 사항이 추가되어 있다)
 


 

  일제시기 부와 군의 사무분장표에서 주목되는 차이는, 부에는 ‘국세, 지방세, 부세, 학교조합비 및 학교비의 부과 징수’에 관한 권한이 부여되었던 반면에, 군에는 이런 권한이 없는  대신 ‘면 및 기타 공공단체10)의 감독’에 관한 권한이 부여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부․읍(도시) 을 제외한 모든 농촌지역(면과 촌락)은 군 단위의 관료-유지 지배체제를 매개로 지배되었음을 말해준다. 요컨대, 일제시기 군(군수)이 수행한 ‘면 및 기타 공공단체의 감독’에 관한 사무는 총독부의 농촌 지배, 특히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를 관리하는 지방통치의 핵심 사무에 다름 아니었다.

  면에 대한 군(군수)의 지도 감독 권한이 얼마나 강력했는가는 「면사무감독준칙」11)만을 보아도 알수 있다. 예를 들면, 위 준칙 제2조 “부윤 군수는 임시의 필요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년 적어도 1회 자신 또는 대리관을 파견하여 면사무 전반에 걸쳐 감사를 실시해야 한다”, 그리고 제3조 “전조(前條) 감사의 결과는 아래의 사항, 즉 ① 현상(現狀) ② 지도(指導) 광정(匡正)을 행해야 할 사항 ③ 장래 시정을 요한다고 인정되는 사항 ④ 기타 중요사항 등으로 나누어 이를 도장관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조항12) 등은 면 사무가 철저하게 군수의 통제 하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부읍이나 면의 세입세출 구조를 통해서 확인할수 있듯이, 부제나 읍제가 개정되는 1931년 이후(기채권 일부 인정)에도 부읍의 자치 권한이나 사무는 지극히 제한적인 의미만을 가질 뿐이었다.13)

  한편, 일제시기 지방유지들은 읍면에 납부하는 공식적인 부담(읍면 부가세 등)이외에 군 단위 공직자14)로서 각종 명목의 ‘통치 비용’을 분담했는데, 이런 사실도 지방지배 과정에서 군 단위 공공단체나 조합들이 수행한 ‘비(반)공식적’인 역할과 기능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가령 전남 화순군 동복면의 대지주인 오건기(吳建基)는 1937년 현재 군농회 특별위원, 군소작위원회 예비의원, 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여고보 후원회 간사, 세무서 소할(所轄) 소득조사위원, 소방협회 도지부 평의원, 결핵예방협회 군지부 평의원, 도잠종조합 평의원 등의 공직을 수행하면서 1939년 3월부터 1940년 4월까지 신사(神社) 건축, 경찰서 의용단, 소방조, 촌도(村道)기성회, 군사후원회, 지원병, 애국부인회, 일본적십자사, 청년훈련생, 국민총력앙양대회, 충혼탑 설립 관련 기부와 더불어, 봉헌목대(奉獻木代) 및 봉찬회비(奉贊會費), 사상연맹지부 찬조금, 황군(皇軍) 위문 등의 명목으로 무려 1만여원의 현금을 소모하였는데, 1939년 현재 오건기가 부담한 지세, 제3종소득세, 호별세, 동부가세(面賦課金) 등은 9천여원 정도였다.15) 일제하의 지방유지들은 오건기처럼 수많은 공직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사회활동 능력(공직 수행능력)이나 ‘당국 신용’은 이같은 공직 활동을 통해서 축적된 것이었으며, 지역사회나 유지집단 내부의 위상이나 서열도 각각의 유지들이 보유한 이른바 ‘유지기반’과 ‘유지정치’ 역량에 따라 결정되곤 했다.

  일제시기 지방사회에서 빈발한 민원․진정사건16)의 경우, 도회나 면협의회, 부회나 읍회와 같은 공식부문의 정치기구17)보다는 군(면) 단위로 조직된 기성회나 시민회와 같은 비공식부문의 정치조직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어찌보면 도회나 부읍회(면협의회)는 공식부문의 정치보다는 비공식부문의 정치를 활성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각종 시민(면민․군민)대회나 민원․진정사건 관련 보도를 보면, ‘군내(郡內) 일반 언론’, ‘민중의 의사’ 등의 표현이 자주 눈에 뜨이는데, 이 또한 단순한 수사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른바 ‘공론’(일종의 鄕論)이니 혹은 ‘공덕(公德, 功德과는 다른 말이다)18)이니 하는 것들도 군 단위를 넘어서는 경우, 정치사회적 의미가 거의 없었다. 각지에서 자주 개최된 시민대회(면민대회, 군민대회)는 ‘공론 형성의 장’이라기 보다는, 해당 지역 유지집단이 ‘주민 대표성’을 ‘사칭(詐稱), 선취(先取)’하기 위한 ‘명분용 의례’인 경우가 허다했다(졸고, 부여 논산지역 사례연구 참조).19)

  총독부가 부윤이나 읍장직과는 달리 유독 각군 군수직에 조선인 관료를 많이 기용한 것도 군수가 가진 지방통치 시스템상의 특별한 역할과 기능 때문이었다. 즉 일제하의 군수는 단순한 행정 관료가 아니라 학교평의회나 농회 등 각종 군 단위 공공단체나 조합의 장으로서, 해당 군내의 ‘관료-유지 지배체제’(공직 기구 및 유지 집단)를 관리하는 최고 관리자이기도 했다. 가령, 1926년 1월 「조선농회령」에 기초하여 설립된 계통농회는 이른바 ‘식민지 지주제’의 매개기구로서 총독부의 농업개발, 농민수탈, 농촌통제 정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군 농회의 회장은 군수, 부회장은 군서무계 주임(이상 도지사 임명)이었다. 게다가 금융조합이나 수리조합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공단체(조합) 사무실은 군청에 소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제하의 군수는 사무분장표에 명시되어 있는 업무 이외에, 해당 군의 교육, 산업, 미풍양속 부흥, 각종 자선․봉사활동이나 기부․후원 활동 등은 물론이고,  민원․진정사건(특히 국가자원 배분이나 소작문제 관련 분쟁) 등이 발생했을때, ‘지역사회의 어른’(군수 영감)이나 ‘공직자(유지) 집단의 수장(사이비 공공성의 수호자)’으로서, 이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역할까지 수행해야 했다. 일제시기 농촌지역(면 및 촌락 단위)에서 민원․진정사건이 발생하는 경우, 1차적인 사건 접수 창구(진정서 및 탄원서 제출)는 대부분 군이었다. 

  이상과 같은 지방통치 시스템을 감안하고 보면, 각종 민원․진정활동이나 지역사회운동의 중심 공간(기본 단위)이 대부분 군(1914년 군면 폐합 이후의 군)이었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 할수 있다. 일제시기 각 지역의 농민조합이나 청년조직은 물론이고 신간회나 형평사 등조차도 대부분 군 단위 조직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 또한  조선왕조 시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어떤 공동체적 유산 때문이 아니라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 자체의 정치사회적 규정력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윤해동처럼, 면 = ‘근대적 효율적 통치기구’, 군 = ‘잠정적 기형적 통치기구’라는 식으로 양자를 대비시키는 경우, 지방통치 시스템 자체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지방사회에서 전개된 각종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이해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3. 군 단위 유지집단의 사회적 구성과 역할




  그동안 사회이동(social mobility)의 관점에서 일제시기 유지집단의 개념이나 구성문제를 다룬 연구성과들을 정리하면, 하나는 유지집단을 구래의 명망가층이나 사족층(향리층을 포함한 지방엘리트, 혹은 한문엘리트층)을 잇는 사회계층으로 파악하는 견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지집단과 혁신청년집단을 구분하지 않은 채 모든 농촌사회 내 유력자 일반(농촌엘리트)을 유지범주에 포괄하는 견해 등으로 나누어 볼수 있다(자세한 연구사 정리는 졸고 부여 논산지역 사례연구 참조). 가령, 김익한은, 농촌사회의 유력자를 ‘지역 명망가층’(구래의 양반 지주 출신)과 ‘신흥 유력자층’(향리 출신의 신흥 유력자)으로 구분한 뒤, 양자가 지방정치 과정에서 서로 다른 정치사회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이해한 바 있으며, 마쓰모도(松本武祝)20)도 김익한의 견해를 수용하는 가운데 ‘지방유지’를 19세기 요호층(饒戶層)을 잇는 재촌 중소지주층으로 그 개념을 규정한 바 있다. 하지만, 정연태(鄭然泰)21)는 일제하의 지방유지(혹은 유력자, 명망가)를, “글자 그대로 ‘뜻이 있거나, 힘이 있거나 명망이 있는 사람’(근대적 개발과 계몽의 주체)”이라 규정하면서, 필자가 제안한 개념 자체의 적실성은 물론이고, 분석틀로서의 유용성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한바 있다.22) 이런 견해는 이따가끼(板垣龍太)23)의 사례연구에서도 지지되었는데, 그는 상주지역의 사례를 근거로, 필자가 유지 범주와 내용(中身)을 지나치게 ‘legitimate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비판하면서, 유지 개념을 “특정한 지역사업 과정에서 일시적으로(temporaly) 형성된 농촌엘리트” 정도로 포괄적으로(유연하게) 규정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정연태나 이따가끼(板垣龍太) 등과 마찬가지로 윤해동도 일제하의 유지집단을 하나의 지위집단으로 보는데 반대할 뿐만 아니라 분석개념으로서의 유용성조차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좀 길지만 위 책에 보이는 해당 대목을 그대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지역의 유지를 고정된 지위집단으로 간주하게 되면 식민지 지배하의 지배와 저항 사이의 공간을 유영하는 중간지배층으로서 동요하는 유지의 속성을 간과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중간지배층으로서의 유지란 신분, 자산, 위력, 명망 등 그가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지역민으로부터 신망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배체제에 참여하는 것이다. 관료-유지 지배체제란 이처럼 그 틀을 구성하는 한쪽 개념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방지배의 역동성을 사상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분석적 개념으로는 근원적인 제약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동요하는 중간지배층의 매개적 역할을 간과하고, 유지의 지배자로서의 입장만 강조하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유지집단 내부의 구성변화, 그리고 유지집단과 관료가 맺는 관계의 역동성과 복합성을 간과함으로써 관료-유지 지배체제는 그 의도와는 달리 정태적인 분석틀로 고찰될 위험을 안고 있다(226쪽).24)

 

  물론 일제하의 유지집단은 “군 단위의 ‘관료-유지 지배체제’와 더불어 형성 발전된 일종의 사회적 지위집단(social status group)”, 즉 군 단위로 해당 집단의 ‘명부’가 관행적으로 만들어진25) 집단이기는 하나, 늘 특정한 정치적 역할만을 수행했다거나, 구성 자체가 결코 변치 않는 ‘고착화된’ 지위집단은 아니었다. 이미 한말 일제시기 사회이동 연구(공주 및 함안지역 사례)나 앞의 순천지역 사례연구 등에서도 누차 밝혔듯이, 유지집단의 사회적 구성이나 정치사회적 역할은, 단기적으로는 지방정치 상황(지역사회운동의 고조기, 퇴조기)이나 유지기반의 변화(새로운 인물의 공직 진출 등 유지 지위 획득, 또는 도시 이주나 파산),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출신 성분과 같은 사회변동에 따라 그 구성(사회이동의 결과)이 끊임없이 변화했다.

  뿐만 아니라 유지집단의 정치사회적 역할도, 정치적 이슈의 내용이나 각 정치주체간의 힘관계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유동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집단의 정체성(identity)이 모호했다거나, 양면적, 이중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앞의 연구들처럼 유지집단의 범주를 폭넓고 가변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경우, 유지집단과 혁신청년집단이 가진 정체의식이나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혁신청년집단의 존재 자체도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에 전국적으로 전개된 ‘청년회 혁신운동’(1차 분화), 그리고 1930년대 초반의 광주학생운동이나 신간회 해소투쟁 등(2차 분화) 등을 경과하면서, 혁신청년집단은 유지집단과 구별되는 지방정치의 한 주체로 성장했다(졸고, 부여 논산지역 사례연구 참조).

  다른 한편, 일제하의 ‘지방유지집단’은 마을 단위에 존재했던 구장이나 중견인물과 같은 ‘촌락 대표자’(촌락 내 중간지배층),26) 또는 필자가 말하는 ‘혁신청년’과도 그 성격이 구별되는 존재들이었다. 藤村德一이 편찬한 󰡔朝鮮公職者名鑑󰡕(1927)27)은, ‘總督府職員錄’과 ‘公職者名鑑’을 각각 ‘人爵錄’과 ‘天爵錄’이라 비유하면서, “朝鮮에 있어서 公職者가 公益을 위해 바치는 犧牲”을 운운하고 있는데, 지나친 단순화일는지는 모르나 위의 명감이 발행된 1927년 현재 조선사회는 △ 8만 내외의 관료집단(조선인 관료가 전체의 절반을 약간 상회했음)과 △ 10만 내외의 유지(공직자)집단에 의해 지배되던 식민지사회였다(졸고, 재조선 일본인사회 관련 사례연구 참조).







 4. 촌락의 정치사회적 위상




 1) 촌락의 주체와 매개기구

 

  총독부의 촌락지배정책에 대한 연구28)들은 대부분, 농촌통제정책의 주요 목표가 촌락지배의 완성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윤해동의 ‘촌락의 삼국면 구조’론이나, 松本武祝29)의 “농민 개인 - 촌락 윤리(및 그것에 기초하여 운영 유지된 촌락내의 제조직․관계) - 외부 규범”으로 구성된 ‘삼층구조 모델’도 촌락을 지나치게 정태적(내부와 외부가 확연히 구별되는 일종의 ‘소우주’)으로 파악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18, 19세기 사회변동 과정에서 신분제에 기초한 전통적인 촌락질서는 점차 해체되는 경향을 보였으며,30) 이런 현상은 일제시기에 이르러 더욱 급진전되었다. 필자가 서산지역의 사례연구에서 확인한 것처럼, 1920년대에 이르면 상당히 유력한 동족마을에서조차도 이런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졸고, 서산지역 사례연구 참조). 일제시기에 이르면, 이른바 개별 농민들이 ‘근대권력’이나 ‘식민권력’과 직접 부대끼는 장(場)’은 이미 촌락(洞里) 수준을 넘어 군면(郡面)이나 전국 단위로 급속히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대지주들의 도시(부읍) 이주가 본격화한 것도 어찌보면 촌락에 거주하며 촌락민을 지배하는 것보다는 읍내에 거주하면서 군 단위 농촌진흥위원회 및 마을진흥회를 매개로 촌락민을 지배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촌락에서 거주하는 경우는 촌락생활 특유의 면접성(面接性)이나 사적인 연줄망 때문에 ‘온정주의(paternalism)’에 기댄 농민들의 읍소에 무심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테러위협조차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1930년대에 들어 농촌진흥운동 등을 통해서 군 단위의 ‘관료-유지 지배체제’가 제도적으로 완성되면서, 일정한 토지소유 규모와 더불어 그 나름의 ‘유지기반’을 갖춘 대지주들은 촌락내에 거주하면서 농민과 부대끼며 지내는 것보다 비용(‘공직 유지’나 ‘유지정치’에 소용되는 비용)은 좀 더 들더라도 ‘관료-유지 지배체제’를 매개로 자기안정을 꾀하는 것을 선호하기 시작했다.31) 이때에 이르면 촌락단위에서 사적으로 관행되던 온정주의조차도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를 매개로 구현되곤 했다(앞의 서산지역 사례연구 참조). 요컨대,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란 촌락 내부와 외부를 유기적으로 서열화한, 즉 총독부 권력 → 군․면 단위 관료기구 → 군․면 단위 공직기구 혹은 유지집단 → 마을 단위 중견청년 → 촌락 농민 등으로 서열화한 지방통치체제였다.

  따라서 일제하의 지방 통치시스템의 특성(근대성, 식민지성)을 말하려면 촌락을 넘어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 특히 군 단위 유지집단과 유지정치의 실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하지만 󰡔지배와 자치󰡕는 기존 연구들과 마찬가지로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와 촌락의 상관성을 시야에 넣지 못한채, 촌락 단위 중간지배층의 역할을 과장한 측면이 적지 않다. 물론 윤해동의 지적처럼 총독부의 직접 통치가 구장이나 중견청년을 매개하지 않고는 촌락 단위까지 미치기 어려웠다는 지적32)은 일면적으로는 옳다고 보인다. 그러나 총독부의 농촌(촌락) 지배는 윤해동이 말하는 면리 시스템보다는 군을 단위로 형성된 관료-유지 지배체제를 매개로 지배되었다. 일제시기 지방정치의 중심 무대(전쟁터)는 면이나 촌락이 아니었으며, 또 촌락 단위의 구장이나 중견인물들도 결코 지방정치의 핵심 주체(또는 주요 매개)라 말하기는 어려운 일종의 ‘끄나불적’인 존재에 불과했다.34)




2) 촌락내 동계류 조직의 위상

 

  일제시기 촌락내 동계류 조직에 대한 윤해동의 분석은 흥미롭다. 윤해동은 일제시기 촌락 내외의 사회변동 과정에서 새롭게 형성된 동계류 조직 등을 ‘공익기구’(28쪽)35)라 명명한뒤, 그 변화양상을 시기별, 유형별로 면밀히 검토했다. 이와 관련한 󰡔지배와 자치󰡕의 주요 결론은, △ 동계류 조직들은 면제 실시 구장과 중견인물의 행정적 포섭과 더불어 지배와 자치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다는 점 △ 이들 조직들은 지방제도 개편(면제 실시 및 촌락지배정책 변화) 과정에서 공공적 역할이 약화되고 조합적 성격이 강화되었으며, 행정지배의 기초단위로 이용되었다는 점(424쪽) △ 하지만 총동원체제기 “공익기구가 가지고 있던 촌락의 공익 -공공성은 총동원 국가기구의 공공성으로 포섭되었고, 공공성은 천황제 국가의 이상을 위하여 희생되었다”(415쪽) 등이다. 윤해동에 따르면, “총독부의 촌락지배정책은 새로운 행정동리를 편제함으로써 종래의 자치기능을 이로 흡수하는데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나, 종래의 자치기능은 온존되었으며, 또한 그것을 정책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귀결되었”(223쪽)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해동은 지방제도 개혁과정, 특히 군면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가 형성 발전되는 과정에서 촌락 내 동계류 조직의 기능과 역할이 상당 부분 군 단위 공공조합이나 단체로 포섭되어 갔다는 점을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가 완성되는 시기에 이르면, ① 촌락 내의 學契는 군 단위 학교비 ② 부조계나 저축계는 금융조합이나 식산계 ③ 생산이나 노동 관련 조직은 농회나 산업조합 그리고 ④ 수리문제와 관련한 기능과 역할은 수리조합 ⑤ 소작지 분쟁이나 자선봉사 기능과 역할은 각종의 군면 단위 공공단체나 조합(소작조정위원회, 사상정화위원회 등의 관민 합동 위원회) 등이 수행하기 시작했다. 윤해동의 문제제기처럼, “촌락기구들이 가진 지배와 자치의 양 측면”을 균형있게 설명하려면, 다른 무엇보다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가 형성 발전되면서, 각종 촌락조직들이 군 단위 공공단체나 조합에 어떻게 포섭되거나 계열화(하부조직화)되었는가를 심도있게 분석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5. 식민지 근대성론과 공공성론




 1) 식민지 근대성론

 

  최근 ‘식민지 근대(근대성)’, 혹은 ‘식민지 규율권력’ 문제에 대한 논의가 한창인데,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근대성’과 ‘식민지성’에 대한 통일적 이해(동시성론)를 이구동성으로 강조한다. 하지만 미셸 푸코가 말하는 ‘근대 규율권력’, 또는 신기욱이나 松本武祝 등이 말하는 ‘식민지 근대(Colonial Modernity)’36)의 삼투(내면화) 현상을 곧바로 식민권력, 즉 일제의 조선 지배에 대한 ‘동의(합의)’로 換置한 듯한 설명들은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가령 松本은 「식민지기 조선인 하급직원의 의식구조」에서, 조선인 농촌엘리트(근대를 소비하고 신체화한 자)들의 계몽활동 등으로 말미암아 민중들도 ‘근대’에 대한 강렬한 욕망(동경)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는데,37) 여기서도 ‘근대 규율권력 헤게모니’와 ‘식민권력 헤게모니’가 구분되고 있지 않다. 예를들면 야학 고학 독학 등 식민지 조선인들의 남다른 교육열조차도 단순히 ‘근대 규율권력 장치(결국은 식민권력 장치)를 실제로 경험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식민지 근대’나 ‘식민지 규율 권력’ 자체에 대한 ‘동의(합의)’로 이해한 대목(윤해동, 󰡔식민지의 회색지대󰡕, 47쪽) 등은 기존의 이분법적인 역사 해석보다 더 단순 소박한 역사이해라 보여진다.       

  윤해동의 󰡔지배와 자치󰡕도 머리말의 “근대적 효율성으로 무장한 면 단위의 행정이  어떤 식민주의적 억압성을 드러내고 있었는가”(30쪽) 등의 질문을 통해서 확인할수 있듯이 구체적인 사실을 통해서 ‘식민지 근대성론’을 전개하고 있다.38) 하지만, 윤해동처럼 면의 법인격 인정 = 자치 인정 = 비인신적 지배와 문서주의 행정 = 근대적 효율적 지배 등의 등식, 즉 면의 법인적(자치단체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면행정의 근대성과 공공성을 말하는 경우, 왜곡된 역사상이 그려질 가능성이 크다. 윤해동의 제2부 「면제의 근대적 성격」, 제2장 「면제 제정과 근대적 시공간의 형성」은 면제의 근대성을 본격으로 논의한 부분인데, 이는 면 행정의 부분적 특징을 확대 해석한 것일 뿐이다. 예를들면, 윤해동은, △“문서행정제도를 도입함으로써 행정과 관련한 모든 인간관계는 문서취급 절차로 환원되었”다는 점, △ 이에 따라 “행정에 종래의 인간관계나 인격적 지배가 개입할 여지는 주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점, △ “행정절차에 인격이 배제된다는 것은 문서행정이 절차의 투명성을 높여 줄 뿐만 아니라 결과의 예측 가능성도 높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 등을 강조하고 있으나, 일제시기의 기록관리제도는 행정의 책임성, 투명성, 효율성 등의 차원에서 볼때, 근대성 못지 않게 식민성이 특별히 돋보이는 제도였다.39) 물론 일제시기 문서행정이 ‘근대화’되었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거나 폄하해야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위의 사실을 근거로 ‘기계적이고 도구화된 합리성’이니, ‘인간을 얽어매는 철의 우리(iron cage)’ 등을 운운하는 것(134-135쪽)은 지나친 비약이라 여겨진다.

  일제하의 지방통치 시스템과 프로세스에는 인격적 지배예속 관계(비공식적, 폭력적, 억압적 지배예속 관계)가 강력하게 관철되고 있었는바,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란 이런 관계를 제도화(공식화)한 것에 다름 아니었으며, 지방유지 또는 공직자란 이런 과정에서 형성된 지방지배의 민간층 담당자들이었다. 하지만 윤해동은 지방지배 시스템은 물론이고 유지집단의 정치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필자와 전혀 다른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면내의 유지-명망가집단이 얼마나 면 행정에 참여하느냐 하는 점은, 문서행정의 수준이 높아지고 면제가 제도적으로 착근하면 할수록 총독부에게서는 별로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게 될 것이다. 반면 면의 제도화 수준이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고 문서행정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이라면, 면내 유지-명망가 집단의 면행정에의 참여는 총독부로서는 절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면 행정 담당자에 대한 정책적 수준에서의 요구와, 면 행정 담당자의 실제 성격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135쪽)




  하지만 이는 군 단위 관료-유지지배체제를 매개로 전개된 통치나 정치를 시야에 넣지 않은 견해일 뿐이다. 일제하의 지방유지집단에게 면 단위 행정 참여란 공식적으로건 비공식적으로건 그리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며, 이보다는 오히려 군 단위 기구, 특히 군 단위 공공단체나 조합에서의 정치가 더 중요했다. 따라서 통치 시스템 자체의 근대성이나 식민성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려면 각종의 군면 단위 관료기구, 공공단체나 조합, 각종 유지단체들을 매개로 전개된 공식적 제도적인 정치, 그리고 이면에서 이루어진 비공식부문의 정치를 총괄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2) 식민지 공공성론과 협력론




  식민지 공공성론과 협력론의 핵심은 총독부 통치시스템과 프로세스의 작동과정에서 공공영역이 확대되고 있었으며, 이런 공공영역에서 활동한 조선인들을 친일파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並木眞人, 金東明, 尹海東, 松本武祝40) 등은 조선인 농촌엘리트(필자 식으로 표현하면 유지나 공직자)들의 사회활동을 ‘민족↔반민족’, ‘친일↔항일’, 지배↔저항이라는 이항대립적 잣대만으로 그 의미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에서, ‘친일(파)론’에 대한 ‘대체(혹은 대안)’ 개념으로 이른바 ‘協力論’을 주창한 바 있다. 물론 ‘협력론’자들이 제기한 각종 주장들은 윤해동의 표현을 빌면, ‘식민지 인식의 회색지대’를 일깨우는 참신한 제안이라 믿어진다.

  하지만 식민지 공공성론을 설득력 있게 전개하려면 ‘公’ 창출의 역사성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 진행돼야 하며, 그 논의의 핵심은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의 형성과정에서 나타난 공공조합이나 단체(공직자)의 형성, 그리고 이들에 의해 주도된 각종 공직(公論 및 公德 형성) 활동에 대한 분석 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점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전제하지 않은채, 하버마스류의 ‘합의’ 개념을 조작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오히려 식민지 사회에 대한 이해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41) 가령, 松本은 국가(유지)언설을 통한 헤게모니 관철 과정 = 합의형성 과정 = 공공성의 획득과정이라는 도식에 근거하여 식민지 공공성론을 전개하고 있으나,42) 식민지 시기 官-公-私의 형성과 분화 문제를 본격적으로 구명하려면 이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 필수적이다.43)

  여러 연구에서 강조했듯이, 일제시기 행정법상으로 관과 공과 사의 영역은 엄밀히 구분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공공단체나 조합은 대부분 관변 단체적 성격이 강했으며, 관립과 공립의 구별도 애매했다(관과 공의 미분화, 공의 국가 전유). 가령, 구한말부터 관립학교, 공립학교, 사립학교의 구분이 존재했으나, 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비용만을 주민이나 유지들에게 전가시켰을 뿐이지, 각각의 학교가 가진 ‘관립’, ‘공립’, ‘사립’학교로서의 특성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좀더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나, 일제하의 ‘公’은 滅私奉公의 공처럼,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헌신을 ‘공적인 것’으로 미화하려는 정치적 의도, 또는 사적 영역을 이른바 공공성을 명분으로 하여 국가영역으로 포섭해 들이려는 의도가 개입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언설이라는 점을 좀더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식민지 조선사회에는 ‘擬制的 公’, 혹은 ‘似而非 公’만이 언설로서 존재했지, ‘시민적 공공영역(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들면, ‘有志’라는 관행적 용어(공문서에도 종종 등장함)도 사실은 이데올로기적 언설의 소산물이라 말할수 있다. 유지 개념을 󰡔우리말 큰사전󰡕처럼 ‘좋은(公的인, 혹은 社會的인) 일에 뜻이 있거나 열의를 보이는 사람’ 정도로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경우, 일제하의 유지는, ‘公共性의 擔持者(體現者)’, ‘公的 談論(公論)의 형성 주체’, 더 나아가서는 ‘근대적 계몽과 개발의 주체(진보와 해방의 견인차)’였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사회에서 이른바 ‘有志 行勢(行世)’44)를 한 이들, 또는 ‘公德’을 쌓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지출했던 이들을 그렇게만 평가해도 괜찮은 것인지는 좀더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松本과 윤해동이 식민지 공공성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동원한 ‘이론(분석틀)’이나 ‘사실(근거)’들 가운데는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다. 가령, 일제하의 지방정치 과정에서도 여러 공직기구(자치․자문기구, 면민․시민대회, 공공조합․단체)를 매개로 ‘공공 영역’(근대적 시민적 공공성)이 일정부분 확대되고 있었다는 주장, △ 지방유력자들의 공공적 활동이나 실력양성운동 과정에서 근대 규율권력(혹은 식민지 권력)에 대한 동의나 합의가 꾸준히 확대되었다는 주장 △ 농촌엘리트, 혹은 구장이나 중견청년 등의 공적 활동, 혹은 근대에 대한 욕망 과정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동의나 합의기반이 확대되었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이런 점들을 강조하는 경우, 일제시기 공직 진출자들을 친일파라고 하는 이항대립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협력자’라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덜 부담스러울수도 있다.

  하지만 일제하의 조선사회는 정치사회는 물론이고 국가로부터 일정하게 자율적인 시민사회가 부재한, 즉 ‘공공영역’의 자율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은, 식민지 사회였다. 요컨대, 윤해동의 지적처럼, “모든 공공성은 국가에 의해 포섭되었고, 국가는 곧 공공성의 체현자로 포장되었”을 뿐이었다(366쪽).45) 이런 사실은 군면기구, 또는 군단위 공공단체나 조합의 운영원리, 또는 해당집단의 정치사회적 기능이나 역할 등을 살펴보아도 여실히 확인할수 있다. 게다가 민원해결 활동 등 유지들이 주도한 비공식부문의 정치사회적 활동은, 표면적으로는 ‘國益’이나 ‘朝鮮人 利益’, 혹은 ‘지역이나 주민 이익’ 등 ‘공적 이익’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으나, 대부분은 ‘공적 이익’보다는 특정집단이나 개인들의 ‘사적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기 지역주민들의 유지집단에 대한 기대나 의존(=사회인망, 유지들의 ‘비빌언덕’ 역할)도 ‘공적 신뢰에 바탕한, 공익을 위한 공적 활동’에 대한 기대나 의존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6. 식민지 정치사 연구 방법




  윤해동이 󰡔식민지의 회색지대󰡕에서 잘 지적한 것처럼, 지배와 저항의 이항대립적 서사틀, 또는 수난과 부활(열정)의 코드(passion의 역사상)에 의거하여 일제시대사를 서술하는 경우, 편향적인 역사상이 그려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일제시기 지방사회에서 이루어진 권력과 자원의 독점이나 배분을 둘러싼 다양한 계급계층들의 갈등과 대립을 제대로 역사화하려면, 당연히 역사적 서사의 구조나 코드를 좀더 다층화, 다중화해야 한다. 하지만 이항대립적 서사틀, 혹은 운동사적 관점 자체의 강점을 백안시하거나 무시하는 가운데, 사실 해석의 양가성이나 양면성, 사건 자체의 복잡성과 다층성, 정치(운동) 주체의 이중성이나 동요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 의도와는 반대로 ‘식민지 인식의 회색지대’는 오히려 더 넓어질 가능성이 크다. 

  구조사적인 접근방법과 사건사적인 접근방법의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일제하의 지방정치사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경우, 총독부의 지방통치 시스템과 프로세스, 특히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의 특성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위 글에서 필자가 강조한 것은, △ 일제시기 지방통치의 핵심기구는 도나 면이 아닌 군, 특히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였다는 점 △ 즉 일제하의 군은 도나 면처럼 법인격(혹은 자문기관이나 의결기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면기구(면장 및 면서기)와 더불어 각종 공공단체나 조합(공직자 및 유지집단)을 지도 감독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 일제하의 촌락은 면 기구와 더불어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각종 공공조합이나 단체 포함)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점 △ 따라서 일제시기 지방사회에서 벌어진 각종 정치적 사건들을 분석하려면 당연히 군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 전체를 시야에 넣을 필요가 있다는 점 △ 일제하의 지역사회운동이나 해방 이후의 인민위원회 운동 등이 군(군면 폐합 이후의 군)을 단위로 전개된 것도 도나 면에 비해 군 단위 정치공간의 중요성이 더 컸기 때문이라는 점 등이다. 물론 윤해동의 지적처럼 1914년의 군면 폐합, 1917년 조선 면제 실시, 1920년 면협의회 설치, 1931년 읍제 실시 등을 통해 면의 위상이 꾸준히 강화된 것은 사실이라 할수 있다. 하지만 면은 지방통치(정치)의 중심기구(공간)이 아니었으며, 면에 부여된 법인격도 일본인이 밀집해 거주하던 도시지역, 즉 부회와 읍회에만 제한적으로 부여된 것이었다.

  일제시기 조선의 지방사회는 총독부-도-군-면-동리로 이어지는 행정조직, 특히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에 기초하여 지배되었으므로, 지방지배 시스템이나 프로세스의 식민지 근대성이나 공공성 여부를 구명하려면, 당연히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의 특성(구성과 작동방식)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좀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나, 일제하의 ‘관료-유지 지배체제’는 조선왕조 시기의 ‘수령-사족(이향) 지배체제’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조선왕조 사회의 守令과 일제하의 군수(행정 관료)는 국가기구 내부의 지위와 역할, 법률적 책임과 의무가 서로 달랐으며, 또 유지(공직자)집단과 士族이나 吏鄕層도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가령, 조선왕조 시기의 사족과 이향층은 법률이나 제도로 보장된 지배신분(鄕權의 담당자)임에 반해, 有志는 비록 사회적으로 ‘공인된’ 지위집단이기는 하나 법이나 제도로 그 지위가 보장된 집단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수령-사족(이향) 지배체제’는 강력한 물질적․이데올로기적 기반을 갖춘 상당히 안정된 지배체제였음에 반해, ‘관료-유지 지배체제’는 계급 및 민족 타협의 물질적․사상적 기초가 취약한 지배체제였다. 하지만 일제의 지방통치 시스템이나 프로세스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단절성보다는 연속성, 근대성보다는 식민지성(전근대성)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일제의 조선지배정책사나 민족해방운동사를 서술할때, 이분법적인 서사틀을 과감히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 또는 일제하의 근대(식민지 근대성)를 추구의 대상만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으로도 바라볼줄 알아야 한다는 지적 등은 새겨들어야할 고언이다. 앞서도 강조했듯이, 일제하의 지방지배 시스템이나 프로세스는 물론이고 각 정치주체(사상과 실천 행위)들도 당연히, 근대성과 식민성, 혹은 타협성과 저항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연구들이 식민지 농촌사회에서 전개된 각종 정치적 사건을 서술할 때, 총독부 권력과 지주계급을 한편으로 하고 혁신청년들과 농민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단순한 정치지형만을 부각시킨 것도 당연히 비판되어야 마땅하다. 필자는 최근에 출간된 ‘문제작’46)들 가운데 보이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근대성론’ ‘식민지 공공성론(협력론)’, ‘식민지 조합주의론’ 등은 어찌되었든지 식민지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대표적인 ‘담론’이자 ‘방법적 대안’들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같은 담론이나 연구방법들에 내재한 역편향을 경계하지 않을 경우, 일제시대를 포함한 한국 근현대사 인식은 온통 잿빛으로 화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가령, 탈근대․탈민족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연구들을 보면 복잡성, 혼종성, 양가성, 양면성, 다양성, 다층성 등의 용어(일종의 방법적 개념)가 자주 눈에 띄는데, 이런 용어들은 잘못 활용되는 경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지배(권력)담론을 분쇄하는 역할보다는 저항(대안)담론을 해체하는 역할만을 수행할 가능성이 더 크다. 예를 들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민중․민족담론(특히 좌파 민중담론)을 해체하기 위한 ‘anti(反)와 post(脫)의 발칙한 야합’, 또는 ‘국익․성장담론과 탈근대․탈민족담론의 잘못된 만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수 있다. 흔히 말하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은 권력화(화석화)한 지배담론 뿐만 아니라 저항담론이나 대안담론조차도 무력화시킬수 있는 ‘양날의 칼’이다. 이런 점들을 충분히 유념하는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은 ‘무기의 비판’이 아니라 ‘비판의 무기’로서 빛을 발할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