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4-12 17:25
일제하의 조선에 있어서 일본인 토지소유규모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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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下 朝鮮에 있어서 日本人 土地所有規模




忠南大學校 經濟貿易學部 敎授 許粹烈




I. 머리말




해방이 될 때까지 농업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그리고 토지는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이었으며,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조선의 지배가 주요한 모순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민족별 토지소유관계를 명백히 하는 것이야말로 식민지적 농업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빠뜨릴 수 없는 요체라고 생각된다. 민족별 토지소유관계를 해명함으로써 농업 생산과 생산물 분배의 민족별 내역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그것을 토대로 일제시대에 이루어진 각종 농업개발정책이 조선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지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민족별 토지소유관계의 해명이 이렇듯 중요한 의미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용하는 연구가 별로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공표된 자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별 경지면적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1910‐1915년간 및 1922, 1928, 1932년 정도에 불과하며, 그 나마도 1932년 자료는 답에 대한 정보 밖에 없다.

그런데 이들 조선총독부 자료와는 조금 다르지만, 한가지 크게 주목을 끄는 자료가 있다. 조선은행과 경성상공회의소에서 1931년과 1941년의 일본인소유 전답면적 및 조선의 전답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율에 대해 추계한 자료가 그것이다. 이 자료는 수확미 판매액을 기준으로 민유과세지에서 일본인 회사와 개인이 소유하는 전답면적과 그 비율을 추계한 것인데 그 결과가 놀랍다. 일본인이 소유하는 답면적은 1931년에는 70만 정보였고, 1941년에는 90만 정보였다는 것이다. 이 면적은 1931년 및 1941년의 조선의 답면적의 44% 및 54%에 달하는 엄청나게 높은 비율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1932년의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이 소유하던 답면적은 26.5만 정보로서 조선전체 답면적의 16.1%에 불과했는데, 조선은행의 추계에서는 그것이 무려 70만 정보(44%)로 양자 사이에 거의 2.6배의 차이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1

한쪽이 조선총독부 통계라면, 다른 한쪽은 조선은행 및 경성상공회의소의 추계이다. 둘 중 하나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들 세 기관이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통계작성기관이었던 점을 염두에 둔다면, 양쪽 다 타당할 수도 있다. 만약 이들 두 계열의 통계가 모두 타당하다면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낳았을까?

양자간의 차이는 소유면적을 파악하는 기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통계가 단순한 면적기준으로서 토지생산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반면, 조선은행 등의 추계는 수확미판매액 기준이라는 토지생산성을 고려한 추계였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의 토지가 조선인들의 토지에 비해 상당히 비옥한 것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연구가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토지생산성을 고려한 민족별 토지소유비율은 단순한 면적기준에 의한 비율보다는 상당히 컸을 것임은 분명하다. 즉 토지생산성을 고려한다면 1931년의 일본인소유 답면적의 비율은 조선총독부 자료의 16.1%(1932년 자료) 보다 훨씬 큰 값을 가지게 될 것은 명백하지만, 과연 그것이 44%나 되었을까?

만약 이 44%라는 추계가 상당한 타당성을 갖는다면, 일제시대에 이루어진 각종 농업개발의 의미는 완전히 새롭게 해석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즉 일제시대의 농업개발에 의해 농업생산이 크게 증가되었다고 하더라도 일본인들의 토지소유가 이토록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경성상공회의소의 추계와 같이 1941년에는 그것이 54%로 증대되어 갔다면, 그러한 증산이 조선인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심각하게 재고해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농업생산의 민족별 분배는 아주 불평등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농업개발에 의해 증산된 양 이상의 농업생산물이 일본인에게 귀속되어 버릴 가능성마저 예상케 한다. 설사 농업개발의 결과 조선인에게도 증산의 과실이 일부 분배된다고 하더라도, 현저하게 불평등한 소유구조는 극도로 불평등한 분배구조를 낳을 수밖에 없고, 불평등한 분배구조는 민족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함으로써 민족차별을 항구화하고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조선은행이나 경성상공회의소의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에 대한 추계가 타당하다면, 조선인에게 있어서 식민지적 농업개발은 경제적 질곡의 심화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농업개발을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일제시대 조선에서 얼마나 많은 경지를 소유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이렇게 보면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된다. 일제시대의 농업개발로 인한 이득이 민족별로 어떻게 배분되고, 그것이 민족별 소득격차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문제는 차후의 과제로 삼기로 하고, 이 논문에서는 조선은행과 경성상공회의소의 추계가 과연 타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토지소유실태를 명백히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II. 경지면적의 검토




조선의 경지 중에서 일본인이 소유하는 경지의 비중을 알아보려면, 우선 조선의 경지면적에 대한 믿을만한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조선의 경지면적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통계는 『朝鮮總督府 統計年報』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1>에서 볼 수 있듯이 이 통계는 1910‐1917년간과 1918년 이후의 두 부분으로 확연히 나뉘어 진다. 1918년이 토지사업이 일단락되는 해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경지에 대한 데이터는 일단 정확하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1910‐1917년간의 경지면적 통계는 조선총독부 스스로가 과소평가를 인정하고 수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뢰성에 의문이 있다.




<그림1> 『朝鮮總督府 統計年報』상의 경지면적과 그 수정치

 

<주> 답e, 전e, 계e는 1918‐1942년의 선형회귀식을 사용한 추계치임.

<자료> <부표1>에서 작성.




과연 1910‐1917년간에 실제로 경지면적이 증가했을까? 몇가지 증가 가능성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자.

첫번째 가능성은 1910년대 후반의 유례없는 호경기가 경지면적 증가에 어떤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여기서는 미곡가격(경성의 현미가격)의 변화를 통해 경기변동과 경지면적의 변화 사이의 관계를 알아보기로 하자. 조선은행에서 조사한 경성의 현미가격의 1910‐1920년간의 월별 추세는 <그림2>와 같다.




<그림2> 京城의 월별 현미가격 (개량 상 1석, 가격 단위 : 엔)

 

<자료> 朝鮮總督府 財務局, 『朝鮮金融事項參考書』, 1940, 224‐225쪽




경성의 미곡가격은 1910‐1912년간에는 상승하였지만, 1913‐1914년간에는 하락하였고, 1915‐1916년간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한 다음, 1917‐1919년간에 급등하였다. 미곡가격의 상승이 경지면적의 증가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차가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미곡가격의 상승과 경지면적의 증가 사이에는 별로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 전년의 미곡가격이 이듬해의 경지면적에 영향을 준다고 가정한다면, 1910‐1917년간과 같은 경지면적의 급증이 있기 위해서는 1909‐1916년에 미곡가격이 충분히 상승했어야 하지만,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관계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경지면적의 증가폭이 컸던 1911, 1915‐1917년간에 대응하는 1910, 1914‐1916년간의 미곡가격은 오히려 감소국면에 있었기 때문에 양자간에는 오히려 역의 상관관계마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미가 상승이 1910‐1917년간의 경지면적의 증대를 가져왔다고 보기는 어렵다.2

두번째로 일본인들이 조선에 진출하면서 미간지를 개간하여 경지면적이 증가한 경우도 여러 사료에서 자주 눈에 띈다. 그런데 1909년말의 조선총독부 통계를 보면, 일본인소유지의 80.3%는 기간지이고 나머지 19.7%가 미간지로 되어 있다. 미간지가 20% 정도로 제법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조선전체의 경지면적에서 이것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만약 미간지를 구입하여 개간함으로써 증대되는 경지면적이 일본인소유지의 20%에 해당한다고 가정하고, 1922년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 보면,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은 21만 정보이고, 그 1/5이 미간지를 개간하여 생긴 경지라고 한다면, 개간에 의해 증가된 경지면적은 약 4만 정보 즉 1922년 경지면적 432만 정보의 약 1%가 된다. 일본인의 개간에 의한 경지면적의 증가도 전체적으로 보면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1910‐1918년간에 경지면적을 실제로 증가하게 만들었을 만한 두가지 가능성을 검토해 보았지만, 그 어느 것도 이 기간의 경지면적의 급증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결국 이 기간의 경지면적의 급증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이 기간 동안 진행된 토지조사사업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이다. 즉 1910‐1918년간의 경지면적은 통계상의 급증과는 달리 실제로는 거의 변함이 없었거나 아주 조금 증가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렇듯 1910‐1917년간에 경지면적이 크게 증가했을 이유는 별로 없지만, 달리 뚜렷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1918‐1942년간의 선형회귀식을 사용하여 1910‐1917년의 경지면적을 추계하였다(<부표1> 참조). 단 이 추계에 의하면, 1910‐1918년간에 경지면적은 63,723정보 (1910년 대비 1.5%) 증가한 것으로 되는데, 1918년 이후의 경지면적의 증가가 주로 1925‐1934년간(제2차 산미증식계획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고려한다면 다소 과소추계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 전답별 경지면적도 동일한 방법에 의해 추계하였다.

추계치를 토대로 1910‐1942년간의 경지면적 변화를 보면, 전체 경지면적은 1910년에 비해 약 2.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경지면적의 증가는 황무지를 개간하든가, 연안지방을 간척하는 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데, 그 증가비율이 높지 않은 것으로 보아, 병탄 당시에 이미 경작 가능한 토지가 거의 개발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같은 기간 동안 답의 면적은 21.0% 증가하였는데, 이 증가율은 전체 경지면적 증가율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 환언하면 전면적의 증가율은 이 기간 동안 6.5%가 오히려 감소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일제시대 조선의 경지구성은 후기로 갈수록 답의 비중이 커지면서 대체로 33.5‐39.5% 수준에 놓여 있었고, 전의 비중은 60.6‐66.5%로 답의 약 2배에 달하고 있었다.




III. 일본인소유 경지면적




그러면 조선의 경지 중에서 일본인이 소유하는 면적은 얼마나 되었을까? 1909년판 『朝鮮總督府 統計年報』의 ‘日本人 農事經營者’ 표를 보면, 1909년 12월말 현재 일본인들은 967 만엔 가량의 자금을 투입하여 기간지를 중심으로 6만 2천 정보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3 그러나 이 자료에서 말하는 토지는 전답뿐만 아니라 임야도 포함하는 것이고, 따로 전답별 면적은 주어져 있지 않다.4

조선총독부가 공표한 자료 중에서 민족별로 전답면적을 알 수 있는 시기는 1910‐1915년간 뿐이다.5 조선총독부 식산국에서 발간한 『朝鮮の農業』에서도 비록 한 줄짜리 아주 간략한 언급이기는 하지만 1922년과 1928년의 일본인소유 전답면적을 알 수 있다.6 이 밖에 1932년의 일본인의 답소유면적에 대한 자료가 하나 더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민족별 전답소유규모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이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답별 내역은 알 수 없지만, 전답을 합한 경지면적에 대해서는 ‘지세납세의무자 면적별 인원표’에서 민족별 자료를 구할 수 있다. 이 자료는 조선총독부 재무국에서 발간한 『朝鮮稅務統計書』에 수록되어 있다.7

 지세납세의무자 면적별 인원표는 1918년부터 1943년까지 공간된 것으로 보이며,8 지세령 제1조에 의거하여 지세부과의 대상이 되는 田, 畓, 垈地, 池沼, 雜種地의 소유자 및 그 소유면적에 대한 통계이다.9 그런데 지세의 부과대상이 되는 민유과세지는 1931년의 경우라면 <표1>에서 볼 수 있듯이 거의 대부분 전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민유과세지 전체에서 전답을 제외한 나머지(대지, 지소, 잡종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3.8%였다. 다른 연도에 대해서 검토해 보아도 대체로 이와 비슷하였다(<부표2> 참조).




<표1> 1931년말 민유과세지의 내역 (면적 단위 : 천 정보)

 
 면적
 비중
 




대지

지소

잡종지
    2,738

  1,594

      133

        1

      35
 60.8%

35.4%

3.0%

0.0%

0.8%
 
합계
 4,501
 100.0%
 
<자료> 『朝鮮總督府 統計年報』 1931년판, 718‐719쪽




따라서 지세납세의무자 면적별 인윈표에서 나타나는 소유지면적 합계와 조선총독부 통계년보의 경지면적은 거의 비슷해지지 않을 수 없다. <부표2>에서 보면 지세납세의무자 소유지면적은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의 경지면적 보다 0.2 – 2.8% (평균 1.2%)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세납세의무자 면적별 인원표의 총면적의 성격이 이러하다면, 그 내역으로 수록되어 있는 민족별 (조선인, 일본인, 외국인별) 총면적은 거의 그대로 민족별 경지면적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朝鮮稅務統計書』에서는 민족별 면적합계만 있고, 과세지 종류별 내역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이 자료로는 경지면적만 알 수 있을 뿐이고, 전답별 내역은 알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일본인소유 경지면적 통계를 이용할 때,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조선의 최대 경지소유주의 하나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으로 약칭)의 소유지의 포함 여부를 명백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의 각주 6에서 지적하였듯이, 다 같이 1922년말의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에 대한 통계를보여주고 있는 『朝鮮の農業』(1922년판)과 『朝鮮に於ける內地人』(1924년판) 두 자료를 비교해 보면, 후자의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에 동척 소유지를 합하면 전자의 일본인소유 경지면적과 같아지기 때문에, 1922년에 대한 전자의 통계에는 동척소유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928년의 『朝鮮の農業』상의 일본인소유 경지면적 자료도 1922년의 자료와 성격상 동일하기 때문에 역시 동척소유분을 포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10 한편 1922년의 일본인소유 답면적은 137,260 정보인데, 그 속에는 46,866 정보의 동척 소유답이 포함되어 있다. 동척소유답을 제외한 나머지는 90,394 정보가 된다. 이 값은 『朝鮮總督府 統計年報』1915년판의 일본인소유 답면적 107,846 정보보다 오히려 작아지게 된다. 1915‐1922년간에 일본인소유 답면적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1915년의 통계에도 동척 소유분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 이유로 1910‐1915년간의 조선총독부 통계에도 동척 소유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이들 자료를 종합하여 연도별로 일본인소유 경지면적과 그것이 조선의 전체 경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그림3>과 같다.




<그림3> 일본인소유 경지면적과 조선의 경지에서 차지하는 비중

 

<자료> <부표1>에서 작성.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은 1910‐1915년간과 1928‐1935년간에 특히 급증했다. 1915년까지 일본인 경지면적이 급증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동척소유 경지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그림4>에서 볼 수 있듯이, 동척소유 경지는 1910년 10,944 정보에서 1915년 68,675 정보로 57,730 정보 증가하였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은 69.312 정보에서 169,008 정보로 99,696 정보 증가하였기 때문에, 그 증가 중 58%는 동척소유 경지의 증가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척소유 경지는 1915년까지 급증한 뒤, 정체 및 감소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마찬가지로 1916년‐1928년경까지의 일본인소유 경지면적 증가세의 둔화도 동척소유 경지 증가세의 둔화 혹은 감소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림4> 동양척식㈜ 소유 경지의 변화

<자료> 『朝鮮總督府 統計年報』, 각 연도판에서 작성




한편 1920년대말 이후에도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이 급증하게 된다. 일본인소유 경지는 1928년 223천 정보에서 1935년에는 455천 정보로 7년간에 2배 이상 증가하였다.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은 1935년을 정점으로 하여 그 이후에는 42만 정보 수준을 오르내리게 된다. 그리고 조선의 경지에서 일본인소유 경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1910‐1942년간에 최고가 10.3%(1935년)였고, 1936년 이후에는 대체로 9%대에 머물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1928‐1935년간의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의 급증은 이 시기의 공황과 관련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 공황은 모든 경제부문에 타격을 주었지만, 농업부문이 받은 타격은 특히 심각한  수준의 것이었다. 공황에 의해 농가경제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소작농은 물론이고 자소작농과 자작농 나아가 일부 지주들까지 큰 타격을 받았다.

























<그림5> 미가, 이자율 및 부동산담보대출 지수의 추이 (1925=100)

 

<주> 이자율로서는 조선식산은행 貸付金日步 보통을 사용하였고, 미곡가격은 조선은행조사의 경성물가표 중 현미가격(개량 상 1석)을 사용하였다. 이자율로 보통은행의 ‘대부금 이자율’ 대신 식산은행 대부금일보를 사용한 이유는 전자의 통계가 1928년부터 집계양식이 달라져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료> 朝鮮總督府 財務局, 『朝鮮金融事項參考書』1939년판, 『朝鮮總督府統計年報』, 각 연도판에서 작성




<그림5>에서 볼 수 있듯이 1925‐1931년간에 부동산 담보대출은 40% 가량 증가한 반면, 미곡가격은 60% 정도 급락하였다. 이자율도 하락하였지만 그 하락율은 30% 정도에 불과하였고, 지세로 대변되는 제세공과금은 1933년경까지는 거의 불변이었다. 농가의 주수입원인 미곡가격을 비롯하여 각종 농산물 및 농산가공품의 가격이 폭락함에 따라 농가의 현금수입은 격감되어 갔지만, 제세 공과금, 수리조합비, 차입 원리금 등의 농가지출은 상대적으로 크게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지주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차입금이 많았던 지주들이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은 명백하다. 차입금을 주요 재원으로 건설되었던 수리조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발생하였다. 1935년의 조사에 의하면 조선의 197개소의 수리조합 중 1/3에 해당하는 67개소의 수리조합이 불량(갑, 을, 병 3종 합계)상태에 빠졌다고 한다.11

차입금이 많은 지주들이 다투어 농지를 매각하려고 내어 놓게 되자 농지가격도 급속히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6>에서 볼 수 있듯이, 답가격은 수리조합 구역내외를 막론하고 거의 동일한 양상으로 변해갔는데, 1931년의 답가격은 1927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1920년말 이후의 농업공황 과정에서는 현금흐름이 원활하지 못하고 차입금 상환압박이 컸던 일부 지주들이 경쟁적으로 토지를 방매함으로써 토지소유권의 대량 이동을 낳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경제적 곤란 때문에 토지를 염가로 방매할 때 자금력이 좋은 일부 일본인들이 그 토지를 대량으로 또 염가로 사들임으로써 1928‐1932년간에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이 급증하였던 것이다.




<그림6> 반당 답 매매가격

 

<주> ‘식은’은 식산은행이 조사한 답 매매가격 전국평균을, 그리고 ‘수조’는 수리조합구역내의 답매매가격을 의미한다. 각각 중등답을 기준으로 하였다.

<자료>朝鮮殖産銀行,『全鮮畓田賣買價格及收益調』, 각 연도판 및 朝鮮總督府土地改良部 編.,『朝鮮土地改良事業要覽』1927년, 1928, 1929, 1931년판에서 작성




토지소유권의 큰 이동을 낳았던 이러한 사정은 1930년대 중엽부터 서서히 안정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1930년대를 통해 이자율은 계속 하락해 갔고, 반대로 미곡가격은 1932년부터 회복국면에 들어갔으며, 1935년부터는 토지가격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1936년부터는 불량수리조합을 구제하는 정책도 실시되기 시작했다.12 토지소유권의 급격한 이동을 초래하였던 각종 요인들이 제거되고 농가경제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림3>에서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의 비중이 1936년부터는 일단 정체상태를 보이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이 증가하게 되는 원인은 시기별로 차이가 있었지만, 그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소유 경지의 구성비(즉 일본인소유 경지에서 전과 답이 각각 차지하는 비중)는 상당히 안정적이면서도 일정한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을 감안하여 자료가 결락되어 있는 연도에 대해서도 추계가 가능하고, 추계된 경지면적을 토대로 다시 전답면적을 추계할 수 있다. 그 결과는 <부표2>와 같고, 그것을 도시해 보면 <그림6>과 같이 된다. 1930년대가 되면 일본인들은 30만 정보 가까운 답과 15만 정보 가량의 전 합계 45만 정보가량의 경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림6> 일본인소유 경지면적 및 전답면적

 

<자료> <부표2>에서 작성. 추계방법에 대해서는 <부표1의 추계방법>을 참조하라.




IV. 토지생산성을 고려한 일본인의 답소유 규모




지금까지는 면적을 기준으로 하여 일본인소유의 경지면적과 그 비중을 구하여 보았다. 그러나 민족별로 답의 비옥도는 크게 다를 수 있다. 이러한 토지생산성을 고려하여 민족별 소유경지면적을 추계한 자료가 있다. 조선은행과 경성상공회의소에서 내어 놓은, 수확미 판매액을 기준으로 민유과세지 중에서 일본인이 소유하는 경지면적을 추계한 자료가 그것이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표2>와 같다.







<표2> 일본인소유 경지면적과 전체 민유과세지에서 차지하는 비중  (단위 : 만정보)

 
 1931년
 1941년
 
민유과세지
 회사
 개인
 합계
 비중
 민유과세지
 회사
 개인
 합계
 비중
 

      159
 40
 30
 70
 44
      168
 50
 40
 90
 54
 

      274
 10
 10
 20
 7
      271
 11
 11
 22
  8
 

 433
 50
 40
 90
 21
 439
 61
 51
 112
 26
 
<자료> 1931년 : 朝鮮銀行,『朝鮮に於ける內地資本の流出入に就て』, 1933, 46쪽

          1941년 : 京城商工會議所,『朝鮮に於ける內地資本の投下現況』, 1944, 31쪽




이 표를 보면, 일본인소유의 답면적은 1931년 70만정보, 1941년 90만정보로 조선전체 답면적의 44% 및 54%에 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30년대 중엽 이후가 되면 일본인이 조선의 답의 절반 가량을 소유하게 된다는 아주 놀랄만한 추계이다.

물론 이 자료는 조선에 대한 일본인자본의 투입량을 추계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것이고, 표의 숫자에서 볼 수 있듯이 엄밀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상당히 대담한 가정이 도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총독부의 조사결과가 자신들의 추계치 보다는 훨씬 낮다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엄청나게 큰 비중을 제시한 까닭은 비옥도까지 고려하면 자기들의 추계가 훨씬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1931년에 일본인소유 답면적이 조선전체 답면적의 44%에 달한다는 이 추계가 과연 타당한가? 일제시대의 경제통계 중 상당수가 바로 이들 두 기관에 의해 작성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추계를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일소에 부쳐 버리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 추계를 그냥 그대로 받아 들이기에는 그 값이 너무 크다. 농업에 있어서는 토지소유관계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하에서는 이들 두 기관의 추계의 타당성을 집중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단 이 추계에서 사용된 수확미 판매액이라는 기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적하고 있는지, 또 어떤 자료를 사용하여 이런 추계를 한 것인지 모든 것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어차피 조선은행과 동일한 방법으로 그것을 입증할 수는 없다. 따라서 아래의 여러 설명은 당시의 미곡생산 제 조건 하에서 이런 추계치가 현실성을 가질 것인가 하는 점을 검증하는 것으로 될 수밖에 없다.

일본인소유 경지는 그 구성에 있어서 조선 전체와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조선의 경지구성은 전답비율이 전이 답보다 2배 정도 많은데 반해, 일본인의 경지는 답이 전보다 2배 정도 많았다. 그리고 그 답의 비중도 후기로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또 일본인소유 경지는 상대적으로 비옥한 토지였다. 30정보 이상 경지를 소유하는 일본인지주의 답비중은1922년 60.5%, 1925년 70.6%, 1929년 68.4%, 1931년 68.9%였다.13 東洋拓植會社를 통해 1910~1942년에 조선에 이주해 온 11만 3천호(53만명)의 일본인 이주민의 경우 호당 평균 2.3정보의 경지를 할당 받았는데 그 9할은 답이었다. 한편 일본인대지주들의 보유지를 도별로 분석해 보면, '일본인지주의 밀집지대는 답작 중핵지대인 전라남도, 전라북도와 전작 중핵지대인 황해도'였다.14

松本武祝의 경지 100정보 이상을 소유한 전라북도의 지주들에 대한 분석결과에 따르면, 일본인 대지주들은 沃溝, 益山, 金堤 등 평야부에 많은 경지를 보유하고 있었다.15 또 전라북도의 沃溝西部, 臨益, 全益, 古阜, 益沃 등 5수리조합 구역내 민족별 토지소유를 검토해 보면 소수의 사람에게로 집중현상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조선인으로부터 일본인으로, 그리고 개인소유형태에서 회사소유형태로 집중이 일어났다는 지적도 있다.16 요컨대 일본인 경지는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황해도에 집중되어 있었고, 전라도 중에서는 다시 평야부에, 그리고 평야부 중에서는 수리조합지역내에 집중되어 있었다. 일본인소유 경지가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이들이 소유하는 경지는 조선인들의 경지보다 훨씬 더 비옥하였던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일본인소유지의 생산성은 조선인의 그것보다 얼마나 더 높았을까? 1931년판 『朝鮮土地改良事業要覽』에서는 각 수리조합별로 민족별 소유면적과그 생산량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실려 있다. 전체 151개의 수리조합 중에서 조선인소유지 면적이 해당 수리조합구역 면적의 2/3를 상회하는 조합을 '조선인조합', 1/3을 하회하는 조합을 '일본인조합', 그 중간의 것을 '조일공동조합'으로 분류하여 각각의 단보당 생산량을 구해 보면 <표3>과 같다.




<표3> 수리조합 구역내의 민족별 단보당 수확량 (단위 : 정보, 석)

 
 조합수
 실수확 면적
 수확량
 단보당 수확량
 
조선인조합
 85
 41,627
 1,097,031
 2.64
 
일본인조합
 19
 27,646
 856,651
 3.10
 
조일공동조합
 47
 87,960
 2,427,999
 2.76
 
합계/평균
 151
 157,233
 4,381,681
 2.79
 
<자료> 『朝鮮土地改良事業要覽』1931년판, 100-133쪽에서 작성.




단보당 수확량에 대한 계산결과를 보면 조선인조합의경우에는 2.64석, 일본인조합의 경우에는 3.10석으로 양자간에 약 17% 정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다 같은 수리조합구역내에 있는 답이라고 하더라도, 조선인 답과 일본인 답 간에는 토지생산성에 제법 큰 차이가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인소유지와 일본인소유지가 혼재하고 있는 조일공동조합의 경우에는 조선인조합과 일본인조합의 중간값으로 나타나는데, 이 역시 논리적으로 정합적이다.

다시 『朝鮮土地改良事業要覽』1931년판에서 각 수리조합별로 민족별 토지소유규모별 민족별 조합원수와 소유면적을 정리해 보면 <표4>와 같다. 조선인 조합원수는 81,220명으로 전체의 92.7%를 차지하지만, 그 소유면적은 전체의 55.9%에 불과하다. 나머지 44.1%의 79.249 정보의 토지는 6,372명의 일본인 및 기타 지주가 소유하고 있다.




<표4> 수리조합 구역내 민족별 소유면적별 조합원수와 그 면적

                                                              (1931년 12월 31일 현재, 면적단위 : 정보)

소유

면적별
 일본인
 조선인
 기타
 합계
 
인원수
 면적
 인원수
 면적
 인원수
 면적
 인원수
 면적
 
‐~0.5
 1,593
 431
 40,366
 9,779
 165
 52
 42,124
 10,262
 
‐~1
 1,000
 761
 19,335
 13,905
 108
 90
 20,443
 14,756
 
‐~10
 2,580
 8,763
 20,408
 49,738
 224
 822
 23,212
 59,323
 
‐~50
 437
 9,285
 1,035
 19,956
 75
 1,913
 1,547
 31,154
 
~100
 67
 5,211
 60
 3,993
 20
 1,449
 147
 10,653
 
 100~
 72
 27,049
 16
 3,015
 31
 23,423
 119
 53,488
 

 5,749
 51,499
 81,220
 100,386
 623
 27,750
 87,592
 179,635
 
비중
 6.6%
 28.7%
 92.7%
 55.9%
 0.7%
 15.4%
 100%
 100%
 
<자료> <표3>과 같음.




그런데 이 자료에서는 기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민족별 내역을 알 수 없다. 宮嶋博史는 “기타 가운데 조선인의 토지회사나 종중재산분을 제외하면 일본인의 소유토지는 전체의 40%를 약간 하회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였다.17 농지개혁시 피분배지주에 대한 자료를 보면 농업회사, 향교, 불교, 천주교, 학교 등에 의한 소유지면적은 3,180정보였다.18 또 1930년의 충남북, 전남북 및 평북에 대한 100정보 이상 토지를 소유하는 조선인지주의 경우, 회사 및 종교단체 등에 의한 소유지면적은 1,264정보였다.19 여기에 경기도에 관한 1937년의 지주명부를 토대로 이 ‘기타’에 속할만한 조선인의 토지규모를 더해 보면 6,043정보(답)가 나온다. 이것은 수리조합구역내의 토지면적 179,653 정보의 3.4%에 해당한다. 이들 토지가 모두 수리조합 구역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13개의 도 중에서 불과 6개만을 대상으로 검토하였으며, 시기적으로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한계가 있지만, 대체로 이 비율 정도가 기타 항목에서 조선인 소유분이라고 해도 크게 잘못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수리조합 구역내의 일본인 소유지의 비중은 40%를 약간 상회할 것으로 판단되지만, 여기서는 40%(71,854 정보)로 가정하기로 하겠다.

한편 산미증식계획의 실시와 더불어 수리시설이 급속도로 확충되어 1925‐1941년간에 조선의 답에서 천수답이 차지하는 비중은 51.4%에서 28.3%로 떨어지고, 반대로 관개답의 비중은 48.6%에서 71.7%로 크게 늘어나게 된다(이하 <표5> 참조). 또 이것을 수리시설의 운영형태별로 보면, 수리조합에 의한 관개면적이 3.8%에서 13.1%로 급증하였고, 그 나머지 공동(27.9%  33.7%), 개인(14.0%  19.5%), 기타(2.7%  5.4%) 에서도 약간씩의 증가가 보여진다. 비록 수리조합에 의한 관개면적의 확대가 가장 급속히 성장했지만, 공동과 개인이 처음부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1941년이 되어도 수리조합에 의한 것보다는 공동적 및 개인으로 운영되는 수리시설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931년의 경우에는 관계답이 61.3%, 천수답이 38.7%였고, 수리조합에 의한 관개면적은 전체의 9.7%에 머물고 있었다.




<표5> 수리시설별 답면적 (단위 : 정보)

 
 1925
 1931
 1936
 1941
 
답면적
 1,578,353
 1,662,325
 100.0%
 1,704,593
 1,760,042
 
 천수답
 810,493
 643,366
 38.7%
 528,123
 540,530
 
 관계답
 
 767,860
 1,161,448
 61.3%
 1,161,448
 1,219,512
 
  관계답

  운영형태
 수리조합
 59,925
 213,138
 9.7%
 213,138
 236,299
 
공동
 440,999
 581,402
 30.7%
 581,402
 549,925
 
개인
 220,738
 315,122
 17.7%
 315,122
 330,511
 
기타
 42,867
 66,807
 3.3%
 66,807
 102,418
 
х±·<P STYLE='font-family:"바탕체";font-size:10.000pt;color:"#000000";text-align:right;line-height:100%;text-indent:0.




일본인소유 답의 경우에도 전체 237천 정보 중 72천 정보(수리조합구역 면적의 40%)만 수리조합구역내에 있었고, 나머지 165천 정보는 수리조합구역 바깥에 놓여 있었다. 수리조합의 경우에는 단보당 생산량을 알 수 있었지만, 나머지 165천 정보에 대해서는 그것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러나 『朝鮮土地改良事業要覽』1931년판의 '朝鮮土地改良事業地 一覽圖'(<부도1> 참조)를 보면, 수리조합에 의하지 않는 토지개량사업지역은 수리조합지역보다 대체로 좀 더 해안 쪽으로 위치해 있고, 조선의 대표적인 평야지대에 밀집해 있다. 또 전체 286개의 사업지 중에서 일본인에 의한 것이 194개소로 전체의 2/3 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동척을 비롯한 거대지주의 소유지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194개소 중에서 1931년 지주명부에 등장하는 것은 41개소(하나의 회사가 여러 지역에 사업지를 가지고 있는 14개소 포함)인데, 그 답 면적은 45,916 정보였다. 나머지 153개소의 일본인 토지개량사업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정보가 없다. 그러나 수리조합에 속하지 않는 토지개량사업지에 존재하는 일본인소유 답도 대부분 수리조합구역내에 있는 답에 못지 않는 높은 토지생산성을 가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토지개량사업지에 속하지 않는 일본인 답은 어떠했을까? 일본인 토지소유자들이 조선인과 섞여서 농사를 지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대체로 이들은 집단을 이루거나 아니면 거대지주로서 한 곳에 대규모 경지를 소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아가 이들 일본인 농사경영자들은 개량농법을 중시하고 있었고, 또 그것을 위해서는 수리시설의 정비가 무엇보다 중요한 관건이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의 토지는 비록 토지개량사업지 외부에 존재하는 토지라고 하더라도 비교적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지고 평야지대에 속하는 답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해도 별로 틀림이 없을 것이다. 요컨대 토지개량사업지 외부에 존재하는 일본인소유 답도 거의 대부분 ‘수리안전답’에 집중되어 있었을 것이고, 이들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토지생산성이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즉 1930년의 조선의 답 163만 정보 중에서 관개답은 96만 정보였고, 천수답은 67만 정보였다. 관개답 중에서는 수리안전답이 53만 정보, 수리불안전답이 43만 정보였다. 조선 전체 답의 2/3에 해당하는 110만 정보는 천수답이거나 수리불안전답에 해당한다. 수리안전도별 민족별 답소유 비율과 그 생산성에 대한 구체적 내역은 알 수 없지만, 만약 토지개량사업지역 외부에 존재하던 일본인들의 답이 거의 대부분 수리안전답에 속하였고 또 그 생산성이 수리조합구역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극단적인 가정을 해 본다면, 일본인소유 답의 단보당 생산량은 3.01석으로 당시 조선의 평균 단보당 생산량 1.15석의 2.6배가 되어 조선은행의 추계치에 근접하게 된다.

나아가 조선은행의 추계는 수확미 판매액을 기준으로 한 것인데, 수확미 판매가격은 미질, 건조조제 방법, 출하시기 등의 차이에 의해 민족별로 상당한 격차가 있을 수 있다. 요컨대 조선은행의 추계는 단보당 생산성만을 고려하여 검토해 보면 일본인소유 답면적을 다소 과대평가한 것 같은 느낌은 들지만, 이러한 여러 가지 가능성도 동시에 고려해 본다면 그 나름대로 상당한 타당성을 가진 추계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1941년에 대해서는 경성상공회의소에서 조선은행과 동일한 방법으로 추계한 자료가 있다. 그런데 앞의 <표4>에서 1941년 데이터와 1931년 데이터를 서로 비교해 보면, 1941년의 경우에는 1931년의 데이터에 답의 경우에는 회사와 개인에 대해 각각 10만 정보씩, 그리고 전에 대해서는 각각 1만 정보씩 더 얹어 주어서 추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은행의 추계치와는 달리 1941년에 대한 경성상공회의소의 추계치는 강한 작위성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림6>에서 보았듯이, 일본인 소유 답면적 비율은 1935년까지 약간 상승했다가 그 후 다시 감소하기는 하였지만, 1931년과 1941년을 비교해 보면, 면적을 기준으로 하여 답은 55천 정보(1931년보다 23%), 전은 4천 정보(1931년보다 3%) 각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부표2> 참조). 구체적인 숫자는 다소 신뢰성이 떨어지지만, 전체적인 동향은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두 기관의 자료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검토해 보아야 할 점이 있지만, 생산성을 고려했을 때 이 자료가 상당한 타당을 가진 것은 분명하다.




V. 맺음말




이 논문은 일제시대의 농업부문을 민족별 토지소유 특히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을 추계하는 것과 토지생산성을 고려했을 때 1931년의 일본인소유 답면적의 비중이 조선전체의 답면적의 44%(1941년에는 54%)를 차지한다는 조선은행(경성상공회의소)의 추계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이 중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의 추계에 있어서는 조선총독부 재무국에서 매년 발간한『朝鮮稅務統計書』의 ‘지세납세의무자 면적별 인원표’의 면적자료를 사용하여 지금까지 전혀 알 수 없었던 1934‐1939년 및 1942년의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료는 지금까지 널리 알려져 온 것이지만, 종래에는 이 자료에 수록되어 있는 민족별 면적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로 경지소유규모별 동향을 분석하는데 이용되어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세령과 지세납세 대상지에 대한 정보를 종합해 보면, 이 자료에 수록되어 있는 민족별 면적은 거의 대부분 경지(전답)에 대한 자료이기 때문에, 이 자료를 이용하여 민족별 경지면적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타당하다면, 앞으로 이 연구과정에서 이용하지 못했던 다른 연도판의 『朝鮮稅務統計書』가 발견될 때 민족별 경지면적에 대한 통계가 한층 더 충실해질 가능성도 열려지게 된다.

민족별 경지면적에 대한 이들 자료를 정리해 보면, 일본인소유 경지비중은 1910‐1942년간에 1.6%에서 9.7%로 증가하였다. 연도별로 가장 비중이 높았던 때는 1935년으로 10.3%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 증가율은 일률적이 아니었다. 1910‐1915년 및 1928‐1935년의 두 시기에 급증했고, 나머지 시기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1910‐1915년의 경지면적의 증가에 있어서는 동양척식㈜ 소유지의 급증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1928‐1935년의 경우에는 공황에 따라 조선인이 토지를 방매하고 일본인이 그것을 집적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경지구성의 내역을 보면, 조선의 경지구성이 전 위주로 되어 있었던 것과 달리, 일본인소유 경지는 답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조선의 답면적에서 일본인소유 답면적이 차지하는 비중은 위의 비중을 훨씬 웃도는 것으로 되었다. 즉 일본인소유 답면적의 비중은 1910년 3.0%에서 1942년 16.6%로 증가하였고, 1935년이 18.4%로 피크였다. 또 시기별로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1910‐1915년 1928‐1935년에 크게 증가하였다.

한편 조선은행 및 조선상공회의소의 추산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에서는 아직 분명치 못한 점도 많이 있지만, 이들 기관의 추계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경성상공회의소의 추계는 외관상 강한 작위성이 느껴지고, 따라서 구체적인 숫자에 대해 신뢰할 수 있을지 어쩔지 불분명하지만,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의 증가폭과 방향에 있어서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분석결과에서 일본인소유 경지가 식민지기간에 급격히 증가되어 왔음이 명백해졌다. 특히 생산성을 고려했을 때 그 비중의 증가는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결론은 몇가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첫째로 일본인들이 이렇게 높은 비중의 답을 소유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일본인들이 조선인들보다 농업개발에 더 적극적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논문에서 일본인소유 답의 단보당 생산량이 조선인보다 월등한 것이었음을 지적하였고 따라서 토지생산성을 고려했을 때의 그 소유면적은 단순한 면적기준을 훨씬 넘어선다고 하였는데, 환언하자면 이것은 일본인들에 의한 조선농지개발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은 황무지를 구입하거나 국유 미간지를 불하/대부받아 개간하거나, 공유수면을 농업용 목적으로 개간함으로써 경지를 확대하기도 했지만, 생산성이 낮은 토지를 염가로 매입하여 수리시설을 갖추고 개량농법을 도입함으로써 높은 생산성을 달성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소유지의 비중이 급증한 것 전부를 ‘수탈’로만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일본인소유지의 확대는 개간이나 간척 등 경지확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간지의매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간척을 통한 경지면적의 증가는 1940년말까지 누계로 보았을 때 <표7>과 같다. 1940년 말까지 공유수면 매립면허면적은 31만 정보 가량 되었지만, 그 중에서 준공된 것은 5만 4천 정보였고, 답으로 만들어진 것은 3만 1천 정보였다. 조선전체의 경지면적이나 답면적 혹은 조선의 일본인소유 경지면적 혹은 답면적에 비해 보면 그다지 큰 값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이 값 속에는 조선인에 의한 간척분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요컨대 간척을 통해 조성된 일본인소유지는 일본인소유 답의 최대 1할 정도였다. 또 미간지를 경지로 만드는 개간과 전을 답으로 변환시키는 ‘지목변환’은 1940년말까지 누계 7만 2천정보 정도였다. 개간이나 지목변환은 수리시설의 확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수리조합구역내 일본인소유지 비중이 40% 정도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역시 일본인소유지의 최대 1할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일본인소유지의 8할 이상은 기간지를 매입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20 요컨대 일제시대의 농업개발이라는 것이 주로 기존의 경지에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우량품종을 보급하고, 비료 투입을 증가시키는 개량농법을 전개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표7> 토지개량사업 지목별 면적일람표 (1940년 현재 누계)

 
 수리조합
 비수리조합
 합계
 
관개 개선
 151,363
 6,156
 157,519
 
지목변환 및 개간
 67,660
 4,753
 72,413
 
간척
 9,501
 21,776
 31,277
 
용배수 설비 개선
 12,541
 1,667
 14,208
 
합계
 241,065
 34,352
 275,417
 
<자료> 『朝鮮土地改良事業要覽』 1940년판.




이와 같이 일본인에 의한 농업개발이라는 것이 기간지를 중심으로 하였다는 사실은 조선의 농업이 그 이전까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개발되어 있었고, 일본인들의 농지에 대한 진출은 이미 개발되어 있는 비옥한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토지를 집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토지개량사업을 수리시설별로 보면 제언과 보가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표8>에서 볼 수 있듯이 제언의 개소는 1808년 3,685개소에서 1910년대에는 6천여개로 증가하였다.21 보의 개소는 1808년 2,265개소에서 1916년 20,707개소, 1930년 76,142개소로 크게 증가했다. 1916년의 제언과 보 중에는 수축이 필요한 것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지만, 병탄 이전에 조선에서는 이미 상당 정도의 수리시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 역시 명백하다.22 나아가 병탄 이후에도 조선인 중심의 수리조합설립이나 계 등을 통한 수리조합 이외의 다른 형태의 수리시설 확충노력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농업개발이라는 것이 조선총독부나 일본인 농업자들에 의해 밖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만 하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음을 아울러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요컨대 일제시대에는 산미증식을 위해 적극적이었던 조선총독부의 각종 장려정책과 일본인들의 새로운 농법의 도입이나 수리조합의 결성 등에 영향을 받아 조선인들의 농법도 발전하고 수리시설도 개선되는 등의 긍정적 영향도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또 조선은 19세기에 국가기능이 약화되면서 농업기반시설의  확충은 정지되고 기존시설이 붕괴되어 갔지만, 보를 중심으로 민간에 의한 수리시설 확충 노력은 계속 이어져 왔으며, 따라서 적절한 행정적 기능이 복구된다면 자체적 역량으로 충분히 발전할 수 있었던 측면도 명백히 해 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표8> 제언과 보의 개소 및 몽리면적 (면적 단위 : 정보)

 
 제언
 보
 
개소
 면적
 개소
 면적
 
1808
 3,685
 (168)
 ‐
 2,265
 
 ‐
 
1916
 6,384
 (2,987)
 ‐
 20,707
 (5,276)
 ‐
 
1925
 6,662
 
 114,634
 58,456
 
 439,284
 
1930
 6,830
 
 170,162
 76,142
 
 500,217
 
<주> 괄호 속의 숫자는 수축이 필요한 것을 의미함.

<자료> 1808년 : 松本武祝, 『植民地期朝鮮の水利組合事業』, 未來社, 1991, 37, 43쪽.

1910년 : 持地六三郞, 「治水と水利」, 『朝鮮彙報』1916년 10월호, 11‐13쪽.

1925, 1930년 : 『朝鮮土地改良事業要覽』1930년판에서 작성




셋째로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의 급증과 관련하여 또 한가지 지적해 두어야 할 점이 있다. 즉 일본인 농업자들은 우월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조선의 토지 특히 비옥도가 높고 개발의 여지가 많은 농경지를 빠른 속도로 집적해 나갔는데, 그 속도가 워낙 빨라 농업개발에 의한 증산량의 거의 대부분을 일본인들이 전유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 논문은 그러한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한 전제 작업의 성격을 갖는다. 일본인 토지소유의 규모와 비중의 증가속도가 명백히 된다면, 농업생산의 증가속도와 대비해 봄으로써 개발의 이득이 민족별로 어떻게 분배되어 가는지 밝혀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표1> 일본인소유 경지의 전답별 면적과 그 구성비    (단위 : 정보, 회색칸은 추계치)


<주> 회색칸은 추계치임. 그 추계방법에 대해서는 다음 쪽의 <부표1의 추계방법> 참조.







<부표1의 추계방법>




● 1910-1917년간의 조선의 경지면적 및 전답면적에 대한 추계




1918-1926년의 선형회귀식에 의해 1910-1917년의 경지면적을 추계하고, 답면적과 전면적은 1918-1926년의 D/F 비율의 선형회귀식에 의해 추계한 비율을 적용하여 계산하였다. 조선의 전체 경지면적에서 답면적이 차지하는 비율(D/F)은 개간이나 간척 등에의한 開畓 혹은 開田에 의해서만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안정적이면서도, 장기적으로는 일정한 추세에 따라 변하고 있다.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이후의 즉1918-1942년간의 D/F 비율의추이는 다음 그림과 같이 1918-1926년간과 1927-1942년간의 두 구간으로 구분될 수 있다. 즉 1918-1926년간에는 연간 0.05% 포인트씩 그 비율이 증가하였고, 1927-1942년간에는 연간 0.2% 포인트씩 그 비율이 증가하였다. 제2기 산미증식계획이 시작되는 1926년이 변화의 기점이 되고 있다. 1910-1917년간에 1918-1926년간의 추세와 다른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 1916-1926년간의 일본인소유 경지면적 및 전답면적에 대한 추계

1916-1928년간의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은 다음의 다항식에 의거하여 추계하였다.




 




 




1916-1927년간의 일본인소유 답의 면적은 1915년과 1922년 및 1922년과 1928년의 A/C 비율을 비례적으로 조정하여 추계하고, 그 값을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에 곱하여 계산하였다.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에서 답면적이 차지하는 비중(A/C)은 D/F와는 달리 매매에 의해서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그 값의 변화여지가 훨씬 크다. 그러나 다음 표에서 보듯이,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이 급증한1910-1915년간에는 등락이 심하였지만, 그변화가 일단락되는 1915년 이후에는 A/C 값도 상당히 안정적인 양상으로 변하게 되었다. 1915, 1922, 1928년에는 63.8 - 65.0으로 13년간에 1.2% 포인트 정도 증가함에 그쳤던 것이다. 1916-1927년간의 전면적은 경지면적에서 답면적을 차감하여 계산하였다.




 
 1910
 1911
 1912
 1913
 1914
 1915
 1922
 1928
 
A/C
 61.4
 62.2
 63.3
 59.7
 60.3
 63.8
 64.0
 65.0
 





● 1929-1933년간의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에 대한 추계




1929-1933년간의 경지면적은 로지스틱 분포(logistic distribution)에 따라 변화하였을 것으로 가정하여, 1928년과 1934년의 경지면적의 차이가 매 연도별로 다음과 같이 분포하도록 조정하였다. 즉 1929년 7.5%, 1930년 20%, 1931년 40%, 1932년 20%, 1933년 7.5%. 이러한 분포는 1928년 이후의 다음 그림과 같은 경지가격의 변화추세를 감안하여 책정하였다.  중등전답의 평균 매매가격지수는 100 (1928) → 92 (1929) → 79 (1930) → 57 (1931)로 하락하였다.

 

<자료> 朝鮮殖産銀行, 『全鮮畓田賣買價格及收益調』, 제13회에서 작성.




추계결과는 다음의 표와 같다 (회색칸은 추계치). 단 1933-1934년간의 5%는 1934-1935년간의 증가추세를 감안하여 일부 조정한 것이다.

 




● 1934-1942년의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에 대한 추계




1934-1939년 및 1942년의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은 『朝鮮稅務統計書』의 '납세의무자 면적별 인원표에서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면적은 전답 이외의 택지, 지소, 잡종지가 포함되어 있어 경지면적보다 약간 많다. 각 연도별로 『朝鮮總督府 統計年報』의 경지면적과 『朝鮮稅務統計書』의 총면적 사이의 차이를 고려하여 아래 표와 같이 이 면적을 수정하였다.




 




1940-1914년간의 경지면적은 보간법에 의해 추계함.

1934-1942년의 전면적은 1934년의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에서 일본인소유 전면적의  비율을 계산하여 그것이 1942년까지 지속되었을 것으로 가정하여 추계함.




● 1934-1942년의 일본인소유 전답면적에 대한 추계




앞에서 보았듯이 1927-1942년간의 D/F의 값은 매우 안정적으로 매년 0.2256% 포인트씩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의 경지면적이 증가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 다시 답의 비중이 계속 증가하였기 때문에, A/C 값의 증가폭은 D/F 값의 증가폭을 상회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수 없어 여기서는 단순히 D/F와 같은 증가폭으로 증가하였다고 가정하기로 한다. A/C 값을 알게 되면,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에 그것을 곱하여 답면적을 계산할 수 있고, 또 전면적도 계산할 수 있다.




<부표2> 경지와 관련된 조선총독부의 각종 통계  (면적단위 : 정보)

 
 민유과세지
 기타의 비중

(B/C)
 경지면적

(D)
 지세납세자 소유지면적

(E)
 비율

(E/D)
 
전답계

(A)
 기타

(B)
 소계

(C)
 
1918
 4,253,995
 167,526
 4,421,521
 3.8%
 4,342,091
  
  
 
1919
 4,230,156
 167,005
 4,397,161
 3.8%
 4,324,679
  
  
 
1920
 4,209,639
 166,460
 4,376,099
 3.8%
 4,322,035
  
  
 
1921
 4,214,907
 166,395
 4,381,302
 3.8%
 4,322,490
  
  
 
1922
 4,205,583
 166,771
 4,372,354
 3.8%
 4,317,318
  
  
 
1923
 4,204,123
 166,722
 4,370,845
 3.8%
 4,320,864
  
  
 
1924
 4,213,047
 166,967
 4,380,014
 3.8%
 4,322,205
  
  
 
1925
 4,219,203
 166,429
 4,385,632
 3.8%
 4,348,355
  
  
 
1926
 4,250,604
 166,209
 4,416,813
 3.8%
 4,378,956
  
  
 
1927
 4,280,049
 166,583
 4,446,632
 3.7%
 4,387,727
  
  
 
1928
 4,278,591
 166,305
 4,444,896
 3.7%
 4,391,395
  
  
 
1929
 4,292,901
 169,352
 4,462,253
 3.8%
 4,392,116
 4,462,227
 101.6%
 
1930
 4,310,587
 169,509
 4,480,096
 3.8%
 4,388,664
 4,480,090
 102.1%
 
1931
 4,332,368
 169,742
 4,502,110
 3.8%
 4,384,510
 4,502,103
 102.7%
 
1932
 4,343,353
 171,513
 4,514,866
 3.8%
 4,390,443
 4,514,860
 102.8%
 
1933
 4,366,141
 170,373
 4,536,514
 3.8%
 4,411,804
 4,536,507
 102.8%
 
1934
 4,376,167
 169,421
 4,545,588
 3.7%
 4,431,483
 4,460,959
 100.7%
 
1935
 4,381,880
 169,751
 4,551,631
 3.7%
 4,432,279
 4,459,166
 100.6%
 
1936
 4,361,922
 169,840
 4,531,762
 3.7%
 4,426,770
 4,434,556
 100.2%
 
1937
 4,367,568
 170,251
 4,537,819
 3.8%
 4,427,169
 4,438,244
 100.3%
 
1938
 4,375,174
 170,724
 4,545,898
 3.8%
 4,436,825
 4,445,460
 100.2%
 
1939
 4,383,930
 172,026
 4,555,956
 3.8%
 4,448,373
 4,453,543
 100.1%
 
1940
 4,383,778
 172,045
 4,555,823
 3.8%
 4,437,179
 4,452,499
 100.3%
 
1941
 4,382,879
 175,312
 4,558,191
 3.8%
 4,404,607
 4,455,924
 101.2%
 
1942
 4,385,588
 177,466
 4,563,054
 3.9%
 4,396,003
 4,471,250
 101.7%
 
<주> 민유과세지의 ‘기타’에는 垈地, 池沼, 雜種地, 社寺地가 포함됨.

<자료> 『朝鮮總督府 統計年報』, 1930, 1935, 1942년판 및 『朝鮮稅務統計書』 1934, 1938, 1942년판에서 작성.

<부도1> 조선토지개량사업지 일람도 (1931년 현재)

 

○ 수리조합에 의한 토지개량사업지 (191개소)

● 수리조합에 의하지 않는 토지개량사업지 (286개소)




<자료> 『朝鮮土地改良事業要覽』1931판에서 재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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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슷한 주장으로서는 "朝鮮 全土의 약 6할2푼은 일본금융자본가에게 점유되어 있다"는 지적도 있다. 三上英雄, 『民族問題』, 74쪽 (李如星 金世鎔 공저, 『數字朝鮮硏究』제1집, 세광사, 1931, 10쪽에서 재인용). 아무리 늘려 잡아 보더라도 1930년경에 일본인이 조선의 토지의 62%를 소유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것은 아마 조선의 토지 중 62%가 금융기관에 저당 잡혀 있다는 의미였을 것으로 해석된다.




2 박섭에 의한 1910-1917년의 재배면적 추계는 1918년의 작부면적에서 1919-25년 사이의 증가율인 0.35%를 누적적으로 할인하여 얻어진 것이다. 그 이유로서 두가지를 들고 있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1915-18년이 미가의 상승기였다는 점이었다 (박섭, 「식민지기 미곡 생산량 통계의 수정에 대하여」,『經濟學硏究』(韓國經濟學會) 제44집 제1호, 1996, 94쪽). 그러나 이 주장은 1917년을 제외하면 위의 그림과 잘 맞지 않는다. 따라서 박섭의 추계 중에서 이 부분은 아직도 불완전하다고 판단된다.




3 병탄 이전의 일본인들의 토지소유에 대해서는 정연태의 연구가 자세하다. 그는 일본인 소유의 농지면적이 1906년 6월에 8,104정보, 1909년 6월에 42,880정보였다고 하였다. 鄭然泰, 『日帝의 韓國 農地政策(1905~1945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문학 박사학위논문, 1994, 58쪽.




4 자료에서는 농사경영의 목적이 조림으로 되어 있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 경우의 토지는 임야일 것이다. 즉 전답 이외에 임야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08년의 경우에는 '일본인 중요 농사경영자 중 중요한 자'에서 경지구성의 내역을 알 수 있다. (農商務省農林局, 『朝鮮農業要覽』, 1910, 25-26쪽 [농촌경제연구원, 『농지개혁시 피분배지주 및 일제하 대지주 명부』, 1985, 217쪽]). 단 이 자료의 경지면적(전답) 합계는 22,919 정보로 1910년의 69,312 정보의 1/3 정도에 불과하다. 제목 그대로 중요한 자만 적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5 『朝鮮總督府 統計年報』(1910-1915년판)의 '일본인 농사경영자'표에 수록되어 있다.




6 『朝鮮に於ける內地人』이라는 자료에도 1922년말 현재 일본인소유의 답면적이 90,394 정보라는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도별, 전답별로 『朝鮮の農業』보다는훨씬 상세한 통계가 주어지고있는데, 동양척식회사 소유지는 집계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 통계에 동양척식회사 소유지를 합하면, 『朝鮮の農業』에서 나오는 면적과 같아진다. 朝鮮總督府, 『朝鮮に於ける內地人』, 1924, 47-48쪽.




7 『朝鮮稅務』라는 책에도 비슷한 종류의 자료가 수록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1912년판과 1913년판을 보면, '면적별 인원표'는 없고 '세액별 인원표'만 있으며, 민족별 면적에 대한 통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세납세의무자 면적별 인원표의 자료 성격에 대해서는 장시원의 지적이 상세하다. 張矢遠, 『日帝下 大地主의 存在形態에 관한 硏究』, 서울대학교 경제학 박사학위논문, 1989, 53-57쪽 참조. 『朝鮮稅務統計書』입수에 도움을 준 小樽商科大學의 今西一 교수와 고려대학교의 李憲昶 교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8 조선총독부 조사자료목록을 보면, 지세납세의무자 면적별인원표는 조선총독부의 보고례('報告例 乙 第105號')에 따라 경성, 광주, 대구, 평양, 함흥의 각 세무감독국에서 조사하여 조선총독부가 취합하게 되어 있고, 1943년12월말일 현재의 조사는 '원고'와 '공표'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공표되었는지 혹은 그냥 원고상태로 끝나 버렸는지는 불분명하다. 朝鮮總督府 官房調査課, 『朝鮮總督府調査資料目錄』, 1944년판, 26쪽.




9 앞으로 이 논문에서는 지세부과의 대상이 되는 여러 토지 중에서 특히 전과 답을 합한 것을 耕地라고 부르기로 한다.




10 淺田喬二도 1922년과 1928년에는 동양척식㈜의 소유토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淺田喬二, 『日本帝國主舊植民地地主制』, 御水書房, 1968, 78쪽. 단 조선총독부의 경지통계는 1922년말의 것이고, 동척 소유지에 대한 통계는 1923년 3월말의 것이다.




11 『殖銀調査月報』에는 1935년 현재 67개소의 불량수리조합(정리조합)의 명단이 나온다. 이 명단에 올라있는 조합들을 『朝鮮土地改良事業要覽』1935년판의 여러 다른 지표들과 서로 비교해 보면, 설립시기가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석출된다. 설립시기가 1925-1930년간에 있는 조합들이 불량화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시기보다 더 이전에 설립된 조합은 차입금의 상당 부분을 이미 상환했고, 1930년대에 들어서서 설립된 조합은 아직 본격적인 상환이 시작되지 않아 채무에 대한 부담이 작았던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朝鮮殖産銀行調査部, 『殖銀調査月報』, 제22호(1940년3월호), 15-19쪽.




12 『殖銀調査月報』, 제22호(1940년3월호), 15‐19쪽 참조.




13 淺田喬二, 앞의 책, 82쪽.




14 淺田喬二, 같은 책, 80쪽. 30정보 이상 일본인지주의 경우, 보유지의 65.6%(1922년), 67.4%(1925년), 71.9%(1929년), 65.6%(1931년)가 전남북과 황해도 3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15 1930년의 경우, 전북의 일본인지주 소유지의 54%가 이들 3개군에 소재하고 있었다. 松本武祝, 『植民地權力と朝鮮農民』, 社會評論社, 1998, 112쪽.




16 東畑精一, 大川一司, 앞의 책, 369쪽.




17 이영훈 등,『近代朝鮮水利組合硏究』, 일조각, 1992,43쪽.




18 서울은 30정보이상, 나머지는 20정보이상의 지주에 대한 남한만의 자료임.




19 한국농촌경제연구원, 『農地改革時 被分配地主 및 日帝下 大地主 名簿』, 1985.12., 자료 II‐2, II‐4, II‐5, II‐6, II‐8에서 계산. 단 전남의 경우는 50정보 이상의 지주에 대한 조사임.




20 淺田喬二는 병탄 이전의 일본인의 지주화 과정이 주로 기간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淺田喬二, 앞의 책, 69쪽. 기간지의 매입을 통한 토지소유를 확대는 일본인토지소유 확대의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21 1808‐1916년간에 평안도의 제언수가 5개소에서 2,596개소로 급증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빼고 나면 나머지는 별로 증가가 없었다고 한다. 松本武祝,『植民地期朝水利組合事業』, 未來社, 1991, 43쪽.




22전북지역에서 일찍부터 대규모의 수리조합이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 이래로 이 지역에 많은 수리시설이 존재해 왔기 때문이었다. 병탄 이전에 전북지역에 존재하던 대규모 수리시설로서는 벽골제, 납제, 만석제, 황등제 등이 있었고, 황등제 주변에는 犢走項水路가 있었다. 임익수리조합은 황등제를, 전익수리조합은 재래식 보인 犢走項水路를 근대식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이리시, <이리시사>, 1989, 648쪽. 松本武祝은 1920년대와는 달리 1910년대의 수리정책을 제언과 보의 수축으로 특징짓고 있는데, 이러한 수축은 그 이전에 이미 상당한 시설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松本武祝, 같은 책, 제1장, 제1‐2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