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4-12 17:24
일제의 조선 토지조사사업 연구동향과 시론적 검토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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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 연구동향과 시론적 검토




왕 현 종 (2003.8.12)1)

1. 서론

2.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시기별 연구동향

  1) 일제하 ‘사업’의 평가와 농촌사회성질논쟁

  2) 해방이후 ‘사업’의 식민지성 비판과 민족주의적 논리

  3) 1980년대 중반 이후 근대적 토지제도 수립과 ‘사업’의 재평가

3. 조선토지조사사업 연구의 주제별 쟁점과 과제

  1) ‘사업’의 준비와 소유권 조사 방침

  2) 토지조사의 기초작업 : 결수연명부와 과세지견취도의 작성

  3) ‘사업’의 시행과정과 토지소유권 법인 

  4) 일제의 재정정책과 근대적 조세제도 수립

4. 조선토지조사사업 연구의 시론적 과제

  1) 토지조사의 원칙 : ‘신고주의’인가, ‘강제조사주의’인가

  2) 토지소유권의 실체 : ‘수조권적 토지지배’ 해체인가,

  3) 토지조사사업의 차이 : ‘사업’의 근대성과 식민지성

5. 결론
 





1. 서 론




1910년 일본제국주의는 식민지 조선의 경제구조 형성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토지조사사업’(이하 ‘사업’으로 약칭함)을 실시하였다. 이 ‘사업’의 성격과 평가에 대해서는 이미 사업초기부터 제기되고 있으나, 본격적으로는 1930년대 朴文圭, 印貞植, 朴文秉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들은 ‘사업’이후 근대적 토지소유제의 도입과 농민층 몰락 현상의 본질을 둘러싸고 일련의 논쟁을 벌였다. 

해방 이후, 혹은 1960년대 이후 일제의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민족주의적 비판이 제기되면서, 李在茂, 金容燮 등은 일제의 식민지 토지수탈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구체적인 연구성과로서 田中愼一, 宮嶋博史, 愼鏞廈 등에 의해 일제 식민정책과 토지침탈의 실체가 규명되었다. 이 시기 주된 연구는 조선사회의 내재적인 발전을 억압하고 일제의 토지수탈과 식민지정책이 감행되었음을 밝히었다.

한편 1980년대 중반이후에는 기왕의 문제의식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실증적인 연구가 제기되었다. 특히 裵英淳, 趙錫坤의 김해군 사례연구, 宮嶋博史의 토지조사사업사의 전반적인 흐름에 관한 연구 등이 주목할 만하다. 이들의 연구는 종래 토지수탈의 대명사로 거론되었던 지주의 신고주의를 실증적으로 논박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이래 사적 토지소유권의 성장을 기반으로 하여 ‘사업’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였다. 이어 1990년대 중반이후 최원규, 정연태 등 국사학자들에 의해 일제의 침탈법제의 수립과 농정책의 변화를 추적하였으며, 李榮薰, 趙錫坤 등 경제사학자들에 의해 한말과 일제하, 그리고 해방이후까지 토지소유제의 변화에 대해 거시적인 실증작업이 수행되었다.1)

일제의 ‘사업’에 관한 최근 연구동향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실증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하는 거질의 연구업적들이 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2) 또한 일련의 논평형식의 논쟁을 통해 종래 ‘사업’에 관한 기존의 통념이나 잘못된 개념들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근대적 토지소유권의 개념이나 자본주의와 소농민경영과의 관련성을 재해석한 예가 그것이다. 반면에 최근 제기된 논점에 국한하여 다각도의 논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존 입장의 차이를 미리 전제하거나 세부적인 차별성에 치우쳐서 비판하는 경향도 있었다. 

여기에서는 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 성과와 과제에 대하여 시기별, 주제별 연구동향을 소개하면서 주로 ‘사업’의 추진과정과 근대적 토지제도의 성격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려고 한다. 특히 1930년대 중반과 90년대 후반에 벌어진 논쟁점의 차이와 유사성을 비교해 본다든지, ‘사업’의 연구상 주요 쟁점을 4개의 주제로 나누어 검토해 보려고 한다. 즉, ‘사업’의 준비와 방침, 기초작업으로서 장부체계의 변화, 토지조사의 시행과 토지소유권의 법인, 재정정책과 근대적 조세제도의 수립 등이다.

또한 지금까지 제기된 연구과제 중에서 비교적 핵심적인 논제로 간주되는 세 가지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토지조사의 원칙에 대해 ‘신고주의’인가 아니면 ‘강제조사주의’인가, 둘째, 근대적 토지소유권의 실체와 더불어, 이전의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해체’의 의미는 무엇인가, 셋째, 대한제국의 양전․지계사업과 비교하여 ‘사업’의 근대성과 식민지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다.3) 여기서 다루어지는 연구과제는 앞으로 실증적인 분석이 뒤따라야 하지만, 일단 문제제기적인 차원에서 시론적인 논단에 한정된 검토라고 하겠다.




2.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시기별 연구동향

 1) 일제하 ‘사업’의 평가와 농촌사회성질논쟁




일본제국주의가 1910년대 실시한 소위 조선의 ‘사업’은 조선에 식민지적 경제구조의 구축을 위한 기초작업의 하나로서 당시 농촌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었다.

이 ‘사업’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대개 1930년대에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4) 당시 조선의 연구자, 혹은 사회운동가들은 일제의 사업추진 당국자들이 자신만만하게 공표했던 식민지 시혜론과는 입장이 달랐다. 그렇지만 이들은 대체로 조선사회에 대한 정체론적 시각을 전제하였는데, 조선사회 “내부로부터는 토지조사사업을 수행할 내적 생산력의 발전은 없었고, 자력으로 봉건적 토지소유관계를 해체할 단계에 나가지 못했다”고 규정하였다. 반면에 일제의 ‘사업’은 봉건적 속박으로부터 조선사회를 해방시킬 수 있는 진보적 내용을 지닌 것으로 평가하는 반면, 식민지 시기의 조선사회가 반농노적 생산방식을 답습하였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내용을 결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1930년대 중반 주로 박문규, 인정식, 박문병, 이청원 등의 논자에 의해 진행된 농촌사회성질논쟁에서 제기되었다.5)

박문규(1933)는 사업의 의의에 대하여 “농촌사회의 새로운 계급분화의 기점으로서 토지사유제도의 확립, 토지조사사업의 특질 = 농민의 전통적 토지점유권으로부터의 분리, 분리된 농민의 반봉건적 영세소작농으로의 전화 및 반봉건적인 영세토지소유의 창출, 총괄해서 토지영유의 근대적 성질과 봉건사회에서 그대로 답습된 영세농적 생산양식과의 본질적 모순을 기초로 하는 반봉건적인 영세농 및 소작관계의 정립”이라고 보았다.6) ‘사업’의 결과, 농업생산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법을 발달시키기 보다 오히려 반봉건적인 영세농과 소작관계를 발달시켰다고 보았다. 즉,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와 봉건적 수공업적 생산력의 대립을 조선농촌의 본질적 모순으로 보고 있었다.

이에 반해서 인정식(1937)은 ‘사업’이 봉건적 소유관계를 근대적으로 가장한 데 불과한 것으로 비판하였다.7) 즉, 토지소유의 근대자본가적 소유관계, 영세농적 생산방식은 생산양식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다. 식민지화과정에서 조선의 농업은 봉건적 생산관계를 영구히 극복, 지양할 수 없게 되어 조선농촌사회의 봉건적 성질을 더욱 강화, 봉건성의 본질적 관계가 더욱 강고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박문규의 기존 견해는 양자의 상호보완성을 강조한 것인데, 이는 본래 정당한 이론적 코스에서 벗어난 반역사적 이론이라고 비판하였다.

당시 인정식은 3개의 유파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과학적 학파사이의 논쟁을 크게 두 개의 유파로 나누었다. 제1유파는 생산양식, 수취관계, 토지소유관계에서 봉건적=반농노적 영세농적 성질을 주장하였고, 제2유파는 농촌에서의 농업생산의 자본제적 전화를 필연적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논자인 朴文秉이었다. 그는 ‘농업에서 자본의 지배’이라는 개념이란 조선의 봉건적 생산양식 자체가 구래의 봉건적 생산양식 그대로가 아닌 자본에 의한 굴곡 변질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8) 이는 곧 제국주의 자본의 이중성으로서 보다 효율적인 식민지 초과이윤의 수탈을 위한 식민지 생산관계의 재편과정에서 비롯된 자본제적 요소와 봉건적 요소의 병존으로 보았다. 朴文秉은 유통부문에서 자본의 지배가 발생하고 있으며, 생산과정에서의 자본제적 양식이 일부 국지적이기는 하지만 이미 발생, 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9)

반면에 印貞植은 “토지조사사업에서 비롯된 농촌의 새로운 분화과정은 결코 농촌의 봉건적 생산관계를 완전히 또는 영구히 극복하여 지양할 수 없으며, 도리어 농촌의 새로운 분화와 봉건적 생산관계는 불가분의 상관관계를 형성하여 농촌의 봉건적 성질 그 자체를 일층 강화시킨다”고 보았다.10) 그는 조선 농촌은 내부적 생산력의 미발달로 자본주의화 과정이 불구화․기형화되고, 동시에 봉건적 성질이 더욱 강화되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印貞植은 일관되게 봉건성의 강화․유지라는 관점에서 조선 농업을 분석한 것에 반해, 朴文秉은 궁극적으로 농업에서도 자본주의 법칙이 지배 관철되어 나가는 것이 대세라는 관점에서 파악하였다.11)

사업 이후 근대적 토지소유관계의 성질에 대해서도 크게 대립된 견해로 나타났다. 朴文圭는 사업을 획기로 근대적 토지소유제도가 수립되었다고 보았는데, 이때 근대적 토지소유제도의 확립은 곧 근대법적 토지사유권의 확립, 일물일권주의의 확립과 같은 의미로 썼다. 이에 대하여 印貞植은 세가지 이유를 들어 비판하였다.12) 첫째, 朴文圭의 토지소유개념은 소유관계와 생산관계를 분리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토지소유관계는 생산관계를 규정하며, 생산관계의 법적 표현으로 고정화된다는 원론을 강조했다. 둘째, 朴文圭가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와 봉건적 수공업적 생산력=생산양식과의 대립,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간의 모순이 조선 농촌의 본질적 모순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생산력의 발전에 기초하지 않은 새로운 생산관계의 진전은 생각할 수 없다고 보았다. 셋째, 印貞植은 토지사유제도의 확립과 토지영유의 근대적 성질은 서로 다른 개념으로 17~18세기의 프랑스에서는 두 가지가 합치하여 성립되었으나, 외래자본의 요구에 의해 토지변혁이 수행된 조선에서는 병행될 수 없었으므로 분리하여 보아야 하는데, 朴文圭는 이를 혼동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13)

이처럼 근대적 토지소유개념에 대해 상호 대립적인 견해가 제기되었다. 印貞植은 자본-임금-이윤의 3분할제가 실현되어 자본주의적 지대론이 관철되는 토지소유로 보는 반면, 朴文圭․朴文秉은 생산자의 생산수단으로부터의 분리, 배타적인 일물일권의 확립, 토지의 상품화 등이 실현되는 토지소유관계로 설정하고 있다.14) 또한 농촌사회의 성격 파악과 관련하여 고율소작료를 유지하는 지주소작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으로 연결되었는데, 印貞植, 朴文圭는 이를 봉건성의 잔존으로 본 반면, 朴文秉은 생산자의 토지로부터의 분리를 강조하였다. 한편, 1930년대 중반 ‘사업’의 성격에 대해 특히 근대적 토지소유와 식민지 농업의 생산관계에서의 반봉건성에 대한 파악은 이후 1990년대 말까지도 논쟁이 거듭되는 가장 핵심적인 난제 중의 하나였다.15)




2) 해방이후 ‘사업’의 식민지성 비판과 민족주의적 논리




해방 이후, 1960년대이래 일제 식민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과 반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사업’에 관한 새로운 시각과 연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우선 李在茂(1955)가 ‘사업’의 실체를 본격적으로 해부한 논문을 제출하였다. 그는 ‘사업’에서 토지소유권의 확인이 ‘신고주의’라는 독특한 방법에 의해 행해졌음을 주목하고, 토지신고서와 결수연명부와의 관련성, 지주위원회의 실체, 토지소유권의 최종적인 확정이 재판에 의하지 않고 오로지 행정처분에 의해 행해졌다는 점, 대규모의 국유지의 강제적 창출 등을 강조하였다. 결론적으로 ‘사업’은 이조말기의 생산관계를 본질적으로 해체시키지 않고 일본국가가 최대 지주의 지위를 점하기 위해 거대 일본인대지주와 구래 이조사회의 양반=귀족관료를 매판지주로 확보하는 식민지지배체계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사업’의 식민지성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또한 田中愼一(1974a, 1974b)은 ‘사업’ 이전에 행해졌던 한국재정정리의 중요한 일환이었던 징세제도의 재편정책에 주목하여 징세제도의 개혁에 의한 농촌 계급배치의 변화, 토지소유관계의 변화를 규명하였다. 특히 제2차 결수연명부에 기초하여 ‘사업’의 토지소유권 법적 확인이 행해졌다는 점을 규명하여 사업의 직접적인 전사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지주위원회의 분석을 통해 조선봉건제하에서 생성되었던 부차적인 우크라트인 반봉건적 지주적 토지소유가 지배적인 우크라트로 확립되고, 이를 통하여 식민지지배권을 배경으로 하는 일본본국 지주제의 식민지적 이식․정착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1974b, 20쪽).

한편 한국학계에서 ‘사업’의 연구는 金容燮의 수탈을 위한 측량론(1969), 愼鏞廈의 ‘사업’의 전면적 비판논문(1977, 1982) 등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연구에는 기본적으로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을 비판하고 조선사회의 내재적 발전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었다. 그래서 한말 농민적 토지소유에의 지향을 주목하면서 구한국 정부의 지주적 개혁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의 ‘사업’이 지닌 단절적인 측면, 즉 식민지성을 부각시켰다. 

김용섭(1969)은 조선후기 이래 발전하여온 농민적 토지소유의 좌절 내지 부농적 경영이 좌절되는 계기를 ‘사업’에서 구하고자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일제가 ‘사업’을 통해 광무양전․지계사업에서 일단락된 토지소유관계를 토지조사를 통해 재확인하고, 그러한 가운데 소작제도 내의 근대적인 요소를 제거하면서 농민수탈을 위한 식민지 농업체제를 마련하였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실로 구래의 토지제도와 지세제도를 대폭 개정한 것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봉건적 농업체제를 그대로 온존하고 있었다....일제는 이와 같은 농촌의 재편성 또는 흡수과정을 통해서 식민지 한국으로부터의 수탈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가 있었다. 한국농촌은 희생되고 이러한 희생 위에서 제국주의 일본은 번영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은 일제의 그러한 수탈, 그러한 번영을 위한 기초공사인 것”이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사업’의 성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수탈을 위한 측량’이었다.16)

한편 신용하(1977, 1982)는 조선봉건사회말기부터 발전되어 온 토지사유제를 일제가 그들의 침략에 적합하도록 재확인하는 과정이 ‘사업’이었다고 주장하였다.17) 이 사업은 토지소유관계의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졌지만, 이것이 조선의 농업발전의 필요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의 하나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사업의 본질은 토지를 약탈하고 지세를 수탈하는 데에 있었던 만큼 조사사업의 실시과정에서 농민의 권리를 탁발하는 폭력성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토지의 측량과 신고․사정과정에서 ‘민족적․계급적 자의성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또 실시과정에서 조선후기 이래 내재적으로 발전해 오던 경작권, 개간권, 도지권, 입회권 등 농민의 각종 권리는 부정되고 지주의 사유권만 보장되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사업’으로 적지 않은 토지가 지주의 소유지로 둔갑되거나 국유지로 강제 편입되고 광대한 국유지가 무상으로 창출되었고, 그 일부가 국유지 불하방식으로 일본인 이민․상인․회사로 넘어갔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식민지 지주제가 발전되고 농민이 급속하게 몰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경향은 다른 비판론자들에 의해 후에 소위 ‘수탈론’으로 명명되었는데, 주요한 논리는 일제의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토지신고의 원칙으로 ‘신고주의’를 이용하여 불법적인 소유권 침탈이 자행되었으며, 그 결과 농민이 보유하고 있었던 관습상의 권리가 철폐되었고, 광대한 국유지가 창출되었다고 요약될 수 있다.18)

 3) 1980년대 중반 이후 근대적 토지제도 수립과 ‘사업’의 재평가




1980년대 중반까지도 ‘사업’에 관한 통설적인 이해는 대체로 ‘사업’의 수탈성 강조와 함께 내재적 발전을 강조한 민족주의적 해석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견해는 80년대 중반 경남 김해지방에서 ‘사업’의 원자료를 대거 이용한 연구성과가 발표됨으로써 실증적으로 비판받기 시작했다. 이는 조석곤(1986)과 배영순(1988)의 연구에서였다. 

조석곤(1986)은 토지신고에서 사정에 이르기까지의 토지소유권 정리과정을 김해군 녹산면의 사례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그는 이재무 이래 통설이었던 ‘신고주의에 의한 토지약탈성’에 대하여 중대한 반론을 제기하였다. 즉 첫째, 신고는 철저히 이루어졌고 지주총대의 구성원도 반드시 유력지주층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으며, 둘째, 분쟁지처리에서도 ‘사업’ 후기에는 민간인에게 환급되는 경향이 강하였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면밀하게 논증하였다.19)

배영순(1988)은 광무개혁에서 ‘사업’에 이르기까지 토지조사와 지세개정을 전반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일제의 ‘사업’이 토지소유권의 근대적 법인이라는 측면보다는 일본자본주의에 의한 조선 농업의 기구적 착취의 공간으로서 지주제를 체제적으로 확립시킬 필요에 의해서 추진되었다는 관점을 가졌다. 이러한 관점은 기존의 견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업’에 의한 소유권 조사와 정리의 원칙은 기존의 소유권을 그대로 근대법에 의해 확인해 가는 것이었고, 사용, 수익, 처분권의 삼권 통일적 권리개념을 소유권의 개념으로 해서 특히 처분권을 중심으로 정리해 가는 것이라고 파악했다. 그래서 일제의 ‘사업’에서의 소유권 사정은 현실의 소유를 소유로 현실의 지주를 지주로 인정해 나가는 것으로 기존의 소유관계의 변혁을 가할 필요도 없었다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고 평가하였다.20) 따라서 근대적 소유관계 성립의 획기로서 ‘사업’의 중심적 의의는 사적 토지소유관계의 변혁에 있지 않는다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반면에, ‘사업’의 중심적 의의는 구래의 결부제의 폐기를 통한 근대적 지세제도의 확립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근대적 소유권의 형성과 근대적 지세제도는 불가분의 것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사업’은 역사 연속적으로 보아 근대사회로 향한 조선후기 이래의 지주적 개혁에 속한다고 파악하였다.21)

조석곤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배영순의 김해군 사례 연구에서도 토지신고서가 결수연명부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토지분쟁은 예상보다 비중이 적었고, 소유권 분쟁의 대다수가 국유지 분쟁이었으며, 전체적으로 한 동리에 분쟁지가 한 필이 안될 정도로 분쟁이 거의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배영순의 기본관점은 일제하 사회성질논쟁에서 제기된 것처럼, 일제의 농업정책의 핵심을 지주제의 온존과 농민수탈이라는 식민지반봉건사회성질을 지적하였던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의 논쟁과는 달리 배영순은 김해군 토지조사의 실증적 연구를 기초로 하여 토지소유권 제도의 근대성을 크게 강조했다. 이는 종래 토지약탈의 수단으로서 신고주의를 해석한 ‘수탈론’의 입장을 일단 탈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배영순은 “토지조사 직전에 도달해 있었던 지주적 토지소유의 발전단계와 근대법적 소유권을 확립하려 한 토지조사사업과는 괴리를 보여주지 않는, 말하자면, 조선말기의 지주적 토지소유는 토지조사에서 그에 상응하는 형식으로서의 근대법적 확인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아도 좋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결론은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업’의 근대적 토지소유권의 법인이라는 논점을 보강해주는 사례로 인용되고 있다. 

한편, 宮嶋博史(1991)는 ‘사업’이 조선의 토지제도 발전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연구를 출발시켰다. ‘사업’에 의해 국가에 의한 토지파악방식이 조선시대의 그것과 어떻게 달라졌는가라는 점에 문제의 촛점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사업’을 조선시대 토지소유제도 발전과정의 최종 도달점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았다.22) 宮嶋博史의 연구시각과 내용은 첫째, 일제가 ‘사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토지제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사업’의 방침이 수정되어갔음을 구체적으로 추적하였다. 둘째, 토지와 관련된 장부체제를 분석하면서, 그것이 토지소유권제도의 발전을 일정 정도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그러한 변화가 토지대장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양안과 토지대장의 역사적 의의를 분명히 하였다. 셋째, 조선시대의 토지제도를 수조권분여에 기초한 국가의 토지지배로 규정하고, 이것이 최종적으로 ‘사업’에 의한 국․민유 구별에 의해 해체되었음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宮嶋博史의 연구에서 주목되는 점은 무엇보다도 ‘사업’의 입안 및 실시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23) 그래서 국유지조사는 ‘사업’에 의한 소유권 확정의 대전제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사업’의 정책이 입안되는 과정에서 1906년 부동산법 조사회,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 등의 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폈으며, ‘사업’의 추진과정에서 川上常郞의 󰡔土地調査綱要󰡕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주장했고, 실시과정에 대해서도 1910년 공포된 「토지조사법」과 2년후 「토지조사령」으로의 변화에서 사업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24)

그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사업’의 의의를 요약하였다.25) 첫째 조선에 있어서 근대적 토지소유제도와 지세제도를 확립한 것이었다.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해체됨으로써 토지에 대한 정치적 지배가 해체되었고, 지조수취에 내재된 정치적 속성도 해체됨으로써 근대적 지세제도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근대적 제도의 확립으로 토지의 상품화 및 자본전환이 현저하게 촉진되었고 지세수입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었으며, 이후의 제 산업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둘째, ‘사업’은 외래 권력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조선사회의 내재적 전개에 부응한 근대적 토지변혁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방대한 사료 검토를 통해 장부양식의 계기적 발전이라는 특성을 검출하였다. 그 내용은 “토지신고서가 깃기에 연원한 결수연명부에 의거하여 작성되었다”는 표현 속에 압축되어 있다.26) 셋째, 근대적 토지변혁으로서의 ‘사업’은 사회변동의 영향을 조절하고 완화시킬 통치기구가 없었다는 점에서 식민통치체제와 모순을 노정하는 기점이 되었다고 파악했다.

또한 1990년대 후반 경제사학계의 새로운 연구성과가 학계에 제출되었다. 1997년 김홍식을 비롯하여 宮嶋博史, 이영훈, 박석두, 조석곤, 김재호 등 6인의 공동연구인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는 다년간에 걸친 공동연구의 성과였다. 여기에서는 ‘사업’의 역사적 의의를 근대적 토지소유제도의 성립에서 찾고, ‘사업’의 수탈성을 강조하는 기존의 통설을 근본적으로 비판한다는 문제의식을 구체화시켰다.27)

이 책의 결론은, 첫째, ‘사업’은 전국적 범위에서 인민의 사적 소유를 ‘소유자’라는 근대적 형식으로 법인하고 그에 상응하는 증명제도를 구비하였으며, 나아가 구래의 결부제를 폐지하고 근대적 토지소유를 성립시킨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근대적 토지소유는 그 생산관계나 경영형태에서 이론적으로 표준화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며, 오히려 세계사적으로는 제도와 형식에서 보편화될 수 있는 역사적 범주이라는 것이다. ‘사업’은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성숙해온 인민의 사실상의 사적 소유를 전제하였다는 점에서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과정과 연속성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에 대한 근대적인 법인의 형식․제도를 도입하였다는 점에서 단절성도 갖는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사업’의 과정에서 농민의 토지와 관습적 권리가 폭력적으로 수탈되는 국면이 국책적으로 조장되거나 실태적으로 관철된 것은 없었다고 하였다. ‘사업’ 이전에 이미 인민의 사실상의 사적 소유가 상당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고주의는 오히려 소유자를 파악하는 효율적인 발상이었다. 다만, 전국적 범위로 볼 때는 작았지만, 구래의 궁방전과 역둔토 등에서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대부분 형식적으로는 왕실과 국가의 소유지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인민의 사실상의 소유지였다는 유토 자체의 특성 때문이었다. 일제는 이들 토지에서의 격렬한 분쟁에 직면하여, 또한 그 분쟁의 유래에 관한 이해가 가능해짐에 따라서 분쟁지의 상당 부분을 민유지로 인정하였으며, 나아가 ‘사업’ 종료 이후 국유지를 유상으로 불하함으로써 분쟁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긍정적으로 이해하였다.28)

이렇게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후반까지 이루어진 ‘사업’의 실증적 연구는 구체적인 성과와 새로운 논점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사업’에 대한 기본시각과 관련하여 첨예한 논란으로 비화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의 결과적 인정, 혹은 긍정적 이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주로 일제의 식민지지배에 대한 기본이해와 방법론적인 문제를 집중적으로 비판하였다.29) 그 이유는 근대적인 토지소유제도․지세제도를 확립하는 것과 동시에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작업이었던 ‘사업’을 통일적으로 이해하지 못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宮嶋博史와 같은 연구자들은 후자의 관점을 소홀히 취급하면서 근대사회의 수립과 발전을 위한 출발로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판근대화론’이나 ‘또 하나의 식민주의 역사인식’이라고 비판받았다.30)

이후 경제사학의 공동연구의 성과도 경제사학계 내에서 근대적 토지소유권과 지주제에 관한 개념과 실체에 대해 상호비판이 이루어졌으며, 곧이어 역사학계를 포함하여 ‘사업’의 총체적 인식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행해졌다.31)




3. 조선토지조사사업 연구의 주제별 쟁점과 과제

1) ‘사업’의 준비와 소유권 조사 방침




일제는 이미 통감부시기부터 조선의 토지조사에 대한 일련의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우선 일본은 외국인의 토지소유권을 합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1904년에 대한제국의 양전․지계사업을 중단시켰다.32)

통감부초기 일제가 추진한 토지소유권에 관한 일련의 법제는 아직 완전한 의미의 소유권을 보장하는 법적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토지에 관한 모든 물권을 포괄하지 못했으며, 증명 자체가 제3자에 대한 대항권을 가지지 못하였다. 토지의 절대면적이나 위치 등도 불명확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결국 소유권을 절대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등기제도가 수립되기 위해서는 전국의 모든 토지에 대한 일률적인 기준에 의한 소유권 조사가 선행되어야 했다. 그것은 또한 일본의 금융자본이 진출하는 데 가장 필수불가결한 토대가 되고 있었다. 이후 일제는 1906년에 ‘토지가옥 증명규칙’을 제정 공포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1908년에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과 ‘토지가옥소유권증명시행세칙’ 등 일련의 임시법규를 제정 공포하였다. 이는 그때까지 불법적이었던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합법화시켰다는 점에 의의가 있었다. 이 시기 토지법제의 제정과정에 대해서는 宮嶋博史(1991), 최원규(1994), 정연태(1997) 등의 연구가 있다.

이 시기 토지법제의 수립과 토지조사의 방침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논란이 제기되고 있었다. 처음으로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에 주목한 宮嶋博史(1991)는 당시 통감 伊藤博文의 의향과 한국측 정부대신의 갈등에 주목했다. 특히 伊藤博文은 토지소유자에게 地券을 교부하여 재산권을 견고히 해 줄 법률을 제정하기로 하는 방침을 세웠다고 한다. 이때 한국측 대신들은 종래 광무양전이 있었음으로 먼저 측량을 하고, 나중에 법안을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伊藤博文은 항구적인 법률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면밀한 조사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동경제국대학 법과 교수인 梅謙次郞(1860~1910)을 초빙하였다. 梅謙次郞은 부동산에 관한 연혁과 관습을 조사하기 위한 부동산법조사회를 만들어 종래 한국의 토지에 관한 관습조사 등 토지법제의 기초작업을 수행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 시기 근대적 토지법제의 제정과정에서 민족적․계급적 갈등을 구체적으로 검토한 것은 최원규(1994)였다. 그는 1906년 5월 이른바 부동산 거래질서를 개혁하기 위한 ‘不動産權所關法’의 제정문제에 주목했다. 당시 大韓自强會가 주장한 부동산 증명제도의 도입을 요청하는 건의안에 대응하여, 정부에서는 ‘부동산권소관법’을 제정하여 모든 부동산의 제권리 변동에 대한 국가관리체제를 마련한다는 취지하에 일종의 부동산등기제도를 수립하려는 것이라고 파악했다.33)

이에 대해 梅謙次郞은 부동산등기제도의 기본원칙인 제3자 대항권을 명확히하였으며, 賃租權을 제외하고 소유권과 전당권 변동만을 등기할 의무사항으로 규정하는 등 지주의 소유권을 위주로 하는 법제를 구상하였다. 이에 1906년 10월 <법률 제6호 : 토지 건물의 매매 교환 양여 전당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것으로 보았다. 이는 토지소유의 주요한 근거로서 契券을 채택하고, 등기제도, 등기부작성과 열람제도를 채택한 점과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허가하지 않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토지조사가 전면적으로 실시되고 소유권을 査定한 뒤가 아니면 시행되기 어려운 조건에 있었다.

그런데도 이러한 <법률 6호>도 제대로 시행되기도 전에 1906년 10월 <土地家屋證明規則>을 칙령 제65호로 공포하였다. 이는 등기제도를 배제하고 증명제도를 채택한 것으로 “단순한 형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외국인의 소유토지의 합법화와 토지거래 허용조처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이라고 파악했다(최원규, 1994, 163쪽). 이는 대한제국시기에 불법적이었던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공식적으로 증명하여 일본의 토지점유를 자유롭게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하반기부터 급증하기 시작하여 1910년 한해만 해도 소유권보존증명을 제외하고 6만건이나 되었으며, 1911년에는 12만건, 금액으로 3천 6백만원을 넘어서 토지평균가로 계산하면 18만 정보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이 증명을 통해서 토지소유권을 확보하였다. 그 중에서도 한성부를 비롯한 시가지와 삼남 일대의 농지에서 토지확보가 집중적으로 나타났다.34) 따라서 일본인의 토지소유는 개항장이나 개시장인 서울이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1910년 토지조사법의 제정을 둘러싼 일제의 ‘사업’ 결정의 의도와 목표에 대해서는 아직 전반적으로 해명되어 있지 않다.35) 실제 1910년 1월 탁지부의 「한국토지조사계획서」에 의하면, 1천 412만원을 들여 앞으로 7년 8개월에 걸쳐 270만 5천정보의 대지와 경지를 조사하고 지권을 교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36) 여기에도 구체적인 토지조사의 계획입안과정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이 없었는데, 宮嶋博史는 1909년 2월 대구재무감독국장이었던 川上常郞이 제기한 󰡔土地調査綱要󰡕를 부각시켜 설명했다.37) 이 책에서는 토지조사의 정치적 경제적 의의를 분명히 밝히고, 소유권확정방식으로 ‘신고주의’를 제시하였는데, 나중에 결정된 ‘사업’의 초기방침은 대체로 그의 주장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이다.38)

그렇지만 이 책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보면, 실제 ‘사업’의 실시과정에서 실현된 것도 많지만,39) 추후 시행과정에서 일정한 차이점도 나타나고 있었다. 즉 토지조사의 방침과 관련하여 이른바 지주의 ‘신고주의’라는 방식이 제시되기는 하였지만, 토지소유권의 확인 처분에 대한 기본원칙으로 제시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토지조사의 완성된 장부로서 「地籍調査簿」를 제시했는데, 이는 이후 ‘사업’의 「結數連名簿」에서 「土地臺帳」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장부체계와는 크게 달랐다. 물론 토지조사법제의 변화로 인하여 이후 등기제도의 수립으로 바뀌었지만, 이 책에서는 현재 토지증명규정을 폐지하고 地券發行을 통한 소유권 移轉의 公證制度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40) 따라서 이 책자가 물론 당시 토지조사법 제정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사업’의 장기적인 계획의 변화와 관련해서는 보다 적절한 자료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1910년 ‘토지조사법’에서 1912년 ‘토지조사령’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토지소유권제도가 지권제도에서 등기제도로 변화하였는데, 그러한 변화과정과 관련하여 토지조사의 방침이 어떻게 구상되고 있었는지를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일제의 ‘사업’의 실시목적과 구체적인 방침을 보다 포괄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일본제국 본국내 조선토지조사의 방침결정과정에 대한 집중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이미 1871년 일본의 지조개정에 이어 대만의 토지조사사업이 있었고, 이에 기초하여 ‘조선’에서 토지조사사업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전에 철저한 계획수립과 방식이 이미 전제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다만 기왕의 조선의 토지법제와 관습에 대한 조사가 늦어졌다는 사정이 작용했을 뿐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사업’의 계획 수립에 관한 일제 당국의 방침에 관한 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외국인 토지소유의 합법화와 임야조사사업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포함되지 않으면 토지소유의 약탈성에 대한 반비판으로서는 미흡한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2) 토지조사의 기초작업 : 결수연명부와 과세지견취도의 작성




일제는 ‘사업’을 실시하기 이전에 사전적인 조처로 이미 지세제도의 개혁을 위한 제반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황실재정 정리의 일환으로 광범한 국유지 창출과 소유권 분쟁 문제를 정리하였으며, 병행하여 징세제도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기존의 지세수취체계를 해체하고 중앙집중적인 재정운영체계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여기에 정밀한 지세부과규정과 운영체계를 마련하였는데, 대표적인 제도가 1907년부터 시작된 「結數連名簿」의 조제작업이었다.

1907년 7월 30일 일제는 13도의 세무감에게 전국에 걸쳐 통일적인 원칙에 의해 작부할 방침을 훈령하였다.41) 이 방침에 따르면 기존의 衿記 및 作夫 안에 일체의 虛文을 없애고 반드시 납세자의 성명을 기재토록 하였으며, 토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두락수, 日耕數 혹은 평수를 기재하도록 하였다. 또한 지목도 전과 답 이외에도 대지를 구별하게 하였다.

이후 地主에 대한 파악방식이 점차 강화되면서 결수연명부는 지세대장으로서만이 아니라 토지에 관한 기본장부로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1911년에 충북과 충남 일부지역에서 「課稅地見取圖」가 작성됨으로써 과세 토지의 개략적인 위치와 형태를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田中愼一(1974b)은 결수연명부와 과세지견취도 작성에 처음으로 주목하였다. 그는 토지소유자인 지주의 신고과정에서 결수연명부의 중요성을 파악하였다. 그래서 “토지조사사업에 있어서 토지신고서는 결수연명부에 의거하여 조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제2차 결수연명부의 작성은 토지조사사업 본격사의 시점이고, 한국재정정리에 있어 「징세대장」정비과정과 조선토지조사사업의 본격적 전개과정을 연결시키는 것으로서 이 양 과정의 결절점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42)

이후 ‘사업’의 토지소유권 장부체계의 형성과정에서 결수연명부의 의미를 구체적인 분석한 것은 宮嶋博史(1991)였다. 그는 종래 결수연명부는 일필지 토지조사를 위한 기초자료로서 부적합한 장부로서 취급되어오다가 1911년과 1912년에 이르러 토지신고서의 기재사항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자료로서 결수연명부를 파악하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결수연명부와 토지신고서의 대조사업을 개시한 이유는 바로 1911년에서 1913년에 걸쳐 시행된 ‘과세지견취도의 試行的 作成=>전국적 규모의 과세지견취도의 작성=>과세지견취도와 연명부와의 대조=>연명부의 공부화’라는 일련의 사태 진전에 있다고 파악하였다.43)

1911년 충북과 충남 일부지역에서 과세지 견취도를 작성하였으며, 1912년 3월 이후 경기, 황해, 평남, 충남의 나머지, 전북, 전남, 경북, 경남 등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추진되었다. 이때에는 1911년에 충청남도 공주군 남부면 교촌리에서 작성된 과세지견취도와 그 개형도 및 조제순서설명도가 1912년 4월 각도에 배포되었다. 이에 따라 1913년 6월 󰡔조선총독부관보󰡕에 과세지견취도작성실적으로서 게재되었는데, 전국적으로 1400만필지에 지주수 266만여명으로 조사되었으며, 견취도 열람자수는 모두 57만 5512명으로 전체 지주수의 21.6%였다.44) 견취도의 열람이 저조했던 이유는 견취도의 작성이 단기간에 행해졌고, 공시의 기간이 짧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견취도는 토지조사부와 같은 토지소유권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측되고 있다.45)

그런데 일제가 1911년과 1912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과세지견취도의 작성을 서두른 이유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과세지견취도의 작성을 지세수취의 효율성을 제고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결수연명부와 대조하는 장부에 불과하다는 이해에 머무르고 있었다. 실제 당시 일제도 견취도 작성의 취지에 대해 “지세는 결수연명부에 의해 부과하지만, 조선에는 지도가 없어서 지위를 알 수 없고, 따라서 토지의 은루가 가능”하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과세지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46) 실제로 과세지견취도가 작성되면 그것을 결수연명부와 대조하여 누락된 과세지를 결수연명부에 등록하거나, 잘못 기재된 사항을 정정하였다.47)

이렇게 과세지견취도와 결수연명부와의 관계를 과세대상의 대조장부로서 파악하였기 때문에, 조석곤은 “과세지견취도는 그 작성과정의 졸속성으로 보아 항구적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작성된 것은 아니었다”고 보았다.48) 다만, 그는 1914년 지세령에 의한 대폭적인 지세인상이 가능하게 된 배경으로서 과세지견취도의 효용성을 지적하고 있다. 즉 지세액이 급증한 상황하에서 효율적인 징세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소유토지의 위치와 필지별 납세액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었고, 이것은 결수연명부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지만 뒤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과세지 견취도의 작성은 지세수취의 효율성 제고와는 별로 상관이 없으며, 도리어 토지조사사업에서 필수적으로 전제해야 하는 소유권자의 확인을 위한 일련의 장부체계 수립과 긴밀하게 관련된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토지조사사업의 준비조사 단계로서 토지신고서의 작성에 결수연명부와 과세지견취도가 필수적인 장부로서 위치지워졌던 것이다.




3) ‘사업’의 시행과정과 토지소유권의 법인




일제는 1910년 <토지조사법>을 발표하여 지권발행을 목표로 하는 토지조사를 시도하였다. 그렇지만 토지조사는 초기에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토지조사를 환영하지도 않고 비협조적이었던 반면, 일본인들은 자기의 소유권을 인정받으려고 협조적이었다. 이내 1912년에는 다시 지권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등기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때에는 조선민사령과 일본의 부동산등기법에 규정받는 <조선부동산등기령>의 실시를 예정하고 있었다. 이런 법제를 실시하기 위해서도 전국적으로 개별토지에 대한 정확한 조사측량, 그에 기초한 지적도 작성, 소유권사정 장부인 「토지대장」이 갖추어져야만 했다. 왜냐하면 등기법은 「토지대장」에 근거하여 「등기부」에 소유권자를 기재하고 그에게 제3자 대항권을 인정해 주는 제도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토지조사사업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토지신고서 작성과 토지조사의 전작업과정을 확정하는 일이었다. 토지신고서는 지주가 작성하여 임시토지조사국에 제출하였다. 토지신고서는 토지소유권 査定의 근간이 되는 서류였다. 임시토지조사국은 신고서를 기초로 조사위원을 파견하여, 개별필지에 대한 조사와 측량을 시도하였고, 이에 따라 토지소유권자를 확정하였다.

그런데 토지신고서의 작성원칙은 1910년 8월 29일에 공포된 ‘土地申告心得’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신고자규정으로 개별 토지소유자 이외에 사단, 재단 및 공공단체 등의 경우 관리인이 신고할 것, 둘째 소유권 분쟁 토지와 소송중인 토지는 진술서와 증빙서를 첨부할 것, 셋째 신고서는 1동리씩 한꺼번에 만들고, 연속토지는 1구역으로 할 것, 넷째 지목은 지방에서 통용하는 것으로 할 것, 다섯째 성명은 民籍과 일치할 것, 여섯째 신고서와 표항의 내용일치, 일곱째 관리인 또는 이해관계인이 신고할 경우 지주를 기입한다는 원칙 등이었다.49)

이렇게 전국적으로 토지신고서를 접수하고 있었지만, 바로 일필지 조사과정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임시토지조사국은 이때까지도 보다 구체적인 토지신고와 조사세칙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1913년 1월 17일 ‘土地申告心得’을 개정하였다. 주로 이전에 탁지부에서 작성한 결수연명부와의 연결관계를 고려하여 토지신고서를 작성하도록 하는 원칙을 세웠다.50) 이 조치는 1913년 결수연명부와 과세지견취도가 완결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결수연명부는 과세지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소유자 이동의 경우 증명관리의 토지가 있을 때만 변경할 수 있기 때문에 증명부와 일치할 수 있었다. 특히 1913년 3월 3일 준비조사를 할 때 토지신고서와 결수연명부를 대조하여 처리하도록 통첩을 내렸다. 또한 10월 1일부터 결수연명부가 증명부의 토지대장으로서 역할을 하면서 이전과 같이 토지신고서와 부군의 결수연명부와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권보존증명의 인증장부인 결수연명부와 대조하도록 하였다.51) 이에 따라 결수연명부는 토지신고서작성의 기본장부로서의 역할을 토지조사기간 내내 담당하게 되었다.

결국 1913년 6월 7일 ‘임시토지조사국 조사규정’을 공포하여 토지조사의 순서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확정하였다.52) 첫째 면동의 명칭, 강계의 조사와 토지신고서의 취합에 대한 사항이었다. 이는 동리별로 일정기간을 정하여 토지신고서를 지주총대가 수합하는 과정과 토지신고서 기재방식을 구체적으로 예시하였다. 둘째 지주, 지목, 강계조사에 관한 사항이었다. 셋째는 분쟁지, 소유권이 의심가는 토지, 무신고지의 재조사에 관한 사항과 지위등급 조사에 관한 사항이었다. 이러한 규정에 따라 토지조사와 측량을 완료한 이후의 사무처리는 ‘土地調査簿’와 지적도를 작성하고, 이를 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에 제출하여 사정사항에 대한 자문을 받아 사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어 ‘토지대장’을 작성하고 여기에 기초하여 ‘토지대장집계부’와 ‘지세명기장’을 조제하도록 하였다.

토지조사사업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시행된 것은 소유권 조사였다. 토지소유권 조사는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準備調査, 一筆地調査, 紛爭地調査 등이었다.

먼저 준비조사에서는 면․동․리의 명칭 및 경계를 조사하고, 지주가 신고하는 토지신고서를 거둬들였으며, 아울러 지방의 경제 및 관습을 조사하였다.53) 준비조사는 1910년 5월부터 시작하여 1916년 5월 외업반이 해산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때까지 수집된 토지신고서는 총 518만 1,652통이고, 필지수는 1,857만 3,731필이었다. 다음으로 일필지조사는 지주․경계․지목 및 지번조사 등 부분으로 나뉘어져 시행되었다. 지주조사는 민유지에 대해서는 토지신고서에, 국유지에 대해서는 국유지통지서에 기초하여 조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54)

地主 調査는 원칙적으로 ‘申告主義’를 채택하였다. 다만 동일한 토지에 대하여 2인이상의 권리주장자가 있는 경우 또는 단순한 1인의 권리주장자인 경우에도 權原이 의심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신고명의인을 지주로 인정하였다. 경계조사는 신고자를 통하여 그 토지의 주위에 標杭을 세워 소유자를 표시케 했다.55) 그밖에 전과 답, 대지 등을 구별하는 지목조사와 통일된 기준에 의거하여 재정리된 지번조사 등이 이어졌다. 이렇게 토지소유권을 확인하고 사정하는 작업은 ‘준비조사=>실지조사=>일필지측량=>사정과정’을 거쳤으나 대체로 준비조사단계에서 확정되었다.56)

분쟁지조사에서는 토지소유권에 대한 분쟁을 처리하고 결정하였다. 전국적으로 분쟁지로 조사된 것은 전체 토지조사필수 19,107,520필 중에서 33,937건, 99,445필을 차지하여 약 0.5%정도였다고 한다.57) 신고된 필지수에 비해서 분쟁지의 건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은 토지조사이전에 이미 토지소유자들의 자진 신고를 통하여 합법적으로 기존의 소유권자들이 대부분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고 하겠다. 다만 민유와 국유의 분쟁지, 특히 일제의 왕실재산정리 및 역둔토 정리에서의 분쟁이 강압적으로 해소되고 있었다는 사정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토지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제는 1911년 가을부터 지방제도 개혁사업에 착수하여 1913년 12월 29일 부․군폐합을 일단 완료하였다. 317개군을 220개군으로 폐합하였다. 이렇게 지방제도의 개편작업은 토지조사사업을 위한 정지작업이었으며, 면․동리의 강계확정은 단순한 구획조정이 아니라, 토지조사의 기초단위로 되며, 나아가 일제 강점통치의 기본단위로 확정되었다.58)

이와 같이 일제 ‘사업’의 기본 목적은 수많은 종류의 토지를 객관적으로 조사하고 토지소유권자를 법적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사업’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점은 토지소유자에 대한 조사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토지소유권의 사정작업이 정당하였는가 였다.

당시 토지소유권의 사정작업에는 査定, 裁決, 再審의 절차가 있었다. 사정의 기초 근거는 민유지에서는 지주가 제출한 토지신고서이며, 국유지에서는 해당관청에서 제출한 통지서였다.59) 조사원은 실지와 대조하여 기재사항에 이상이 없으면, 신고지주를 그대로 지주로 확정하였다. 소유권 사정에서는 거의 전부가 신고서대로 사정되었다. 만일 소유권의 분쟁이 생겼을 경우에는 이를 조사하였다. 분쟁지에 대한 조사가 끝나면 토지조사부와 지도를 작성하여 지방토지조사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사정작업을 종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초기에는 국유지의 대규모 창출을 목표로 하였음으로 대다수의 역둔토, 궁장토 등 분쟁지는 국유지로 편성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으나 최근에는 전체토지에 비하여 분쟁지에 대한 비중은 대단히 낮은 편이었다. 불복신청대상은 대개 소유권과 강계에 관한 사항이었다. 또한 분쟁지심사위원회의 심사에서도 민유로 환급된 토지가 있었다고 지적되고 있다.60) 

이렇게 재결처리를 거쳐서 토지조사사업은 최종적으로 각토지의 실면적, 지목, 지질, 종류, 위치, 지가, 기타 토지에 관한 권리가 표시되는 토지대장으로 기재되어 마감되었다. 토지조사로 확정된 소유권은 일제에 의해 이전의 소유와는 다른 ‘原始取得’한 소유로서 절대성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일제의 ‘사업’의 목적과 의도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농민들의 제권리를 배제하고 지주의 일물일권적인 배타적인 토지소유권을 위주로 근대적인 토지법제를 수립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조석곤, 1999).

그렇지만 일제의 ‘사업’의 결과와 토지소유권의 성격에 대해서는 현저한 견해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특히 사정으로 확정된 소유권은 사법재판소의 재판과는 달리 독립된 국가기관의 행정처분이면서도 절대성을 부여하였던 것이 문제였다(최원규, 1994, 309~310쪽). 또한 토지조사사업과 등기제도의 시행은 일본 금융자본의 통로를 제공시켜 일본인 토지침탈의 합법화를 초래하였다(최원규, 1994, 328~349쪽). 이는 1920년대 지주들의 활발한 토지겸병과 농촌사회내의 자작농 계층의 몰락, 지주 소작제의 모순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4) 일제의 재정정책과 근대적 조세제도 수립




일제는 통감부이래 일련의 지세증강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한 재정확대정책의 일환으로서도 ‘사업’의 의의가 있었다. 또한 ‘사업’을 통해서 지가에 의한 조세수취가 가능해짐으로써 근대적 지세제도의 확립을 거론할 수 있게 되었다.

지세제도의 근대적 개혁에 대한 의의를 처음으로 지적한 논자는 林炳潤(1971)이었다. 그는 신지세는 봉건적 제분담과 동일시할 수 없으며, 다만 현실과 괴리된 높은 법정지가가 책정되었고, 이에 따라 총독부의 재정수입 증대가 마련되었다고 보았다.

‘사업’의 지가조사는 단순한 지세 과세액의 증감문제가 아니고 과세체제의 변화와 관련된 것이었다(조석곤, 2001, 28쪽). 이러한 측면에서 배영순은 ‘사업’에서 지세개정의 중요성을 독특한 시각에서 강조하면서, 지세부과체제가 이전과 크게 달라졌음을 강조하였다. 즉, ‘사업’은 토지조사 보다 지세개정에서 사업의 본질을 찾을 수 있으며, ‘사업’에 의한 지세개정으로 총액제적 수취제도와 결가제가 폐지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강조했다. 다시 말하자면 “지세개정은 결가제를 전면 개편하고 토지 각 필당의 세액도 전면 재조정하면서 토지부담률을 일정하게 함으로써 상대적 형평을 기하고, 또 지주경영의 수익율을 균등하게 조정하면서 지세율을 결정한 것이었다”고 보았다(배영순, 2002(1988), 309쪽).

또한 ‘사업’의 평가와 관련하여 새롭게 도입된 지세제도의 지세부담 강화와 관해 새로운 문제제기가 있었다. 특히 지가의 1.3%의 세율이 결정된 배경에 대해서 지나친 세액의 증가로 인해 조선인의 반발을 고려하여 정치적으로 세율을 조정한 결과라고 해석되었다(宮嶋博史, 1983).

한편 이영호(2001)는 토지조사사업에서 지세제도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기존의 연구를 종합하여 새로운 평가를 시도하고 있었다. 세율은 재정독립계획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며(이영호, 2001, 416쪽)이며, 지세액의 인상률도 1905년이후 1917년까지 전체의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지세율이 일본에 비해 낮다는 주장도 양국간의 생산력 격차를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수치비교는 무의미하다고 보았다(이영호, 2001, 417~420쪽). 또한 과세표준으로서의 법정지가가 시가보다 높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토지상품화의 진전도가 높은 곳에서는 시가가 법정지가보다 높았지만, 통계수치가 보여주는 바는 “현실적으로는 시가가 오히려 저렴한 편”임을 강조하였다.61) 또 납세자의 부담지수는 곡가의 상승으로 그다지 높아지지 않았다는 지적에 대해 “정상적인 지세부담 이외에 지가에 붙는 부가세, 그리고 각종 부담금은 납세자층에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지세부담의 경감을 주장하는 논의에는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2)

이와 같이 ‘사업’의 성과로서 근대적 지세제도의 수립에 대해서는 이전의 봉건적인 조세제도로서 결총제의 폐지와 근대적 공평과세를 실현하였다는 견해(배영순, 1988 ; 宮嶋博史, 1991 ; 조석곤, 1995)에 대하여 재정정리과정에서 제시된 일제의 결총확대정책은 ‘사업’에서도 그대로 실현되어 과세지의 엄청난 확대를 보았다는 일제의 침략성을 강조하는 연구(이영호, 2001)로 나뉘어져 있다고 하겠다.







4.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연구의 시론적 과제

1) 토지조사의 원칙 : ‘신고주의’인가 ‘강제조사주의’인가




일제의 ‘사업’의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사업’이후 성립된 근대적 토지제도의 제도적․법적 형식의 완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980년대 중반이후 새로운 경향의 ‘사업’연구에서는 중세토지제도의 최종 도달점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며, 여기서 일지일주적 근대적 소유제가 법인된다는 관점을 제기하였다. 특히 조선사회 내부에 성장해왔던 사적 토지소유권에 대해 일제는 ‘신고주의’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그대로 확정하였다는 점을 중요시하였다.

일제의 ‘사업’에 대해 신고주의와 그것에 근거한 사정의 역사적 의의를 최초로 주목한 것은 李在茂(1955)였다. 그는 신고주의가 경작자 농민의 이익옹호라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부정적이었으며, 악의에 가득찬 식민지적 관료주의의 발로로 파악하였다(조석곤, 2003, 100쪽). 그렇지만 李在茂는 조선말기 토지보유관계가 극히 애매했다는 전제위에서 그 애매한 관계를 양반 지주계급이 이용하도록 의도적으로 신고주의가 채택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이전의 조선사회에서 사적 토지소유권의 성장에 대해서 거의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제의 ‘야만적인 토지약탈’과 식민지형 기생지주제의 확립, 그리고 특별한 식민지적 폭력적인 방법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신고주의’를 강조한 것이었다(이재무, 1955, 22~57쪽).

이렇게 일제의 토지수탈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일제가 ‘신고주의’를 이용하여 대규모적인 토지약탈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우선 조선인 토지소유자 중에서 토지신고를 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토지신고 절차를 몰랐거나, 절차를 알았다 하더라도 한자나 일어를 기재할 능력이 없었거나 아니면 일제에 대한 반감 때문에 신고자체를 일부러 거부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토지신고서의 제출과정에서도 지주총대가 자신의 소유지를 늘릴 목적으로 자신이나 자신의 이해관계인 명의로 거짓 신고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또한 일제의 토지약탈은 민간의 소유지 뿐만 아니라 국유지의 약탈, 특히 전국토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삼림의 약탈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수탈성을 강조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제가 사업에서 ‘신고주의’라는 기만적인 토지조사 방식을 이용하여 거대한 국유지를 폭력적으로 창출하여 반봉건적 토지소유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지배의 물적 기초를 확립했다는 견해로 귀결되었다(朴文圭, 印貞植, 李在茂, 愼鏞廈).

그런데 일제가 신고주의를 채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기존의 소유관계에 변형을 가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신고주의를 채택한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소유관계를 특별히 정리할 별도의 수순을 밟을 필요조차 없이 신고에 의해서도 현실의 소유권자를 확인해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원칙이었는지는 문제가 된다. 후자의 견해는 조선말기에 이미 기존의 소유관계가 명확하고 배타적 소유권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역사적 조건을 전제하고 있었다(배영순, 2002, 197쪽).

1980년대 후반에는 실증적인 차원에서 반론이 제기되었다. 우선 실제 토지신고서의 제출은 거의 대부분의 토지 소유자들에게서 이루어졌는데,  총 1,910만 1,989필 가운데, 무신고지는 9,355필로 전체의 0.05%에 불과했다.63) 신고되지 않은 토지는 전체 토지에서 대단히 적었을 뿐만 아니라 토지의 성격상 토지에 대한 과세가 두려워 소유권을 포기하였던 것으로서 무신고지의 존재는 결코 토지약탈의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토지신고서를 부당하게 작성하여 토지소유권을 빼앗는 일은 토지신고의 과정에서 토지신고서와 결수연명부를 일일이 대조하여 작성하였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경남 김해군의 사례분석을 통해 실증적으로 제기되었다(배영순, 1986 ; 조석곤, 2003(1986), 59~60쪽.). 김해군의 사례연구에서 지주총대의 경제적 지위가 보잘 것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중간의 이해관계가 작용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하였다(배영순, 2002(1988), 210~230쪽).

이러한 ‘신고주의’에 대한 논란은 당시 토지소유권의 현실적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크게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일제의 ‘사업’에서 토지소유권의 조사원칙인 ‘신고주의’에 대해 용어와 개념을 다시 천착할 필요가 있다.64)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시행초기인 1910년 8월 ‘토지조사법’과 1912년 8월 ‘토지조사령’의 시행부터 이미 ‘신고주의’를 천명하고 있었다.65) 임시토지조사국의 공식적인 보고서인 󰡔조선토지조사보고서󰡕에도 “지주의 조사는 원칙으로서 신고주의를 채택하였다”는 법제적인 표현이나, “토지의 소유자에게 토지신고를 명하였다”고 언급되는 등 여러 곳에서 지적되고 있었다.66) 당시 일제의 ‘사업’의 소유권조사는 처음부터 개별 지주로부터 토지에 관한 신고를 받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삼았다. 토지신고의 정확성은 사업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사항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현지에서 지주총대로 하여금 토지신고서의 배포와 수집을 하도록 하였으며, 토지신고서의 정확성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다.

1913년 1월 <토지신고심득>을 개정하여, 기존의 탁지부에서 작성한 결수연명부와의 연락관계를 고려하여 토지신고서를 작성하도록 원칙을 마련하였다. 이에 1913년 6월 7일 <임시토지조사국조사규정>을 공포하여 토지조사의 순서와 방법을 확정하였다.67)

그런데 토지신고서를 작성할 때 기본장부였던 결수연명부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임시토지조사국의 법령과 훈령 등의 발포를 기준으로 하여 검토하기는 했으나, 토지신고서와 결수연명부, 토지증명부, 토지대장 등과의 상호 관련성에 대해서 명확한 인식을 갖지 못했다.68)

토지신고서와 결수연명부의 구체적인 대조방법을 지시한 것은 바로 1913년 3월 3일 <관통첩 제54호>이었다.69) 여기서는 중요한 부분은 첫째와 두번째 조항이다. “1) 신고서의 자번호, 지목, 면적, 결수 및 소유자명이 결수연명부와 相違할 때는 조사원이 지주, 동장, 동리장 또는 지주총대에 질문하여 사실의 요령을 신고서 상부란 외에 기입하여 부군에 제시하고, 부군에서는 이를 기록하고 속히 다음 수속을 할 것, 2) 소유자명의가 다를 때는 별도로 신고서를 징수하지 않고 결의서를 작성하여 이에 따라 결수연명부를 정정할 것. 단 기증명의 토지는 증명관리의 토지에 따라 정정하고 계쟁지는 본부 혹은 임시 토지조사국의 결정 처분 또는 확정 판결의 결과를 기다려 정정할 것” 등이었다. 이 통첩에 의하면, 토지신고서의 내용, 특히 토지의 기록상태와 소유자명이 다를 때는 결의서를 작성하여 결수연명부를 정정할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지주의 토지신고서가 가장 기본적인 장부이며, 이에 의거하여 결수연명부를 수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토지신고의 과정에서는 이 통첩은 도리어 역으로 결수연명부가 기본장부로서 역할하게 되었다.

그런데 1913년 10월 1일부터 결수연명부가 증명부의 토지대장으로서 역할을 하면서 이에 대한 처리방향도 개정하였다.70) 첫째 종전에는 토지신고서와 부군 결수연명부를 대조했으나, 앞으로는 소유권보존증명의 인증장부인 면 결수연명부와 대조할 것. 둘째, 양자가 부합하지 않을 때는 조사원이 일정한 용지에 기재하여 면별로 편철하여 부군에 송부할 것, 셋째 양자의 소유자명이 부합하지 않는 소유권이전은 종전에는 통지했으나, 앞으로는 用字의 誤記, 人違 등의 오류만 통지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이것은 결수연명부에 증명부의 토지대장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가능하였다. 이제 증명부의 소유권에 관한 사항은 증명관리가 부군에 통지하여 결수연명부를 변동시키게 함으로써 양자는 항시 일치하는 관계에 있었다. 결수연명부는 토지신고서의 기본장부로서의 역할을 토지조사기간 내내 담당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사업’과정에서 토지신고서와 결수연명부와의 긴밀한 관련성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보면 알 수 있다. 1915년 1월 18일 일제는 결수연명부와 토지신고서의 대조작업을 일시적으로 폐지하였다. 즉 토지신고서를 제출할 때는 임시토지조사국에서 토지신고자수와 결수연명부의 토지소유자수를 대조하여 신고탈루를 방지하는 조치만 하였다. 이 조치는 토지신고서가 결수연명부에 기초하고 있고, 따라서 양자를 다시 대조하는 것은 시간낭비이기 때문에 공정 진척을 위해 취한 방법이었다.71) 그러나 여기에는 여러 불편이 야기되어, 보름 후 다시 이전 방식에 따른다는 조처를 취하였다. 이제는 결수연명부의 정확성이 역전되어 파악되었다. 즉, 결수연명부 보다 신고서에 결함이 많고, 신고서의 오류 탈루를 확인할 수 없으며, 토지신고서와 증명부가 차이가 날 때 달리 대조할 근거서류가 없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72)

이상과 같이 토지신고의 법제적 조치과정을 살펴보았을 때, 초기에 토지신고서의 정확성 여부는 결수연명부와 서조 대조되었으며, 결수연명부는 토지증명부로서 서로 연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삼자의 관계에서 토지조사와 소유권 증명의 기본장부는 <토지신고서>라기 보다는 <결수연명부>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토지신고서와 결수연명부와의 실재적 관련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장부체계의 비교분석을 통해서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 예컨대 慶南 昌原郡 內西面 山湖里의 토지조사관계 장부를 살펴보기로 하자. 

아래의 <자료 1~3>의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먼저 1913년 6월 산호리에 사는 具致瑞는 소유하고 있는 傳 63의 대지 등의 토지를 신고하였다. 토지신고서의 토지위치를 나타내주는 四標는 과세지견취도에서 소유면적과 결수는 결수연명부에서 확인하여 기록하였다. 그리고 신고서 하단에 추가로 가지번을 기재했는데, 이는 실지조사부를 작성하면서 기록한 것이었다. 이렇게 토지신고서는 1912년에 작성된 결수연명부와 미리부터 상호 대조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토지신고서의 신고과정에서 필수적으로 거치는 작업으로 결수연명부와 관련된 과세지견취도가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와 같이 토지신고서의 작성과정에서 결수연명부와 과세지견취도가 필수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일련의 법제적 조치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일련의 장부 제조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과세지견취도가 1912년과 13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조제되었던 이유는 조세부과토지의 확인작업이라기 보다는 토지신고서를 작성하기 위한 사전조치로서 의미를 갖는다. 특히 토지의 위치에 대한 사표를 확인하고, 결수연명부상의 소유자명과 대조작업을 위해서 필수적인 조치였던 것이다. 따라서 토지조사대상 토지의 신고여부는 과세지견취도상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73)

이러한 추론이 가능하다면, 토지조사사업 당시 토지소유자의 확인을 위한 기본 장부는 토지신고서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74) 도리어 결수연명부가 실제 유효한 장부로 기능했다. 이는 결수연명부에 토지의 이동, 즉 매매, 증여, 매수 등이 기록되었으며, 이는 토지대장이 완성되기 이전까지 1910년대 내내 지속하였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토지신고서를 토지대장과 등기부의 기본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결수연명부가 토지조사사업의 출발점, 권원부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이 ‘신고주의’의 실상이었다.

이와 같이 ‘사업’의 신고주의는 표면적인 원칙이었을 뿐이었다. 이미 결수연명부와 과세지 견취도의 조제와 열람, 지주수의 파악을 통해서 토지의 위치, 면적, 소유자의 현황을 충분히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고 하겠다. 이제까지 지주의 ‘신고주의’라는 원칙을 해석하면서 수탈성과 관련하든 안하든 간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해왔던 기왕의 연구의 편향성에서 벗어나 ‘사업’에서의 ‘신고주의’는 도리어 자발성을 위장한 ‘강제조사주의’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2) 토지소유권의 실체 : ‘수조권적 토지지배’ 해체인가




토지조사사업에서 확정된 토지소유자의 토지소유권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쟁점이 제기되었다. 특히 일제의 ‘사업’ 결과 과연 토지소유자의 근대적 토지소유권이 확정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반면에 역으로 이전의 토지소유제도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이른바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실체는 있는가. ‘사업’을 통해서 과연 이전의 봉건적 토지제도가 해체되고 새로이 근대적 토지소유제도가 확립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근대적 토지소유개념의 타당성과 유용성에 대한 논란이다.

일반적으로 ‘사업’에서 확립된 근대적 토지소유라는 소유권 개념에 대해서  “법적․형식적 측면에서의 자유롭게 절대적인 토지사유권의 성립”으로 규정하는데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개념규정에 대해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예컨대, 최근의 연구에서 김홍식은 미리 근대적 토지소유론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즉 ‘소농경영의 양극분해를 통한 자본제적 농업의 성립’이라는 테제가 역사적으로 부정되어 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근대적 토지소유의 본질은 전근대적 인신지배를 해체하고 사유의 절대성을 보장한 제도를 성립시킴에 있으며, 그 생산력, 생산방법에 있어서 특정의 표준적 형태를 상정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근대적 토지소유란 소유권 그 자체의 절대성을 보장하는 형식적 제도상의 범주”에 다름아닌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75)

이에 대한 비판으로 장시원은, “원래 소유관계는 생산관계의 법률적 표현에 나름아닌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토지소유론은 일반적으로 생산관계와 소유법관계의 통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본서(김홍식외, 1997)에서 사용하는 근대적 토지소유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소유법관계 수준에서만 논의되는 것일 뿐, 생산관계 수준에서의 논의는 배제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장시원, 1999, 158~159쪽). 예컨대, 시민혁명과 농업혁명을 통해 자본제적 농업(삼분할제)를 성립한 영국과는 달리, 한국의 경우에는 외래 권력에 의해 근대적 민법체계가 먼지 이식․도입되었고, 생산관계면에서는 여전히 반자급적 영세 소농경영과 이에 기생하는 지주적 토지소유의 대항관계가 지배적 범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산관계의 변혁을 수반하지 않는 소유법 관계의 변화만으로 과연 근대적 토지소유라는 독자적 범주의 설정이 가능할 것인가. 또 그러한 개념의 유용성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특히 전전 일본이나 조선의 지주제가 과연 자본주의 발전에 적합한 존재였는지의 여부에 대한 평가도 선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76) 요컨대 장시원의 비판은 근대적 토지소유에 조응한 생산관계의 성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사업’이후 농촌의 지배적 생산관계였던 지주 소작관계가 자본 임노동관계에 주로 기초한 것도 아니며, 생산력상의 우위도 뚜렷하지 않다면, 그것을 ‘근대적’ 토지소유로 볼 이유가 별로 없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조석곤은 이제까지 ‘사업’을 통해서 비로소 근대적 토지소유제도와 지세제도가 확립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는 “근대가 외부, 그것도 저 파렴치한 일본제국주의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이해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거부감”일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러면서 과연 지구상에서 자생적인 근대를 맞이한 지역은 일부 유럽지역이외에는 거의 없으며, 식민지를 경험한 대부분의 지역에서의 근대는 선진자본주의 혹은 제국주의에 의해 강요된 근대, 즉 ‘식민지적 근대’라고 규정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식민지적 근대란 “자본주의적 잉여수취가 노골적으로 보장되는 상태 하에서 식민지 모국의 이해를 반영하여 진행되는 근대화”이라고 하였다(조석곤, 1998, 68쪽). 그래서 근대적 소유권의 본질은 물건에 대한 개인의 권리가 배타적으로 보장되는 것인데, 일본민법이 준용됨으로써 토지에 관한 개인의 권리는 사용권, 수익권, 처분권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사업’에 의하여 토지에 관한 소유권이 지주에게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인정되었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사업’은 근대적 토지소유제도를 확립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조석곤은 근대적 토지소유론이 생산관계적 특질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영국의 삼분할제를 전형적인 사례로 들고 있지만, 농업노동을 공용하는 대경영 뿐만 아니라 가족노동에 기초한 소농경영도, 동태적 지주에 의한 소작경영도 근대적 토지소유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토지를 담보로 하는 근대적인 금융기관의 대출에서 토지가 자본화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부동산 담보의 제도적 기초는 바로 ‘사업’에 의해 확립된 것이었다는 분석을 원용하고 있다.77) 

그렇지만 근대적 토지소유의 성립을 ‘사업’ 이후가 아니라 농지개혁 이후로 설정하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조석곤은 이전의 농업도 자본주의발전에 적합한 방향으로 발전하였는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면서, 일제하 지주 소작관계의 생산관계적 규정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언급을 회피하였다. 앞으로 근대적 토지소유론의 명확한 개념규정과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토지의 소유법관계 뿐만 아니라 생산관계까지 고려하여 통일적으로 파악되어야 하며, 구체적으로 ‘사업’을 전후하여 지주제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는지 본격적으로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근대적 토지소유권의 실체에 대한 논의는 경제학의 소유권 개념에 관한 공통분모를 가진 이론논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반면, 역사적 형태로서 ‘근대적 소유권’의 성장과 확립에 대해서는 논자마다 이질적인 측면이 강하다. 특히 조선후기 이래 ‘사적 소유권의 성장’과 대비하여, ‘조선사회의 봉건적 토지제도의 규정성’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근본적인 대립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토지소유제도의 역사적 단계의 파악은 ‘사업’이전에 수행된 국유지 조사와 국․민유지 확정문제를 중심으로 해석되었다. 특히 宮嶋博史(1991)는 ‘보호국’기의 징세제도 개혁과 국유지조사에 주목하였는데, 특히 1907년 臨時帝室有及國有財産調査局이 설립되어 혼탈입지의 환급, 도장권의 정리, 궁내부 및 경선궁 소속 토지의 국유화 등 민유지와 국유지를 구분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고 파악했다. 이제 국유로 확정된 토지에 대해서는 일반 민유지와 마찬가지로 소작료를 징수하였으며, 이제 국가는 국유지의 지주로서 일반 민유지의 지주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고, 비로소 수조권 분여지로서의 성격은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국유지조사는 ‘사업’에 의한 소유권 확정의 대전제가 되었다는 점을 중요한 의의로 평가했다.78)

그런데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최종적인 해체시기에 대해 이론이 많았다. 이영훈은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해체시기에 대해 “1905년 조선왕조의 사실상의 멸망과 더불어 수조권적 토지지배도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고 보았다(이영훈, 1992, 248쪽). 반면에 조석곤 역시 1907년 臨時帝室有及國有財産調査局의 설립을 중요하게 보면서도 1908년 1월 「삼림법」에 의해 모든 삼림, 산야는 국유로 하는 방침이 결정되고 1908년 6월 모든 토지에 대한 국유․민유의 방침이 결정되었음으로 ‘사업’이전에 이미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해체되었다고 강조했다(조석곤, 1995). 그렇지만 宮嶋博史는 ‘사업’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국유와 민유의 구별, 사적 토지소유권의 확립이 이루어져 근대적 토지변혁으로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위와 같이 ‘사업’시행의 결과로 조선사회의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해체가 이루어졌다는 논리는 사실 일제의 국유지조사과정에 대한 지나친 강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정책의 입장에서는 기존의 대한제국이 장악하고 있었던 궁장토나 역둔토, 삼림자원의 장악이 초미의 과제였으며, 이를 일제 강점의 상황을 이용하여 어떻게 강탈하느냐가 문제였다. 여기에 일정한 국유지창출의 논리를 창안했는데, 그것은 비교적 최근의 국유지분쟁지를 대상으로 하고, 그 이전의 분쟁지를 제외하였으며, 제2종 유토의 재해석, 국유․민유의 토지에 대한 분류원칙 등 제반 법제와 조처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우선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79)

다른 한편, 통감부시기 국유지조사과정에서는 일제식 토지제도의 이식과정은 기본적으로 조선후기 이래 사적 토지소유권의 성장과는 상호 관련성이 없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사업’을 통해서 부정되고 해체된 소위 ‘구래의 토지지배권’의 내용이 불분명하다는 지적(장시원, 1999)은 일면 타당하다. 또한 조선후기에 이미 대부분의 토지에서 실질적으로 배타적인 사적 토지소유가 성립되어 있었고, ‘사업’은 이를 법인하였음으로 ‘사업’이전과 이후의 토지소유제도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배영순, 2002)에서도 나타나듯이, 이미 사적 토지소유권의 확립은 ‘사업’이전에 전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토지조사사업의 차이 : ‘사업’의 근대성과 식민지성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대한제국의 양전․지계사업과 일본제국주의의 토지조사사업은 지주적 토지소유의 법인이라는 측면에서는 사업의 목표와 내용에 있어 크게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제의 ‘사업’에 근대적 토지제도의 수립이라는 방점을 찍어왔기 때문에 ‘사업’에 비교하여 이전의 토지조사는 대단히 전근대적인 것으로 낮게 평가되었다.80) 이러한 연구경향은 앞서 일제하 연구자들에게서나 아니면 이후 식민지근대화론을 긍정적으로 보는 논자들에게 공통된 현상이었다.

그래서 ‘사업’ 이전 조선사회에 대한 국가적 토지소유의 지배적 규정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양전이란 어디까지나 국가적 수취의 입장에서 그 수조지와 수조대상자를 확정하는 과정이었다고 보고 있었다. 특히 토지소유권의 조사의 측면에서는 추진주체의 의도가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근대법적인 소유권 확정과 관리체계를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전사업이 그 자체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파악하였다.81) 따라서 광무 양전사업에서는 소유권조사사업으로서의 성격은 하나의 의제에 불과하였다고 하였다.82)

그렇지만 대한제국의 토지조사와 관계발급에서도 이전의 모든 매매문기를 강제적으로 거둬들이고 새로이 관계로 환급함으로써 국가가 토지소유권을 공인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것은 국가가 모든 부동산의 소유권 등록과 이전 및 관련사항을 통제하도록 하는 강제규정이었다. 이렇게 구권과 관계의 교환과정을 통하여 그 시점이후로는 관계가 소유권의 법적, 실재적 權原簿로서 사적 토지소유권을 행사하는 문서가 됨을 의미했다. 양전사업에서 잠정적으로 조사되고 인정받았던 토지의 소유자인 시주가 관계발급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사정 이후에 확정된 토지소유권자가 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따라서 관계발급으로 취득한 소유권은 어떤 이유로도 취소할 수 없는 국가로부터 추인받은 一地一主의 배타적 소유권으로서 ‘原始取得’한 소유권이었다.83)

이런 측면에서 보더라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비록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제도를 단시일내에 강제적으로 정착시키기는 했으나 그것은 조선사회의 내재적 발전과는 아무 상관없이 ‘단절’된 일제의 식민정책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宮嶋博史와 같은 연구자들은 “외래 권력에 의한 단절의 측면보다도 내재적 발전의 연장선이라는 측면에서 ‘사업’을 파악하고자” 하였다고 보고 있다.84) 그러나 ‘내재적 발전의 연장선’이라는 표현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조선사회의 내재적 발전이라는 관점은 원래의 정의에 의하면, 조선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던 반봉건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일종의 발전적 성과와 지향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즉, “내재적 발전론은 다른 말로 하면, 조선사회의 주체적인 발전론이라고 환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에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성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관점을 이제부터라도 엄밀하게 재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더욱이 양 사업의 중요한 차이점은 외국인에게 토지소유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한제국의 사업에서는 당시 외국인들의 침탈이 빈번해짐에 따라 증대된 토지의 매매 혹은 양여의 경우 뿐만 아니라 전당의 경우에도 관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대한제국에서는 일정하게 소작농의 제권리를 보호하려는 정책이 취해졌던 점이다.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농민적 토지소유나 소작권 등 농업에 대한 제권리는 배제되고 농민수탈을 통해 식민지농업체제를 갖추었던 것과는 다른 사업이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양전․지계사업이 완결될 수 있었다면, 한국의 토지제도 발전과정에서 볼 때 한국 중세사회의 최종적인 해체를 이룸과 동시에, 근대국가의 형성에 경제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5. 결 론




지금까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근대적 토지제도의 수립과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작업이라는 양면적 평가를 받아왔다. 1980년대 중반이후 최근에 ‘사업’이 근대사회의 수립과 발전을 위한 출발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처럼, 사업의 목적과 경과, 그것의 성격에 대해서 보다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 새로운 연구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사업’에 관한 연구사를 시기별, 주제별로 간단하게 검토하였다. 우선 연구사의 흐름에 대해 일제하 근대적 토지소유권의 도입과 반봉건적 지주소작제의 잔존에 대한 농촌사회 성질논쟁, 해방이후 일제의 토지수탈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점과 비판, 1980년대 후반 이래 ‘사업’의 시행과정과 김해군 사례연구에 근거한 기존의 통설 비판과 ‘사업’의 근대성 강조 등으로 정리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일제의 ‘사업’에 관한 준비과정에 대해 총체적인 ‘사업’의 추진계획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토지조사의 기초작업으로서 결수연명부와 과세지견취도에 대한 실체를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또한 근대적 토지소유권의 법인과 관련하여 일제의 행정적 처분이 과연 적절했는지 의문이며, ‘사업’의 또다른 목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