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4-12 15:38
경기도 지명유래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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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경기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구미라는 이름은 탄천이 굽이져 흐르는 곳에 마을이 위치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PRE>- 위치 - 구미동은 성남시와 분당구의 최남단, 탄천과 동막천이 만나 휘돌아 흐르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 다. 동쪽은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서쪽은 용인시 수지읍 동천리, 북쪽은 분당구 금곡동, 불정동 과 접하고 있다. 탄천이 북쪽으로 흐르면서 금곡동과의 경계를 이루며 서쪽에서 흘러내린 동막 천(머내; 머흐내, 험천)이 이곳에서 탄천에 합류한다. - 연혁 - 조선시대에 탄천 남쪽은 용인군 수진면(水眞面) 구미리였으며, 1914년 일제에 의한 전국의 행정 구역 폐합 때 수진면의 죽전(竹田), 원천동(遠川洞), 구미동의 각 일부 및 광주군 낙생면의 정자 동 일부를 합하고 낙생면에 편입되어 구미리(九美里)가 되었다. 1971년 9월 13일 광주군에서 성남출장소가 분리ㆍ독립하면서 여기에 편입되었고,1975년 3월 17 일 성남시 낙생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89년 5월 1일 성남시 중원구에 편입된후 1991년 9월 17일 분당출장소가 분당구로 승격되면서 분당구 구미동이 되었다. 관내에 오리동(五里洞). 미금동(美金洞)이 있으나 별개의 행정ㆍ법정동이 아니다. 분당 신도시 개발 이전에는 골안(石村: 돌말), 넘말, 가운데구미(中九美), 낭떠러지말, 뒷구미(後九美), 벌말 (坪村), 머내(遠川), 앞구미(前九美), 오리뜰, 잣골 등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었다.</PRE>

* 지명유래

<PRE>구미라는 이름은 탄천이 굽이져 흐르는 곳에 마을이 위치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하천의 곡류 (曲流)지역 땅이름에는 구만리(굼안), 구비내(구비안),구만동 등의 이름이 붙여진 경우가 있는 데 ‘구미동’도 ‘굼 - 구미’를 뜻하는 하천곡류지명으로 볼 수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구미’가 ‘후 미’를 뜻하면서 ‘금’ ‘기미’ ‘꾸미’ 같은 형태로 변하여 신바꾸미(사천시), 큰구미(단양), 막그미 (진도)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경남 양산의 물금(勿禁)은 ‘물구미’의 표기로 보기도 한다. 한편 1900년대 초기 문헌에는 ‘구미동(九尾洞)’으로 기록되어 있고, <성남시지>에는 전주 이씨 등 아홉 성씨가 각각 부락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구성리(九姓里)’라 하였는데 그 성씨들이 모두 음(音)이 다르므로 ‘구음(九音)’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또 그들이 서로 화목하였으므로 ‘구순(九順)’이라 하였다든지, 마을에 아름다운 일이 많아서 ‘구미(九美)’라 불렀다고 한다. 구미동의 유래에는 이외에도 뒷산이 거북이처럼 생겨서 ‘구산(龜山)’이라 불렀다는 설, 아홉 개 마을로 되어 있어 ‘구미’라고 부른다는 설, 거북이처럼 생긴 산밑 마을로 ‘거북이 그늘’이란 뜻에 서 ‘구음(龜陰)’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생각건대, ‘구성리’는 ‘구석리’를 소리 그대로 표기한 것이며, ‘구음’역시 ‘굼’의 차음(借音)으로 보여진다.</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
 
 
'금곡(金谷)' 은 토박이말 '쇠골' 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PRE>- 위치 - 금곡동은 성남시 분당구 서남단에 위치하여 남쪽으로 용인시 수지읍과, 동쪽으로 구미동, 불정 동과 접하고, 또 경부고속도로 동쪽으로 신기동, 정자동과 접하며, 서쪽은 운중동, 북쪽은 판교 동과 잇닿아 있다. 까치마을과 하얀마을 경계에 의하여 구미동과, 탄천에 의하여 불정도과 나누 어진다. 동의 남서쪽을 동막천이 동류하면서 용인시 수지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 연혁 - 지금의 금곡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낙생면의 금곡리(金谷里:지금의 신기동을 포함한다)지역이 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시 동막동(東幕洞)과 원천동(遠川洞)을 합하여 낙생 면 동원리('동' 막+'원' 천)가 되었다. 1971년 9월 13일 광주군에서 성남출장소가 분리·독리 독립 하면서 낙생면의 금곡리, 동원리, 궁내리가 모두 여기에 편입되었고, 1975년 3월 17일에는 다시 성남시 낙생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89년 5월 1일 성남시 중원구에 편입되었다가 1991년 9 월 17일 분당출장소가 분당구로 승격되면서 분당구 금곡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궁내동, 동원 동, 구미동은 1977년 6월 금곡동에서 통합, 관할하여 왔으나 1996년 1월 15일 구미동이 금곡동 에서 독립 행정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분당 신도시 개발 이전에 금곡동은 샛터말, 쇠골, 승주골 등의 자연부락이 있었으나 샛터말은 신설괸 신기동에 편입되었다. 또 법정동인 동원동은 광주머내, 동막골, 샛터, 안골동의 마을이, 궁내동은 궁안과 밀린동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밀린동, 샛터말, 승주골 등은 폐동되었다. </PRE>

* 지명유래

<PRE>'금곡(金谷)' 은 토박이말 '쇠골' 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이곳 '쇠골' 마을의 유래에 대하 여는 옛날 이곳에서 금을 채굴하였으므로 쇠골=금곡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지 촌로 들의 증언에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쇠골=금곡으로 불리우는 마을은 수십 개 지역에 달하고 있으나 쇠는 지역에 따라서 소(牛), 새(동쪽: 예, 샛바람), 새(신:新), 사이(間), 수렁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쇠=새는 사투리에서 혼용되면서 새=해로 사용되어 새=일(日)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곧 닷새 (5日), 엿새(6日)의 예와 같다. 또 안동 권씨 참의공파 족보에는 '쇠골'을 쇠곡(釗谷), 쇄곡(鎖谷)이라 하였는데, 이는 '쇠골'의 한자식 차음표기로 보인다. 자연부락인 '샛골 = 쇠골' 이거나, 골짜기 사이에 위치한 '사이골 = 새골' 이거나, 골짜기 사이에 위치한 '사이골 = 새골' 로 부르 게 된 것으로 보인다.</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
 
 
분당’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합성지명(合性地名)이다.

<PRE>- 위치 - 분당동은 분당구의 중앙부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옛부터 경기도 광주군과 통하던 교 통의 요충지로서 삼거리를 이루었던 곳이며, 태재(추령:가실고개)를 비롯하여 새마을고개, 봉적 골고개 등이 모두 광주군 오포면과 통한다. 이곳 삼거리 분점(동이점)마을은 장터, 주막집, 옹기 점 등이 있어 매우 번창했던 곳이다. 그러나 분당동이 ‘분당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회자되면서 개발이후의 ‘분당’은 옛날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동쪽으로는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 서 쪽은 분당 중앙공원과 내정동, 남쪽은 수내동, 북쪽은 서당동, 서현동(율동)과 접하고 있다. 분 당동의 북쪽에는 분당저수지에서 흘러내린 분당천이 동쪽→서쪽으로 흘러 분당 중앙공원으로 들어가며, 돌마로, 불정로에 의하여 서현동, 서당동과 경계하고 있다. - 연혁 - 분당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분점리(盆店里)와 당우리(唐隅里)지역이었다. 일제의 통감 정치 시절인 1906년 당우리(堂隅里)는 ‘당우리(唐隅里)’로 ‘당(唐)’자가 바뀌었으며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두 마을이 하나의 리(里)로 통합되면서 ‘분당리(盆唐里)’가 되었다. 1971년 9월 13일 경기도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73년 7월 1일 성남시 분당동이 되었다. 1975년 3월 17일 시조례에 의거 돌마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5월 1일 성남시 중원구청 관 할이 되었다. 그후 분당 신도시 개발에 따라 1991년 9월 17일 분당구 분당동이 되었으며, 1992년 5월 1일 분당 동에서 초림동, 서현동이 나누어졌고, 1993년 1월 20일에는 서당동이 분동되었으며, 1993년 6 월 5일에는 내정동이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렀다.</PRE>

* 지명유래

<PRE>분당’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합성지명(合性地名)이다. 그 해에 일 제가 전국의 부, 군, 면, 리, 동을 일제히 폐치·분합할 때, 이곳에 있었던 분점리(盆店里:동이점, 장터)와 당우리(當隅里:안당모루, 새당모루)를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분당(盆唐)’ 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때 합성지명의 의의(意義)가 갖는 「결합지역 땅이름의 보존적 합성」 을 간과한 오류를 범하였다.‘당우리(唐隅里)’의 ‘당(唐)’자는 본래 ‘집 당(堂)’자였는데 1906년에 ‘당(唐)’으로 바뀐 후 1914년에 ‘분당(盆唐)’이 되었으나 그 이전에는 ‘당우리(堂隅里)’로 확인되 고 있다. 곧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시대 관청의 공식문서인 「경기도 광주군 양안(量案, 양안은 당시의 토지대장으로서 지금의 지적도면+등기부에 해당함)」에도 ‘당우리(堂隅里)’로 표기되 어 있다.‘당(堂)’자가 들어간 지명은 불당(부처당,미륵당), 산신당, 서낭당(성황당), 할미당, 각 시당, 산제당, 기우제당, 동제당, 칠성당, 천제당, 별신당, 사직당, 당산나무 등이 있었던 곳에 붙여지는데 이곳 역시 당집이 있었던 곳을 ‘당골’이라 불렀으며 ‘당모루’도 그래서 생겨난 이름 이다.혹자는 이곳이 신창 맹씨(新昌孟氏)의 세거지로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이므로 ‘당(唐)’자를 쓴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중국인이 거주하여 붙여진 서울의 당인리(唐人里), 당주동(唐珠洞), 또 중국과의 교역로로 인하여 붙여진 충남의 당진(唐津), 경기도 화성군 구봉산 당성(唐城) 의 경우와는 다르다.우리나라 성씨 중에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가 많으나, 그로 인하여 ‘당 (唐)’자를 붙인 예는 보기 어렵다. 따라서 분당(盆唐)은 ‘분당(盆堂)’으로 바로 잡아야 할 땅이름 이다.</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1동
 
 
돈서촌에서 ‘서(書)’자를 취하고 양현리에서 ‘현(峴)’자를 취하여 ‘서현리(書峴里)’

<PRE>- 위치 - 서현동은 성남시 분당구의 중앙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면적도 운중동, 판교동, 금곡동 에 이어서 네번째로 넓다. 동쪽은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 직리와 접하고, 남쪽은 분당구 분당동, 서당동, 내정동의 중앙공원과 접하며 서쪽은 분당구의 초림동, 판교동과, 북쪽은 이매동과 접하고 있다. 동의 서북방은 낙생로에 의하여 판교동과 나누어지며 서남쪽은 분당로에 의하여 초림동, 내정 동(중앙공원)과, 돌마로에 의하여 서당동과 경계가 되고 있다. - 연혁 - 행정동인 서현동은 그전에 법정동인 율동과 서현동이 하나로 통합되어 지금의 서현동이 된 곳 이다. 서현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돈서촌(遯書村), 양현리(陽峴里), 통로동(通路洞) 등 의 마을로 되어 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시 ‘돈서촌’과 ‘양현리’의 가운데 글자를 합 하여 ‘서현리’가 되었으며 율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율리(栗里)라고 부르던 곳이다. 1971년 9월 13일 도조례 제470호에 이하여 서현동과 율동이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1일 성남시 서현동과 율동이 되었으며 1975년 3월 17일 시조례에 의거 성남시 돌마 출장소에 편입되었다. 1989년 5월 1일에는 분당 신도시가 건설되기 전이므로 성남시 중원구에 편입되었다가 분당출장소 관할을 거쳐 1991년 9월 17일 서현동과 율동이 각각 분당구의 동이 되 었다. 1992년 5월 1일 분당동에서 서현동을 나누면서 율동의 전체와 서현동 중 77의 1번지- 90 번지가 모두 행정동인 서현동의 관할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PRE>

* 지명유래

<PRE>현(書峴)’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있었던 마을명칭인 ‘돈서촌(遯書村)’과 ‘양현(陽峴)’이라는 두 마 을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의 돈서촌, 양현, 통로골 등의 마 을로 이루어진 곳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한 전국의 행정구역 폐치·분합때 돈서촌에서 ‘서(書)’자 를 취하고 양현리에서 ‘현(峴)’자를 취하여 ‘서현리(書峴里)’라 부르게 된 곳이다. 이를 더 거슬 러 올라가 보면 ‘돈서촌’은 현지에서 ‘된섬말’이라 부르던 곳이며, 양현리는 ‘볕고개’라 부르던 곳 으로 돈서촌의 경우,어느 선비가 이곳에 내려와 은거하면서 서당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 양현리는 글자 그대로 ‘햇볕이 잘 드는 고개’로 풀이되어 ‘양현리’가 되었지만, 토착지명의 ‘볕고개’는 ‘볕’이 받, 백, 뱃 등에서 비롯된 산지지명으로 산골짜기나 고개, 산 사이를 뜻하는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서현동에 통합 된 율동은 그전에 율리(栗里)라고 부르던 곳으로, 현지에서 서근배미, 또는 서근바미로 통하던 유명한 밤의 생산지였다. 지금의 서현동에 딸린 법정동이 되었으나 율리는 조선조 때 청주 한씨 (淸州韓氏)의 집단세거지였던 곳으로 1990년대 이후 행정동인 서현동에 통합된 곳이다.</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2동
 
 
‘서당(書堂)’이라는 이름은 이곳의 법정동인 서현동에서 ‘서(書)’자와 그전 분당동의'당'

<PRE>- 위치 - 서당동은 그전 분당동과 서현동의 일부가 합해져서 새로 생겨난 동이다. 분당구의 중심부에서 동쪽에 위치한다. 동쪽과 남쪽은 분당동에, 서쪽 끝은 분당 중앙공원과, 북쪽은 서현동과 접하고 있다. 동의 중심 을 동에서 서쪽으로 분당천이 흘러서 중앙공원으로 들어가며, 동의 서남쪽은 분당로에 의하여 분당동과 경계가 되고, 동남쪽은 돌마로에 의하여 서현동 시범단지와 접하고 있다. - 연혁 - 서당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당우리(堂隅里)와 분점리(盆店里) 등에 속한 곳으로 이곳 에 점골, 새당모루, 벌터 등의 마을이 있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전국의 행정구역 폐치, 분합 때 분점리와 당우리를 합하고 그 머리글자를 따서 분당리라 하였으며, 1971년 9월 13일 경기도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동과 서현동이 되었으며, 1975년에는 돌마출장소에 편입되 었다가, 1985년 5월 1일에는 성남시 중원구에 속하였다. 1991년 9월 17일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에 속하였으며, 1993년 1월 20일 분당동에서 서당동이 나 누어지고, 서현동 일부를 합하였다.</PRE>

* 지명유래

<PRE> ‘서당(書堂)’이라는 이름은 이곳의 법정동인 서현동에서 ‘서(書)’자와 그전 분당동의 ‘당’자를 합 하여 ‘서당동(書堂洞)’이라 하였다. 그러나 ‘분당(盆唐)’의 ‘당(唐)’자를 고쳐서 원래의 이름인 ‘집 당(堂)’자로 바로 잡아 1993년 1월 20일 서당동을 신설한 것이다(분당동의 이름 유래 참조). 그런데 ‘서당’이라는 이름은 옛날 학생들이 글공부를 하던 서당(書堂)을 떠올릴 수 있는데, 그것 은 서현동에 속한 돈서촌(遯書村)에 옛날 초가집의 서당이 있어서, 은거한 선비가 이곳에서 아 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곳이 서당동과 인접한 곳이므로 ‘서당’과는 인연이 깊은 곳이다. 특히 ‘서당동’이라는 이름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떠올리게 한다. 곧 맹자의 어머 니가 자식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 번이나 이사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공동묘지 가까이 가서 살았 다. 그런데 자식(맹자)이 장사지내는 흉내를 잘 내므로 다시 시장가로 옮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물건을 사고 파는 흉내만 내므로 세번째는 서당 옆으로 이사를 갔더니 그제야 공부를 열심히 하 였다는 이야기이다. </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1동
 
 
‘초림’이라는 이름은 분당 신도시 개발전까지 없었던 이름으로 신도시가 조성

<PRE>- 위 치 -초림동은 분당구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탄천을 끼고 있으며, 분당 중앙공원의 서쪽과 남쪽에 접하고 있다.동쪽은 내정동과 중앙공원, 서쪽은 신기동, 북쪽은 판교동과 서현동에 둘러싸여 있다. 서북쪽으로 탄천이 흘러서 북류하며 초림동에서 분당천(순내천)이 탄천에 합류한다.초림동은 내정로에 의하여 동쪽에서 내정동과 나누어지고, 분당로에 의하여 서현동과 북쪽에서 나누어지며, 백현로에 의하여 신기동과 서남쪽에서 경계를 이루고 있다.- 현 역 -초림동은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1992년에 새로 설치된 동으로 이 동의 대부분은 그전 수내동에 속하였고, 일부는 정자동과 궁내동에 속하였던 곳이다.이 지역은 그전 광주군 돌마면 수내촌 지역에 속한 곳으로 1971년 9월 13일 도조례에 의거 경기도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었다.1973년 7월 1일 성남시 수내동이 되었고, 1975년 3월 17일 성남시 돌마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89년 5월 1일에는 성남시 중원구에 편입된 곳이다.이후 분당구의 다른 동과 마찬가지로 분당출장소 관할을 거쳐서 1991년 9월 17일에는 분당구 수내동이 되었고, 1992년 5월 1일 성남시 조례 1192호에 의거, 이 지역을 관할하던 분당동에서 동을 나누어 ‘초림동’이라는 새이름의 행정동이 되었으며, 초림동의 지번은 모두 그전 법정동인 ‘수내동’으로 되어 있다.- 관공서 등 -초림동 관내에는 분당구청이 탄천변의 분당천 옆에 자리잡고 있으며 교육기관으로 분당고등학교, 초림초등학교가 있고, 양지마을에 초림동사무소가 있다. 유통시설로 롯데백화점, 궁전프라자 등이 들어서 있다.</PRE>

* 지명유래

<PRE>‘초림’이라는 이름은 분당 신도시 개발전까지 없었던 이름으로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새로 만들어진 이름이다. 본래 수내동에 속하였던 곳이므로 이곳의 지번은 수내동 1번지부터 50번까지 새로 지번이 부여되었다.1992년 5월 1일, 분당구의 동별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분당동에서 동의 관할구역을 나누면서 새로 동을 만들고 이 지역이 그전에 풀과 숲이 무성한 곳이었다 하여 ‘초림동’이라 불렀다고 한다.‘초림’에 대하여는 ‘풀’과 ‘숲’이 중복되는 데다가 ‘풀’이 먼저이고 ‘숲’이 뒤에 나오는 등 그 이름에 대하여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번 붙여서 사용하는 이름을 금방 바꾼다면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다.</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2동
 
 
‘숲안’마을은 지금의 중앙공원 한산 이씨 묘역 남쪽에 있었던 마을 이름이다.

<PRE>- 위치 -내정동은 그전 수내동에서 나누어진 동으로, 관내의 중앙공원과 함께 분당 신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동쪽은 분당동, 남쪽은 수내동과 정자동, 서쪽은 초림동, 북쪽은 서현동과 접하고 있다. 동의 동북방은 분당로에 의하여 서현동과, 동남방은 돌마로에 의하여 분당동과, 남서방은 백현로에 의하여 내정동과, 서북방은 성남대로에 의하여 초림동과 경계가 되며 분당천이 동쪽에서 흘러와 서쪽의 초림동으로 흘러 나간다.- 동의 연혁 -내정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수내촌에 속한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의 폐치·분합에 따라 돌마면 수내리가 되었으며, 1971년 9월 13일 경기도 성남시 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경기도 성남시 수내동이 되었고, 1975년 3월 17일 시조례에 의거 돌마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5월 1일 성남시 중원구청 관할이 되었다.그후 분당 신도시 개발에 따라 1991년 9월 17일 분당구 수내동이 되었으며, 1992년 5월 1일 수내동에서 초림동이 분동되었고, 다시 1993년 6월 5일에는 수내동에서 내정동이 분동 되어, 법정동인 수내동의 51번지 ~ 70번지에 속한 지역이다.</PRE>

* 지명유래

<PRE>내정(內亭)’이라는 이름은 이곳의 법정동명인 ‘수내동’과 인근의 ‘정자동’에서 ‘내’와 ‘정’을 취하여 1993년 행정구역 조정 시 ‘내정동’이라 한 것이다. 수내동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수내(藪內)’라는 이름은 그전 ‘숲안’마을을 한자로 적으면서 이를 훈역하여 지금의 ‘수내’가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탄천의 우리말 표기가 ‘숯내(발음은 순내)’인데, 탄천의 지류인 분당천이 또한 ‘수내’ 라 불렀다는 조사기록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수내, 내정동이라는 이름의 근원이 된 ‘숲안’마을은 지금의 중앙공원 한산 이씨 묘역 남쪽에 있었던 마을 이름이다. 〈경원학보〉에는 조선 후기 이병태라는 이가 이곳에 낙향하여 살면서(혹은 숙종 때 이병익이라는 사람이 숲을 조성하였다고도 한다) 마을 앞 분당천변에 숲을 가꾸었는데, 그 숲의 안쪽 마을이므로 ‘숲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부연하고 싶은 것은 지금 중앙공원의 영장산 꼭대기에는 8각정인 영장대(靈長臺)가 있고, 또 분당호변에는 돌마각(突馬閣)이라는 누정이, 그리고 수내정(藪內亭)이라는 정자와 옛날의 ‘정자터’ 라는 땅이름도 남아 있다. 그래서 수내동+정자동의 합성지명(合成地名)인 ‘내정동’보다도 옛 이름과 정자를 살려서 ‘숲정동(숲안+정자동)’이나 ‘수정동(藪亭洞)’같은 이름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참고로 전국의 도, 시 ,군, 읍, 면, 동, 리의 행정구역 명칭 중 순 우리말 지명은 ‘서울’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서울’에 이어서 두번째 기록이 될 한글 행정구역 명칭의 탄생이 50년이상 걸리고 있다.</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3동
 
 
수내(藪內)’라는 이름은 이곳의 ‘숲안’마을에서 비롯된 이름

<PRE>- 위치 -수내동은 성남시 분당구의 중앙부 동쪽에 위치하며, 불곡산의 북쪽 줄기인 형제봉의 서북사면에 자리잡고 있다.분당 신도시 개발 이전의 수내동은 그 지역이 탄천으로부터 동남쪽으로 광주군 오포면 경계까지 길게 자리를 잡았으나 신도시 개발 후 행정동의 관할구역이 대폭 조정되면서 탄천을 향한 서북방은 초림동,내정동 등으로 분할되어 지금은 푸른마을을 중심으로 한 동남방 지역만을 관할하고 있다. 수내동은 동쪽으로 광주군 오포면, 남쪽은 불정동, 서쪽은 정자동과 내정동, 북쪽은 내정동, 분당동과 접한다. 이 동의 서쪽은 돌마로에 의하여 내정동과, 서남쪽은 백현로에 의하여 정자동과,동북쪽은 수내로에 의하여 분당동과 구분되고 있다. - 연혁 - 수내동 지역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수내촌 지역이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2년 행정구역의 폐치·분합에 따라 돌마면 수내리가 되었으며, 1971년 9월 13일 경기도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었다.1973년 7월 1일 경기도 성남시 수내동이 되고, 1975년 3월 17일 시조례에 의거 돌마출장소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5월 1일 성남시 중원구 관할이 되었다.그후 분당 신도시 개발에 따라 1991년 9월 17일 분당구 수내동이 되었으며 1992년 5월 1일 수내동에서 초림동이 분동되었고, 1993년 6월 5일에는 다시 내정동이 분동되었다. 그러므로 수내동 1번지∼50번지는 행정동인 초림동에, 수내동 51번지∼70번지는 내정동에 속한다.</PRE>

* 지명유래

<PRE>수내(藪內)’라는 이름은 이곳의 ‘숲안’마을에서 비롯된 이름인데, 숲 또는 늪을 뜻하는 ‘수(藪)’와, ‘안 내(內)’ 자를 취한 것이다. 여기서 ‘수’는 늪지대의 얕은 곳에 무성하게 이루어진 덤불을 뜻하는 글자이므로,그전에 분당천변의 숲이 무성한 마을을 뜻하는 ‘숲안’이라는 이름을 한자화한 것이다. 이 ‘숲안’이라는 마을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은 조선 숙종 때 청주목사를 지낸 이병익이 이곳 마을 앞 분당천(수내)변에 숲을 가꾸었으므로 ‘숲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고, <경원학보>에는 이병태(李秉泰:1688∼1758)라는 이가 부락 앞에 숲을 가꾸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한편 이보다 앞서서 고려 공민왕 때에는 이곳 숲안마을을 ‘부계(部溪)’라 불렀다고 하는데 ‘부계’는 ‘무리내’, 즉 ‘물내’=수내로 유추할 수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상고할 수 없다.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종전의 수내동이 탄천의 동쪽에 위치하였고, 탄천(炭川)의 우리말 표기가 ‘숯내’이며 이 지역에서도 ‘숯내’로 통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 분당천(탄천의 지류)을 이 지역(숲안의 역말 등)에서 ‘수내’라 하였던 점을 생각해 보면 분당천=수내, 탄천=숯내의 관련설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왜냐하면 ‘숲안’은 그 소리가 ‘수반’ ‘수펑‘ ‘수펄’ 등으로 연철되기 때문이다. ‘수내동’ 이라는 이름이 붙게된 ‘숲안’마을은 지금의 내정동(중앙공원)지역에 속한다.</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1동
 
 
‘야탑’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처음으로 명명되었으며

<PRE>- 위치 -야탑동은 분당구의 최북단 중앙부에 자리잡은 동이다. 북쪽은 중원구 여수동과 접하고, 서쪽은 중탑동과, 남쪽은 하탑동과, 서쪽은 중원구 사송동과 접한다. 야탑동은 동(洞)의 동북쪽에서 여수천이 흘러 내리다가 탄천으로 유입하고, 용인시에서 흘러내린 탄천이 북류하여 중원구 여수동과 둔전동 사이를 빠져나가 한강으로 흐른다. 야탑동은 북쪽의 매화로 부근에서 중원구 여수동과 경계를 이루고 송림로의 일부에 의하여 동쪽은 중탑동과 마주 대한다. 서쪽은 낙생로에 의하여 수정구 시흥동과 경계가 되고 남쪽은 번영로에 의하여 하탑동과 대하고 있다. 동의 북서쪽으로 판교-구리간 서울 외곽순환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연혁 - 야탑동은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돌마면의 오야소동(梧野所洞),상탑동(上塔洞),하탑동(下塔洞)에 속한 지역이었다.1914년 일제가 부령 제111호에 의하여 이들을 모두 합하고, 오야소의 ‘야’자와 상탑, 하탑의 ‘탑’자를 취하여 야탑리라 하였으며, 1971년 9월 13일 도조례에 의거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었다.1973년 7월 1일 성남출장소가 성남시로 승격됨에 따라 성남시 야탑동이 되었다가, 1975년 3월 17일 성남시 돌마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89년 5월 1일에는 구제 실시에 따라 중원구에 편입되었다. 그후 분당 신도시 개발에 따라 분당출장소 관할을 거쳐서 1991년 9월 17일 분당구 야탑동이 되었으나 관할 행정동은 이매동이었다. 1993년 6월 5일 이매동에서 야탑동과 중탑동이 각각 독립된 행정동으로 나누어졌다. </PRE>

* 지명유래

<PRE> ‘야탑’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처음으로 명명되었으며, 그전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이 광주군 돌마면의 오야소동(梧野所洞), 상탑동(上塔洞), 하탑동(下塔洞)지역이었다.‘야탑’이라는 명칭은 일제가 전국의 부,군,면,동,리를 일제히 폐치, 분합할 때 오야소동의 ‘야(野)’자와 상탑,중탑의 ‘탑(塔)’자를 취하여 야탑동이라 한 것이다. ‘탑’에 대하여는 중탑동에서 따로 설명하였다. </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2동
 
 
'하탑'이라는 이름은 그전에 이 지역을 탑골 아래쪽 마을이라는 뜻으로

<PRE>- 위치 -하탑동은 분당구의 북부 동쪽에 위치한 동(洞)이다. 북쪽은 야탑동, 동쪽은 중탑동, 남쪽은 중탑동과 이매동, 매송동에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수정구 시흥동(사송동)과 접하고 있다. 동쪽의 영장산(매지봉)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모여 야탑천을 이루고, 이 물이 중탑동을 거쳐서 하탑동을 지나 탄천으로 흘러들어 간다. 탄천이 하탑동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관류하며 영장산의 물줄기를 받아들이고 있다.하탑로에 의하여 남쪽은 중탑동과 나누어지고, 벌말로, 송림로에 의하여 동쪽은 중탑동과 구분되고 있다. 서쪽은 낙생로에 의하여 수정구 시흥동과 나누어지며, 번영로에 의하여 북쪽으로는 야탑동과 경계가 되고 있다.- 연혁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의 오야소동(梧野所洞), 상탑동(上塔洞), 하탑동(下塔洞)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부령 제111호에 의거 이들 마을을 합하고, 오야소의 ‘야’자와 상탑·하탑의 ‘탑’자를 따서 ‘야탑리’라 하였다.1971년 9월 13일 도조례에 의거 광주군에서 나누어지고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 성남시로 승격하자 야탑동이 되었다. 1975년 3월 17일 시조례에 의거 성남시 돌마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5월 1일 중원구의 관할이 되었다.1991년 9월 17일 성남시 분당출장소가 분당구로 승격되면서 행정동인 이매동 관할구역내의 야탑동이 되었고, 이때 사송동의 일부 지역을 편입하였으며 1993년 1월 20일 이매동에서 하탑동이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PRE>

* 지명유래

<PRE>'하탑'이라는 이름은 그전에 이 지역을 탑골 아래쪽 마을이라는 뜻으로 ‘아래 탑골’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원래의 탑은 지금의 중탑골에 있었는데 이 탑을 기준으로 동쪽(산지쪽)은 윗탑골, 또는 상탑골이라 하였고 아래쪽(서쪽)은 아랫탑골, 또는 하탑골이라 불렀기 때문이다.그런데 분당 신도시의 이름에 대하여 1989년 성남시청 자문위원회에 보고된 내용에는 ‘금탑(金塔)’이라는 이름이 있다. 여기서 ‘금탑’은 금곡동의 ‘금(金)’자와 야탑동의 ‘탑(塔)’자를 합하여 만든 합성지명으로 분당 지역에서 이 일대의 ‘탑’자가 갖는 지역적 의미가 매우 컸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3동
 
 
중탑동은 본래 ‘탑골’이라 불렀던 곳이다.

<PRE>- 위치 -중탑동은 분당구의 북단 동측에 위치하며 광주군 광주읍과 접하고 있다. 동쪽은 한남정맥에 해당하는 이왕산, 영장산 줄기가 천연의 경계를 이루어 광주군 광주읍 직리와 접하고, 남쪽은 분당구의 이매동, 서현동과, 서쪽은 이매동, 하탑동, 야탑동과, 북쪽은 중원구 여수동과 접하고 있다. 큰매지봉, 곧 영장산 줄기에서 발원한 야탑천이 서쪽으로 흘러 탄천과 합류하며 북쪽으로는 여수동의 갈마치 일대에서 발원한 여수천이 흘러와 서쪽의 탄천에 합류하고 있다. 동(洞)의 서쪽은 송림로, 벌말로에 의하여 야탑동, 하탑동과 경계가 되고, 동의 남부 서쪽은 성남로에 의하여 이매동과 접하며, 하탑동과는 하탑로에 의하여 구분되고 있다.- 연혁 -이 지역은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광주군 돌마면 하탑동에 속한 곳이다.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전국의 행정구역이 통폐합 될 때 돌마면의 오야소동, 상탑동, 하탑동이 통합되어 야탑리(野塔里)가 되었으며, 1971년 9월 13일 도조례에 의거 광주군에서 분리되고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성남시 야탑동이 되었고, 1975년 3월 17일에는 시조례에 의거 돌마출장소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5월 1일에는 시조례에 따라 중원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9년 분당 신도시 개발계획에 따라 분당출장소 관할을 거쳐 1991년 9월 17일 분당구의 이매동에 속하게 되었으며 1993년 6월 5일 이매동에서 중탑동이 별도의 행정동으로 나누어졌다.</PRE>

* 지명유래

<PRE>중탑동은 본래 ‘탑골’이라 불렀던 곳이다. 이곳 중탑마을에 그전에 탑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탑이 언제, 누가 세웠고, 어떤 경위로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곳은 원래 윗탑골의 아래(서쪽)쪽에 해당되고 탑천과 가까운 오야소 마을과는 중간지점에 위치하므로 처음에는 광주군 돌마면 하탑리였다가 일제 강점기 이후에 ‘중탑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탑(塔)’은 본래 ‘탑파(塔婆)’의 준말이며, 탑파는 산스크리트어의 ‘stupa’ 또는 팔리어의 ‘thupa’를 한자로 음차(音借)한 것이다. 탑은 스리랑카에서는 ‘dagaba’ 미얀마에서는 ‘pagoda’라고도 한다. 탑은 공덕을 상징하고, 공양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동양적인 제천(祭天)의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동양의 탑이 신불의 강림처, 축원과 숭배의 상징이라면, 서양의 탑은 ‘바벨탑’이 뜻하듯이 하늘로 통하는 문으로 인간의 상승의지를 암시하고 있다.</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운중(雲中)' 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이름

<PRE>- 위치 -운중동은 성남시와 분당구의 서동단에 위치한 동(洞)이다. 광교산과 바라산, 청계산 줄기가 남북으로 뻗은 산맥의 동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은 분당구 판교동과 접하고 서쪽은 의왕시 청계동과, 남쪽은 용인시 수지읍과, 동남쪽은 분당구 금곡동과 접하고 있다. - 연혁 -운중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낙생면에 속한 곳으로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석운리(石雲里: 도루니), 산운리(山雲里: 하산운리, 중산운리, 상산운리), 대장리(大庄里: 혹은 태장리)로 나누어졌던 곳이다.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 폐치·분합에 따라 중산운리와 산운리는 합해서 운중리가 되었고, 두밀과 하산운리가 합해져 하산운리가 되었으며, 태릉, 장투리, 무두만이가 합해져 대장리, 바라미(망산), 도루니가 합해져 석운리가 되었다. 1971년 9월13일 도조례에 의거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운중동이 되었 다. 그후 다른 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975년 3월 15일 낙생출판소→1989년 5월 1일 중원구→1989년 6월 20일 분당지구개발지원사업소→1991년 7월 1일 분당출장소→1991년 9월 17일 분당구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PRE>

* 지명유래

<PRE>'운중(雲中)' 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이름이며 그전에는 중산운리(中山雲里), 산운리(山雲里), 하산운리(下山雲里) 등으로 이루어진 마을인데, 이때 산운리와 중산운리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운중리(雲中里)' 가 되었다. 이 지역은 석운동(石雲洞)이 '돌우니(도루니)' 이고 산운동(山雲洞)이 '뫼루니' 하산운동(下山雲洞)이 '아랫뫼루니' 로 불리워지던 것을 한자 이름을 붙이면서 돌 석(石), 뫼 산(山)을 붙이고 뒷소리 '루니' 는 '운(雲)'을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석운동=도루니' 는 '산으로 둘러 싸인 마을' '산운동=뫼루니' 역시 산골마을을 뜻하는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또 '운중동' 의 유래에 대하여 '산에 항상 구름이 머물러 있어서…' 운중동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어디인들 산이 없고 구름이 없으랴마는, 산과 구름은 꼭 풍류스런 멋이 아닐지라도 자연스럽게 조화가 되므로 '루니=룬'을 '운(雲)' 으로 표기한 옛 사람들의 뛰어난 작명법(作名法), 곧 현지 토착 발음에 유사한 한문표기와 아취를 곁들여 땅이름을 창출한데 대하여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1동
 
 
‘이무슬’과 ‘매화낙지’를 취하여 이매동이라 하였다.

<PRE>- 위치 -이매동은 분당구의 중심부에서 북쪽에 위치하며 탄천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전에는 지리적으로 광주군 돌마면의 중심부가 되어 한때는 면사무소, 지서 등이 있었다. 동쪽은 영장산 줄기(매지봉)에 의하여 서현동(율동) 중탑동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서현동과, 서쪽은 탄천을 사이에 두고 매송동과 마주 대하고 있다. 북쪽은 중탑동, 하탑동과 경계가 된다.이매동은 영장산 산줄기가 좌우로 흘러내린 그 안에 자리 잡아서 탄천을 향하여 서면(西面)하고 있는 형상이다. 동의 서쪽을 남에서 북으로 탄천이 흐르고, 이매동의 4개 소하천은 모두 동쪽에서 흘러내려 서쪽의 탄천으로 들어간다. 남쪽은 서현로에 의하여 서현동과, 북쪽은 성남대로에 의하여 중탑동, 하탑로에 의하여 하탑동과 경계가 되고 있다.- 연혁 -이매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지역으로 1760년대에는 문헌상 상동리 ,하동리 뿐이었으므로 어디에 속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후 돌마면 이매동(1906년)이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 때 광주군 돌마면 이매리가 되었다.1971년 9월 13일 경기도 조례에 의하여 경기도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73년 7월 1일 성남 출장소 → 시의 승격에 따라 성남시 이매동이 되었다.1975년 3월 17일 성남시 관내 돌마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89년 5월 1일에는 구제 실시에 따라 중원구에 편입되었다가 분당 신도시 개발과 함께 분당출장소 관할을 거쳐서 1991년 9월 17일 분당구 이매동이 되었다.1993년 6월 5일 이매동에서 행정동인 야탑동, 중탑동이 나누어지고, 1995년 10월 17일 수정구 사송동 일부가 분당구 이매동과 야탑동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렀다.</PRE>

* 지명유래

<PRE>'이매’라는 이름은 1906년에 만들어진 「구 한국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내력에 대하여는 몇 가지 설이 있다.첫째는, 이곳 물방아거리 마을 앞의 탄천사이에 있는 들판을 ‘이무슬들’이라 하는데, 이 마을이 풍수지리상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 곧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길지이므로 ‘이무슬’과 ‘매화낙지’를 취하여 이매동이라 하였다는 설이다. 두번째는 동쪽의 영장산(413.5m)을 ‘매지봉’이라고도 하는데, 이 줄기에 큰 매지봉과 작은 매지봉의 두 매지봉(梅址峰)이 있으므로 ‘이매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세번째는 이무기와 관련된 전설이다.옛날 탄천변의 구렛들에 물막이 방죽이 있어서, 주민들이 이곳에서 천렵을 즐기다가 한 아름되는 큰 물고기를 잡아 죽였다고 한다.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었는데, 그 물고기는 천년만에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려던 이무기였다.그 이무기가 마을 주민들 꿈에 나타나서 “저주를 받으리라” 하면서 소름끼치는 울음소리를 내고 사라졌다. 이에 이무기의 저주를 두려워한 마을 사람들이 상의한 후 이무기의 위령 승천제를 구렛들에서 지냈는데, 이때 제상 주위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다시 그날 밤 주민들 꿈에 이무기의 화신인 백발노인이 나타나 동민들의 정성에 보답하여 저주를 풀었다고 하며 그후 승천제를 지냈던 자리에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자라났으므로 ‘이매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마지막으로 〈진주 유씨 세보〉에는 ‘임의곡(任意谷)’또는 이매곡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임의술’로 불리웠다는 설도 있다.</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2동
 
 
매송(梅松)’이라는 이름은 분당 신도시 개발에 따라 1993년 새로 생겨난 이름이다.

<PRE>- 위치 -매송동은 분당구의 북단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탄천의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았으며, 북쪽은 하탑동, 수정구 시흥동(사송동)과 마주 대하고, 동쪽은 탄천을 사이에 두고 이매동과 마주 대하며, 남쪽은 서현동, 서쪽은 판교동과 접하고 있다.동의 서쪽에서 금토천(金土川), 성내천(城內川)의 물을 합한 운중천(雲中川)이 동류하다가 매송동을 가로 질러 방아교 부근에서 탄천에 합류한다.매송동은 북쪽에서 하탑로에 의하여 하탑동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낙생로에 의하여 수정구 시흥동과 접하며, 남쪽은 서현로에 의하여 서현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연혁 -매송동 지역은 분당구의 이매동 지역과 수정구의 사송동 지역 각 일부가 병합되어 1993년 1월 20일 매송동이 생겨났으며, 그 이전의 연혁은 분당구의 이매동 및 수정구 사송동의 연혁과 같다(이매동은 이미 설명하였다).사송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대왕면(大旺面) 사촌리(沙村里)와 송현동(松峴洞) 일부지역으로 일제 강점기인 1914년 부령 제111호에 의거 두 마을을 통합하고 그 머리글자를 따서 ‘사송동(沙松洞)’이라 하였다.1971년 9월 13일 도조례에 의거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제되었고, 1973년 7월 1일 성남시 사송동이 되었으며, 1975년 3월 17일 시조례에 의거 대왕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89년 5월 1일 시조례에 따라 수정구에 편입되었다.</PRE>

* 지명유래

<PRE>매송(梅松)’이라는 이름은 분당 신도시 개발에 따라 1993년 새로 생겨난 이름이다. 그 당시 건설부와 한국토지공사가 검토한 안과 성남시 지명위원회가 검토한 안에 대하여 협의하였는데, 이때 사송동, 이매동, 백현동의 일부를 합하였으므로 사송동과 이매동에서 가운데 한 글자씩을 취하여 ‘매송동(梅松洞)’이라 명명한 것이다.그런데 원 이름인 이매동의 ‘이매’는 ‘이무술’이란 토착지명이 한자화 되면서 ‘이매동(二梅洞)’이 되었고, 또 ‘사송동’은 자연부락인 ‘사촌(沙村)’과 ‘송현(松峴:솔고개)’의 머리글자를 따서 ‘사송동(沙松洞)’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것이다.한편 ‘사송동’의 이름의 연원이 된 ‘사촌(沙村)’은 탄천의 범람으로 마을주변에 모래사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며, ‘송현(松峴)’은 고갯마루에 소나무가 많아서 ‘솔고개’라 불렀던 곳이다.</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1동
 
 
'신기'라는 이름은 토박이말의 '샛터'에 대한 한자식 표기

<PRE>- 위치 -신기동은 성남시 분당구의 남쪽 중앙부에 위치하며 탄천이 동의 중앙을 관류하고 있다. 북쪽으로 정자동, 서쪽은 경부고속도로를 경계로 금곡동, 남쪽 역시 금곡동, 동쪽은 불정동과 접하고 있다. 남·북을 가로 지르는 내정로에 의하여 불정동, 정자동과, 백현로에 의하여 북쪽의 초림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 연혁 -신기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낙생면 금곡리에 속한 지역이었다. 1971년 9월 13일 광주군에서 성남출장소가 분리·독립하면서 낙생면 금곡리에 속하였고, 1975년 3월 17일 성남시 낙생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89년 5월 1일 성남시 중원구에 편입되었다가 1991년 9월 17일 분당출장소가 분당구로 승격될 때 금곡동에 속하였다. 1996년 1월 15일 분당구 금곡동과 정자동 일부를 나누어 행정동인 신기동을 신설하였으며 그전 법정동인 정자동, 궁내동, 금곡동의 각 일부에 걸쳐 있었으나 법정동간 경계조정으로 현재 법정동은 정자동이다.</PRE>

* 지명유래

<PRE>신기’라는 이름은 토박이말의 ‘샛터’에 대한 한자식 표기이며, 지금은 폐동이 된 탄천변의 서쪽 샛터말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곳은 본래 농경지로 들판이었으나 차츰 취락이 형성되어 큰 마을의 집단취락이 된 곳이다.토박이말인 ‘샛터말’은 ‘새로(新) 터를(基)잡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전국의 취락지 땅이름 중에서 같은 이름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한문 표기로는 ‘신기’ 또는 ‘신대(新垈)’로 쓰기도 한다. ‘새’는 오늘날 대부분 ‘새=신(新)’으로 의역되고 있으나. 지역에 따라서는 ‘새’가 사이(間)를 뜻하는 ‘새’로서 들 사이의 마을, 산 사이의 마을, 골짜기 사이의 마을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또 새터의 ‘새’는 새=풀(草), 새=동(東), 새=조(鳥), 쇠=새=철(鐵), 소=새=우(牛)의 뜻을 지닌 경우도 있다. 새터=신기(신대)라는 이름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모든 취락지가 처음 터를 잡으면 ‘새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용 쓰고 있는 샛별, 새벽, 샛바람의 ‘새(샛)’은 동쪽을 뜻하는데.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곳이요, 날이 밝아오는 곳이며, 태양의 고향이자 밝음의 원천이 된다. 이와 같이 ‘새’의 어원이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게 된 까닭은 새=동쪽이 곧 ‘새로움’을 뜻하면서 신성함을 갖춘 해=새가 되어 5일=닷새, 6일=엿새라 함과 같이 우리 민족의 광명이세(光明理世)사상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샛터’에서 ‘터’는 텃밭, 텃새, 일터, 장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떤 자리(곳), 즉 특정한 용도에 공여되는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터’의 중세어 표기는 ‘터ㅎ’로써 ‘ㅅ다(地)’와 같은 말의 뿌리로 보고 있다.</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2동
 
 
조선 중기 이후 왕족인 전주 이씨의 세거지가 되면서 그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PRE>- 위치 - 정자동은 성남시의 분당구 중심부에 위치하며 탄천이 동의 서쪽을 남출북류(南出北流)하고 있다. 불곡산의 북서쪽 기슭에 해당되며 분당 신도시 개발로 인하여 기존의 정자동 행정구역에서 불정동, 신기동 등이 새로 생겨나면서 면적이 크게 축소되었다. 동의 북쪽은 백현로에 의하여 수내동·내정동과, 동의 남쪽은 정자로에 의하여 불정동과, 동의 서쪽은 내정로에 의하여 신기동과 구분되고 있다.- 연혁 -정자동 지역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정자동(亭子洞)이었다. 일제 때인 1914년 부령 제111호에 의거 전국의 부·군·면·리 등을 통폐합 할 때도 광주군 돌마면 정자리였으며 1971년 9월 13일 도조례 제470호로 광주군에서 성남출장소가 분리·독립할 때 성남출장소에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1일 성남출장소가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성남시 정자동이 되었다.1975년 3월 17일 시조례 제133호에 따라 성남시 돌마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89년 5월 1일에는 성남시 중원구 정자동이 되었다.1991년 7월 1일 성남시에 분당출당소가 설치되고, 같은 해 9월 17일 분당출장소가 분당구로 승격될 때 여기에 편입되었으며, 분당 신도시 개발 후인 1996년 1월 15일 성남시 조례에 의거 법정동인 정자동을 행정수요에 맞게 신기동과 불정동, 정자동 등으로 나누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PRE>

* 지명유래

<PRE>정자동’이란 이름은 이 지역이 조선 중기 이후 왕족인 전주 이씨의 세거지가 되면서 그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곧 조선 제 9대 임금 성종의 아들(12남) 무산군(茂山君)의 제 5자인 태안군(泰安君) 이팽수(李彭壽:1490∼1525)의 묘역과 그 자손들이 터를 잡았으며, 태안군의 증손이 되는 이경인(李敬仁:1575∼1642)이 이곳에 낙향하면서부터이다.이경인은 자를 극보(克甫), 호를 정촌(亭村)이라 하였고, 1642년 (인조2)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원종공신이 되고 함흥판관, 안산현감, 이천도호부사에 제수되었다.그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내놓고 이곳 탄천변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한운야학(閑雲野鶴)으로 소일하였다. 그후 그가 즐기던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이 ‘정자리’가 되었고, 그의 호 ‘정촌’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정자는 옛 사람들이 자연에 귀의하여 맑고 깨끗한 산천에 심신을 씻어내는 한편 혼탁한 세상으로부터 떠나 있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이다.정자는 산이 수려하고 물이 맑으며 전망이 탁 트인 곳에 짓는 것이 상례로 옛 사람들이 자연에 동화되고, 자연과 더불어 삶을 같이 하려고 하였던 정신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절벽 위, 강가, 산봉우리 등 어디에 존재하건 인공구조물인 정자(건물)가 자연과 하나가 되어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정자의 멋과 풍류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이규보는 그의 <사륜정기>에서 ‘사방이 툭 트이고, 텅 비고, 높다랗게 만든 것’이라고 하였지만 <후한서>에는 ‘여행길에 숙식시설이 있고, 관리가 백성의 시비를 가리는 곳’이라고도 한 것을 보면 「정자」의 의미가 옛날의 ‘주막집 정’ ‘역말 정’ ‘기를 정’ ‘머무를 정’ ‘우뚝 솟을 정’에서 오늘날의 그냥 ‘정자 정(亭)’으로 통용되어온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3동
 
 
불정동 지역은 전체가 그전 정자동에 속한 지역

<PRE>- 위치 -불정동은 성남시 분당구의 동남쪽에 위치한다. 동쪽은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과 불곡산 줄기에 의하여 나누어지며, 남쪽은 구미동과 금곡동, 서쪽은 신기동, 북쪽은 수내동 정자동과 접하고 있다. 정자로가 동서로 뻗으면서 정자동의 경계를 이룬다. 분당을 남북으로 관류하는 탄천의 동쪽에 자리잡은 신설(新設)동으로 분당 신도시 개발로 인하여 기존의 행정구역이 새도시의 구조와 아파트 입지여건에 맞추어 관할 행정동 편제가 바뀌었는데, 1996년 1월 15일 정자동을 나누어 불정동을 신설하였다.- 연혁 -불정동 지역은 조선시대의 광주군 돌마면 정자리(亭子里)였다. 일제 때인 1914년 부령 제111호에 의거 전국의 부, 군, 면, 리 통폐합 시에도 그대로 정자리라 하였다. 1971년 9월 13일 광주군에서 성남 출장소가 분리·독립할 때 성남 출장소에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1일 성남 출장소가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성남시 정자동이 되었다. 1975년 3월 17일 성남시 조례에 의거 성남시 관내의 돌마·낙생·대왕 출장소가 설치되었는데, 이때 돌마 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5월 1일 시 조례에 따라 성남시 중원구에 소속되었다. 1991년 7월 1일 성남시에 분당출장소가 설치되고, 같은 해 9월 17일 동 출장소가 분당구로 승격될 때 여기에 속했다가 1996년 1월 15일 성남시 조례에 의거 법정동인 정자동을 행정편의상 신기동과 불정동, 정자동으로 나누어 현재에 이르렀다.</PRE>

* 지명유래

<PRE>불정동 지역은 전체가 그전 정자동에 속한 지역으로 동 관내에 위치한 불곡산(佛谷山)에서 ‘불(佛)’ 자와 정자동에서 ‘정(亭)’자를 취하여 ‘불정동(佛亭洞)’이라 한 것이다. 불곡산은 분당 남쪽지역의 진산(鎭山)이라 할 수 있으며, 불정동의 동쪽에 위치하여 광주군과 경계를 이루는 높이 344.5m의 산이다. 여기서 ‘불(佛)’은 부처, 불타, 불가, 불교를 상징하는 말로서 범어의 Buddha 의 음역이기는 하지만, ‘불곡산’의 ‘불‘이 꼭 불교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고대어에서 ‘밝’이 광명을 뜻하면서 벌, 불, 부리, 박, 백, 배 등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거니와, 이런 이름들이 뒷날 불교적 영향을 받아 ‘불(佛)’ ‘비로(毘蘆)’ 등으로 표기되었으며 ‘불곡산’이란 이름도 경기도 양주군, 북한의 평원군 등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 정자동의 ‘정자’에 대하여는 정자동편에서 따로 설명하였다.</PRE>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판교(板橋)' 라는 이름은 그전 낙생면 소재지인 이곳 '너더리' 마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PRE>- 위치 -판교동은 분당구의 북쪽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 고속도로가 동(洞)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판교-구리간 서울외곽 순환고속도로가 동의 북단을 동·서로 지나가고 있다. 또 동의 동쪽에는 남·북을 가로질러 내곡-분당간 도시고속화도로가 지나간다. 북쪽은 수정구 신흥동, 동쪽은 매송동, 동남쪽은 서현동과 초림동, 남쪽은 정자동, 신기동과 금곡동, 서쪽은 운중동과 접하고 있다. 동의 서쪽에는 운중천이 서출동류(西出東流)하다가 삼거리 동쪽에서 금토천을 합한 후 탄천으로 흘러든다. - 연혁 -판교동 지역은 법정동인 백현동, 삼평동, 판교동을 하나로 통합하여 행정동인 판교동 관할로 된 곳이다. 판교동은 그전에 광주군 낙생면 판교리였는데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너분바위(광암)를 병합하여 판교리라 하였다. 삼평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낙생면 삼거리와 보평리 지역이었는데 1914년 이를 통합하여 '삼평리(三坪里)' 로 고쳤으며, 백현리는 변동이 없었다. 1971년 9월 13일 도조례에 의거 경기도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성남시 관내의 판교동, 백현동, 삼평동이 되었다. 1975년 3월 17일 시조례의 의거 낙생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89년 5월 1일 중원구에 편제되었다. 1991년 7월 1일 성남시 분당출장소가 설치되고, 이어서 1991년 9월 17일 동 출장소가 분당구로 승격되면서 분당구에 딸린 삼평동, 백현동, 판교동이 되었으나 1973년부터 관할 행정동은 판교동이다.</PRE>

* 지명유래

<PRE>'판교(板橋)' 라는 이름은 그전 낙생면 소재지인 이곳 '너더리' 마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너더리는 '널다리' 가 변한 말로 보고 있으며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옮기면서 '널 판(板)' 자와 '다리 교(橋)' 자를 취하여 지금의 '판교' 라는 이름이 생겼다. 곧 옛날 이 마을의 운중천 위에 판자로 다리를 놓고 건너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널' 은 '넓다' 는 뜻이거나 '늘어졌다(산줄기, 또는 하천이 길게 늘어진 모양)' 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 전국적으로 '널재' '널문이' '널다리' 등의 이름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널' 이 지형상 '넓' 거나 '늘어' 진 곳에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더리' 의 경우 '넓은 들' 이 변하여 '너드리' 가 되고, 너드리가 다시 '너더리' 로 된 경우도 많다. 곧 넓거나 늘어졌다는 뜻의 '널' 이 널(너르,너리), 놀(노루,노리), 늘(느리,느르) 등이 널=판(板), 들(달=다리)=교(橋)로 변한 경우도 나타나고 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PRE>
 
경기도(京畿道)
 
 
‘경기’란 ‘서울을 둘러싼 그 문지방’이라는 뜻이다.

<PRE></PRE>

* 지명유래

<PRE>‘경기’란 ‘서울을 둘러싼 그 문지방’이라는 뜻이다. 곧 도읍지의 주변지역을 말한다. ‘경기’라는 이름은 1018년(고려 현종 9)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충청도의 북부 일부가 들락날락하였으나 대체로 경기좌도는 한강이남 지역, 경기우도는 한강 이북지역이 해당되었다. (좌.우도는 서열상 좌도가 먼저이다.) 관찰사는 처음 수원에 주재하였다가 뒤에 광주(廣州)로 옮겼으며, 감영을 기영(畿營), 감사(관찰사)를 기백(畿伯)이라 부른 것도 모두 경기의 ‘기’를 붙인 것이다.</PRE>
 
고양(高陽) 일산(一山)
 
 
- 한씨 미녀와 고구려 안장왕이 상봉한 곳

<PRE>◆ 위 치 :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白石), 마두동(馬頭), 장항동(項) 등 일원◆ 면 적 : 4,760,053평(15,735,712m2)◆ 연 혁 :- 고양은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달을성현(達乙省)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이 고봉(高峰)으로 고쳐서 교하군에 딸린 현이 됨.- 행주(幸州)는 고구려의 개백현(皆白)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 우왕(遇王) 또는 왕봉(王逢)으로 고쳐 한양군에 딸린 현이 되었고 고려초(940년)에 행주 또는 덕양(德陽)이라 함.- 1394년(조선 태조 3) 고봉에 감무를 두고 행주, 부원, 황조향을 붙였으며 1413년(태종13) 고봉과 덕양의 두 현을 합하고, 글자를 합하여 고양으로 고침.- 1471년(성종 2) 경릉(敬陵)과 창능(昌陵)의 두 능이 있으므로 고양군으로 승격됨.- 1504년(연산군 10) 군의 땅을 비워서 놀이터를 만들고, 그 나머지 땅은 이웃 고을에 갈라붙임.-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에 의하여 다시 고을이 복구됨.-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때 지방관제 개혁으로 고양군이 됨.-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때 경성부의 서강, 용산, 연희, 은평, 숭신, 인창, 두모, 한지면의 8개면을 병합함.- 1936. 4. 1 용산, 서강, 연희, 한지 등이 경성부로 편입됨.- 1949. 8. 15 은평, 숭인, 뚝도 등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됨.- 1992. 2. 1 고양군이 고양시로 승격됨.- 1996. 3. 1 고양시에 덕양구와 일산구를 설치함.</PRE>

* 지명유래

<PRE>- '고양(高陽)'이라는 이름은 1413년(조선 태종 13)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치 분합할 때 고봉과 덕양(행주)의 두 고을을 합하고 여기서 한 글자씩 취하여 고양현이 되었다.- 고양의 옛 이름인 달을성- 고봉에 있어서 '달을'은 tara, 또는 toro를 표기하면서 산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한편 고을(읍)을 뜻하는 고어로 보고 있다. 곧 '달=고'는 높다는 뜻으로 산을 나타내면서, 읍리(邑里)를 나타내는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보고 있다.)- 한편 행주(幸州)의 옛 이름인 왕봉(王逢)에 대하여는 한씨미녀가 높은 산 봉우리에 올라가 봉화를 올렸다. 이에 사랑을 언약한 고구려 안장왕이 달려와 서로 상봉하였고, 이로 인하여 왕봉(王逢)이라 부른다고 한다.- 일산구(一山)의 이름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곧 1904~1905년 경 일제가 경의선을 부설할 때 송포면 덕이리 한산 부락의 '한메'를 일산(一山)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일산=고봉산을 뜻하며, 우리말로는 큰 산을 뜻하는 한산인데 이것을 일제가 일산(一山)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일산구 백석동(白石)은 원래 흰둘리, 핸들리라 부르던 곳이며 크기가 약 1m 쯤 되는 흰 돌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마두동(馬頭)은 원래 '말머리'라고 부르던 곳이다. 정발산에서 내려다보면 마을전체가 말의 머리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항동(獐項)은 그전에 '노루메기'라 부르던 곳이다. 노루=장(獐)이며, 메기→목=항(項)이 된 것이다. 마을 생김새가 노루목처럼 생겼다는 설과 정발산에 노루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너르(넓은)목'이 노루목으로 변전한 경우도 있다</PRE>
 
고양(高陽) 중산(中山)
 
 
- 고봉산이 고양의 중심 산이라는 뜻

<PRE>◆ 위 치 :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一山) 일산동, 탄현동(炭峴) 일원◆ 면 적 : 257,398평(850,902m2)</PRE>

* 지명유래

<PRE>- 중산(中山)은 고봉산록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이며, 혹은 고봉산이 고양군의 중심이 되므로 '중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생각컨대 '고봉산'은 고양의 옛 고을 이름인 '고봉'을 붙인 것으로 보아 그 당시 고을의 진산(鎭山:고을을 지켜주는 산)으로 볼 수 있으니 '고을의 중심 산'이라는 설명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중산에 인접한 왜굴은 임진왜란때 왜적이 고봉산 전투에서 패하여 이 마을로 후퇴해 오다가 이 곳에서 포위되자 굴복한 곳이므로 왜굴 이라 부른다고 한다.- 탄현동(炭峴)은 그 전에 숯을 구워서 내다 팔았던 곳으로서 숙고개=숯고개라 부르던 곳이다. 본래 참나무가 많았으므로 참숯을 구워서 팔았던 곳이라고 한다</PRE>
 
구리(九里) 교문(橋門)
 
 
- '한다리'와 '이문안' 마을을 합한 이름

<PRE>◆ 위 치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일원◆ 면 적 : 100,964평(333,765m2)◆ 연 혁- 구리시 지역은 원래 양주군의 구지면(九旨)과 망우리면(忘憂里)으로 되어 있었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때 두 면을 합하고 '구(九)'자와 '리(里)'자를 합하여 양주군 구리면이 됨.- 1963. 1. 1 서울시 확장에 따라 망우리 등이 서울시에 편입됨.- 1973. 7. 1 구리면이 구리 읍으로 승격됨.- 1980. 4. 1 양주군에서 남양주군이 분리됨.- 1986. 1. 1 구리 읍이 구리시로 승격됨</PRE>

* 지명유래

<PRE>- '구리(九里)'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구지면(九旨)과 망우리면(忘憂里)이 합해지면서 '구리면'이 탄생하였다.- 그전 구지면의 '구지'는 한강 북안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지형이 곶을 이룬 곳이므로 고지→구지가 된 것이다.- 망우리면의 '망우(忘憂)'는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다. 이태조가 서울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의 기초를 세웠으나, 자신이 묻힐 땅을 정하지 못하여 답답하게 여기던 차에, 다행히 신후지지(죽어서 묻힐 곳)를 검암산(동구릉)에 정하고 돌아오다가, 이 고개에서 능 쓸 자리가 있는 산을 바라다보며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겠노라"하였으므로, 그 뜻을 따서 망우리 고개라 한다.- 교문동(橋門)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생겨난 이름으로서 그전 백교(白橋:일명 한다리)와 이문안(里門) 마을 등을 합하고 두 마을에서 '교'자와 '문'자를 취하여 만든 이름이다</PRE>
 
구리(九里) 토평(土坪)
 
 
- 그전 '토막'과 '평촌'마을이 합해진 이름

<PRE>◆ 위 치 :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 수택동(水澤), 교문동 일원◆ 면 적 : 236,920평(783,207m2)</PRE>

* 지명유래

<PRE>- 토평동(土坪)은 그전 양주군 구지면에 속하였던 곳으로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때평촌리(坪村)와 토막(土幕)마을 등을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 글자를 따서 토평동이라하였다.- 토막리는 그전에 흙으로 쌓은 막이 있어서 토막이라 불렀던 곳이며, 평촌은 벌말이라부르던 곳이다.- 1980년 남양주군에 편입되었다가 1986년 구리읍이 구리시로 승격되면서 토평동이 되었다.- 수택동(水澤)은 늪말, 수늪이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옛날 어느 부자가 어찌나인색하였든지 시주를 청하는 중에게 쌀대신 쇠똥을 퍼다준 죄로 그 집터가 늪이 되었다고하며 이를 장자늪, 장자소라 불렀다. 수택동은 늪이 많아서 부르는 이름이다</PRE>
 
기전(畿甸) 
 
 
경기도의 별칭이며, 기중(畿中), 또는 적기(赤畿)라고도 한다.

<PRE></PRE>

* 지명유래

<PRE>경기도의 별칭이며, 기중(畿中), 또는 적기(赤畿)라고도 한다. ‘기(畿)’는 원래 중국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5백 리 이내의 땅을 말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서울을 둘러싼 땅, 그 주변지역을 말한다. 곧 ‘기’가 문지방, 뜰, 또는 안마당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PRE>
 
기호(畿湖)지방
 
 
경기도지방과 호서(충청도)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PRE></PRE>

* 지명유래
 
김포(金浦) 장기(場基) 
 
 
- 옛날 5일장이 섰던 장터거리

<PRE>◆ 위 치 : 경기도 김포시 장기동 일원◆ 면 적 : 253,000평(836,364m2)◆ 연 혁- 김포지역은 백제의 금포현(黔浦)으로서 757년(신라 경덕왕 16) 지금 이름인 김포(金浦)로 고쳐서 장제군(부평)에 붙임.- 1182년(고려 명종 2) 감무를 둠.- 1198년(신종 원년) 임금의 태를 묻은 곳이라 하여 현령으로 승격함. (현감보다 현령이 위이며, 현감은 종전의 감무를 두었던 곳임)- 1414년(조선 태종 14) 양천현(陽川)을 합하고 김포와 양천의 머리글자를 따서 김양현(金陽)이라 하였다가 그해 10월 다시 나누고 양천현은 금주(시흥군)로, 김포는 부평부에 붙임.- 1416년(태종 16) 김포현으로 복구되어 현령을 둠.- 1627년(인조 5) 양주로부터 원종(인조의 생부)의 묘소를 이장하고 그 10년(1632)에 군으로 승격됨.-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으로 지방관제를 개정하여 인천부에 딸렸다가 그 다음해 경기도 관할이 됨.- 1914. 4. 1 일제에 의한 지방행정구역 페합에 따라 통진군의 11개면, 양천군의 5개면을 합하여 김포군이 됨.- 1963. 1. 1 양동(陽東) 양서(陽西) 2개면이 서울시로 편입됨.- 1979. 5. 1 김포면이 김포읍으로 승격됨.- 1998. 4. 1 김포군이 김포시로 승격됨</PRE>

* 지명유래

<PRE>- 김포의 옛 이름 금포의 '금(黔)'은 '검'을 나타내기 위하여 표기한 글자이며 개=포 이므로 김포는 '검개'라는 말이 된다.- '검개'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김포의 지형을 나타낸 말로서 검=금(金)=금(黔)이 모두 '큰 개펄'을 뜻하는 이름으로 풀이된다.- 또 '김포(金浦)'라는 이름에 대하여는 고려 때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길가에서 금덩어리를 주웠다가 그 금으로 인하여 형제간의 우애가 상할까 걱정되어 한강에 금을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하여 그곳을 '투금뢰' 또는 '투금탄(投金灘)'이라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김포'라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장기동(場基)은 본래 '장터'·'장텃거리'라 부르던 곳으로 5일장이 섰던 곳이다. 그전 김포군의 석한면으로서 장터→장기로 한자화한 이름이다</PRE>
 
남양주(南楊) 창현(倉峴)
 
 
- '화도'는 서로 화합하여 잘 살라는 뜻

<PRE>◆ 위 치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和道) 창현리 일원◆ 면 적 : 109,552평(362,155m2)◆ 연 혁- 양주지역은 옛 풍양현(豊壤)과 양주(楊州)고을을 나누어서 살펴봄.- 양주는 고구려의 매성(買城) 또는 창화군(昌化)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 내소(來蘇)로 고침.- 940년(고려 태조 23) 견주(見州)로 승격되고 1018년 (현종 9) 지금의 이름인 양주(楊洲)로 고치고 치소를 한양으로 옮김.- 1067년(문종 21) 남경(南京)으로 개칭하고 유수관(留守官)을 둠.- 1394년(조선 태조 3)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한성부 또는 한양부라 하였으며 양주고을을 동촌(東村) 대동(大洞)으로 옮김.- 이때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부(府)로 올림.- 1397년(태조 6) 부청을 견주(주내면 고읍리)로 옮기고 양주라 하다가 1413년(태종 13) 도호부가 됨.- 1429년(세종 11) 목(牧)이 되고 진(鎭)을 두었다가 1504년(연산군 10) 양주 고을을 없애고 그 땅을 비워서 놀이터로 만들었으며, 그 나머지 땅을 갈라서 이웃 고을에 나누어 붙임.- 1511년(중종 6) 다시 주로 복귀하고 고을을 불국산 남쪽에 세움.- 풍양현은 고구려 골의노현(骨衣奴)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지명을 당나라식으로 바꿀때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에 딸린 현이 됨.- 940년(고려 태조 23) 풍양(豊壤)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양주에 붙였다가 다시 포천에 붙임.- 1427년(세종 9) 다시 양주에 붙였는데 진건, 진접, 별내, 미금, 구리 지역이 됨.-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시 양주군이 됨.- 1963. 1. 1 의정부읍이 시로 승격되어 양주군에서 분리됨.- 1980. 4. 1 구리읍, 미금읍, 별내면, 진접면, 진건면, 수동면, 화도면, 와부면이 남양주군으로 분리됨.- 1981. 7. 1 동두천읍이 시로 승격되어 양주군에서 분리됨</PRE>

* 지명유래

<PRE>- 양주(楊州)는 우리말의 '버들골'로 풀이되는데 이 버들골의 '버들'을 '박달'의 갈래말로 본다.- 박달의 은 「머리 박」의 박, 「태백산」의 백, 들판의 벌 또는 불, 부리가 모두 배달=박달에서 비롯된 말이다.- 남양주(南楊州)는 양주군을 나누면서 군의 남쪽을 뜻하여 붙인 이름이다.- 화도읍(和道)은 본래 하도면(下道)이라 부른 곳이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는 큰 길 아래쪽을 하도면, 위쪽을 상도면이라 하였는데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상도면 하도면을 합하고 서로 화합하라는 뜻에서 '화도면'이라 한 것이다.- 창현리(倉峴) 역시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창벌(마현),장현리(獐峴)등을 합하고 두 마을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창현리라 하였다</PRE>
 
남양주(南楊州) 마석(磨石)
 
 
- '맷돌모루'라고 부르던 맷돌 생산지

<PRE>◆ 위 치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和道) 마석우리(磨石隅) 일원◆ 면 적 : 135,000평(446,281m2)</PRE>

* 지명유래

<PRE>- '마석(磨石)'이란 곡식을 빻는데 쓰이는 도구로서 맷돌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지명어미(語尾)로서의 '우(隅)'는 모퉁이-모루 또는 머리-모루를 나타내는 한자로서 당모루, 솔모루, 돌모루 등 다양한 이름들이 있다.- 마석우리는 원래 양주군 하도면 지역으로서 맷돌이 많이 나는 곳이었다고 하며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화도면에 편입된 곳이다</PRE>
 
남양주(南楊州) 평내(坪內)
 
 
- 의안대군 이화의 궁집이 있었던 곳

<PRE>◆ 위 치 :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일원◆ 면 적 : 257,000평(849,587m2)</PRE>

* 지명유래

<PRE>- 평내동(坪內) 역시 남양주시 호평동과 마찬가지로 양주군 상도면(上道)에 속하였던 곳이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그전 담안이라고 부르던 장내리(墻內), 궁평리(宮坪)등을 합하고 두 마을에서 '평'자와 '내'자를 취하여 평내리가 되고 미금면에 편입된 곳이다.- 궁평리는 조선초의 개국공신으로 정몽주등을 죽였고, 또 정도전의 난, 박포의 난에 공을 세운 의안대군 이화(李和)의 궁이 있었으므로 궁평리라 불렀다</PRE>
 
남양주(南楊州) 호평(好坪)
 
 
- '호평(好評)' 받는 사업지구 이름으로 적합

<PRE>◆ 위 치 :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 평내동(坪內)일원◆ 면 적 : 329,000평(1,087,603m2)</PRE>

* 지명유래

<PRE>- 호평리(好坪)는 그전 양주군 상도면에 속하였던 마을이다. 1914년 일제에 의한 전국의 행정구역 폐치.분합때 호만리(好滿), 평촌(坪村:벌말)등을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호평리라 하였으며 미금면(미금읍)에 편입된 곳이다.- 호평은 '호평(好評)'으로도 전달될수 있는 명칭이므로 호감이 가는 사업지구 명칭이라 할 수 있다.</PRE>
 
동두천(東豆川) 생연(生淵)
 
 
- '생골'과 '연동'을 합하여 생긴 이름

<PRE>◆ 위 치 :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 지행동(紙杏) 일원◆ 면 적 : 183,000평(604,959m2)◆ 연 혁 :- 양주는 '고구려의 매성(買城)' 또는 '창화군(昌化)'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 내소(來蘇)로 고침.- 940년(고려 태조 23) 견주(見州)로 승격되고 1018년(현종 9) 지금의 이름인 양주(楊州)로 고쳐 한양으로 옮김.- 1067년(문종 21) 남경(南京)으로 개칭하고 유수관(留守管)을 둠. 1394년(조선 태조 3)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한성부 또는 한양부라 할때 양주고을을 동촌(東村) 대동(大洞)으로 옮김.- 이때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부(府)로 올림.- 1397년(태조 6) 부청을 견주(주내면 고읍리)로 옮기고 양주라 하다가 1413년(태종 13) 도호부가 됨.- 1429년(세종 11) 목(牧)이 되고 진(鎭)을 두었다가 1504년(연산군 10) 양주 고을을 없애고 그 땅을 비워서 놀이터로 만들었으며, 그 나머지 땅을 갈라서 이웃 고을에 나누어 붙임.- 1511년(중종 6) 다시 주로 복구하고 고을을 불국산 남쪽에 세움.- 풍양현은 고구려 골의노현(骨衣奴)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지명을 당나라식으로 바꿀때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에 딸린 현이 됨.- 940년(고려 태조 23) 풍양(風陽)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양주에 붙였다가 다시 포천에 붙임.- 1427년(세종 9) 다시 양주에 붙였는데 진건, 진접, 별내, 미금, 구리 지역이 됨.- 양주는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시 양주군이 됨.- 1963. 1. 1 의정부읍이 시로 승격되어 양주군에서 분리됨.- 1981. 7. 1 동두천읍이 시로 승격되어 양주군에서 분리됨</PRE>

* 지명유래

<PRE>- 동두천(東豆川)은 양주군 이담면(伊淡)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동편내가 머리를 동쪽으로 두르고 흘러 들어오므로 이 내를 동두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원래의 동두천은 동편내, 탑동천, 탑골내라고 부르던 개울로서 탑동 동쪽 국사봉.왕산.해룡산에서 발원하는 내를 뜻한다.- 생연동(生淵)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생골리, 연동리(淵洞)등을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생연동이 되었다.- 생골리는 그전에 산골이 났던 곳이므로 산골=생골이 되었고 연동은 못골이라 부르던 마을이다.- 지행동(紙杏)은 그전 지동리(紙洞)와 행단(杏丹)마을을 1914년에 합하고 그 머리글자를 딴 이름이다. 지동은 조이골(종이골)이라 하여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었던 곳이며 행단은 은행나무단이 있었다고 한다.</PRE>
 
부천(富川) 상동(上洞)
 
 
- 옛 석천면의 위쪽이 되는 웃말 지역

<PRE>◆ 위 치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상동, 송내동 일원◆ 면 적 : 9,433,000평(3,118,347m2)</PRE>

* 지명유래

<PRE>- 상동(上洞)은 '웃말'이라고 부르던 곳으로서 부평군 석천면의 위쪽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사래리 또는 사랑리(沙浪)라고도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계남면(소사읍)의 상리(上)가 되었고, 1973년 부천시에 편입되어 상동이 된 곳이다.- 인천시와 접한 지역이기 때문에 생활권이 크게 부천권과 인천권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곳이다.</PRE>
 
부천(富川) 심곡(深谷)
 
 
- '깊은골'이라고 불렀던 골짜기 마을

<PRE>◆ 위 치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素砂) 심곡동, 송내동(松內) 일원◆ 면 적 : 40,680평(134,479m2)◆ 연 혁- 부천시 지역은 백제의 주부토군(主夫吐)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 통일신라에서 당나라 식으로 지방제도를 바꿀 때 장제(長堤)로 고침.- 940년(고려 태조 23) 수주(樹州)로 고치고 995년 단련사(團練使)를 둠.- 1005년(목종 8) 단련사를 폐지하고 1018년(현종 9) 지주사(知州事)로 고침.- 1150년(의종 8) 안남(安南) 도호부라 하였다가 1215년 (고종 2) 계양(桂陽) 도호부로 고침.- 1308년(충렬왕 34)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 (충선왕 2) 부평부(富平府)로 됨.- 1413년(조선 태종 13) 다시 도호부가 되고 1438년(세종 20) 현령으로 강등되었다가 1446년(세종 20) 복구됨.- 1505년(연산군 11) 고을 사람이 환관 김순손을 죽였으므로 고을을 없앴다가 그 다음해(1505) 복구됨.- 1685년(숙종 11) 진영을 설치하였고, 1698년(숙종 24)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07년(숙종33) 복구됨.-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으로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부평군이 됨.- 1914. 3. 1 일제의 부군면 폐합에 따라 인천부의 12개면과 남양군의 2개면 등을 합하여 부천군이 됨.- 1973. 7. 1 소사읍 일원이 부천시로 승격됨.- 1975. 10. 1 김포군 오정면이 부친시에 편입됨</PRE>

* 지명유래

<PRE>- '부천(富川)'이라는 이름은 1914. 3. 1 전국의 행정구역을 새로 정할 때 이곳 부평군(富平)과 인천부(仁川) 남양군의 일부를 합하고 부천의 '부(富)'와 인천의 '천(川)'자를 취하여 부천군이 되었다.- 소사구(素砂)는 그전 부평군 옥산면 소사리였다가 1899년 경인선 개통때 소사역이 설치된 곳이다.- 본래 '소새'라 불렀다고 하며 모래가 많았으므로 '소사'라 부른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심곡동(深谷)은 그전 부평군 석천면에 속하였던 곳으로 마을이 깊은 골짜기가 된다하여 깊은 골, 깊은 구지라 불렀으며 이를 훈역하여 심곡동이 되었다.- 송내동(松內)은 '솔안말'이라 부르던 곳이다. 마을이 소나무로 아늑하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며, 부평군 석천면에 속하였던 곳이다</PRE>
 
부천(富川) 작동(鵲洞)
 
 
- '까치울', '까치말'이라 부르던 곳

<PRE>◆ 위 치 :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梧亭) 작동 일원◆ 면 적 : 63,712평(210,618m2)</PRE>

* 지명유래

<PRE>- 오정구(梧亭)는 그전 부평군 상오정면(上吾丁)이었다. 그런데 오정(吾丁)→오정(梧亭)의관계가 확실하지 않다.- 이 지역은 머귀정이, 오동정이라 부르던 곳으로서 오동나무 정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하는데, 이를 근거로 한다면 오정(梧亭)이 바른 표기이다.- 1900년대 이후 지명표기 간소화 바람에 '오(梧)'의 '나무 목(木)'과 정(亭)자의'정(丁)'만을 살려서 오정(吾丁)이라 하였던 것 같다.- 작동(鵲洞)은 마을 뒤에 까치산이 있으므로 '까치울', '까치말'이라 부르던 곳이며부평군 상오정면에 속했던 곳이다</PRE>
 
부천(富川) 중동(中洞)
 
 
- 간뎀, 간데미라고 부르던 중간마을

<PRE>◆ 위 치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遠美) 중동 일원◆ 면 적 : 366,878평(1,212,820m2)</PRE>

* 지명유래

<PRE>- '원미구(遠美)'라는 이름은 높이 123.8m의 원미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심곡동과원미동, 역곡동 경계에 있는데 이 산을 멀미산, 장자미, 둔대산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멀미산의 '멀=원(遠)'의 훈차(訓借)와 미=미(美)를 음차(音借)하여 원미산으로 쓰고 있다.- 중동(中洞)은 그전 부평군 석천면 중리(中里)였고, 동제를 실시 하면서 중동이 되었다.간데미, 간뎀이라고도 불렀는데 '간데미'는 가운데 즉 중간을 뜻한다</PRE>
 
상사도(上四道)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위(북)에 있는 4개 지방을 말한다.

<PRE></PRE>

* 지명유래

<PRE>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위(북)에 있는 4개 지방을 말한다. 곧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이다.</PRE>
 
서울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왕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서나벌...

<PRE></PRE>
 

* 지명유래

<PRE>서울의 어원에 대해 정확히 밝혀기는 어려운 일이고 지금도 여러 학자가 열심히 연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주장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에 대해 알아봅시다.다른 도시와는 달리 순우리말인 서울이라는 이름은 언제, 어떻게 생긴 것일까요? 여러가지 주장 중에 한가지는 신라시대에서부터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왕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시조 혁거세왕이 건국 후에 나라 이름을 서나벌, 서벌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라의 서울인 서나벌 또는 서벌이나 나라 이름인 신라, 시림 등으로 부르는 이 모두 지금 우리말의 수도를 뜻하는 서울의 어원이 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습니다. 또 조선시대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이라는 말에서 서울의 어원을 찾을 수 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서울의 한자 표기가 가능할까? 지금까지 서울은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순우리말 이름으로 알려져 왔습니다.최근 발견된 『증보문헌비고』라는 책 신라편에 "여지승람에 후인들이 모든 서울(徐蔚)을 일컬어 서벌(서벌)이라고 했다가 후에 변하여 서울(徐蔚)로 했다"는 대목이 있다는 것이 처음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 증보문헌비고 : 조선 영조 때 정부가 편찬한 전통문화 대백과 사전 </PRE>
 
서울 개포(開浦)
 
 
- 한강변 갯벌에 있는 마을 '개펄'이 변한 것

<PRE>◆ 위 치 : 서울특별시 강남구(江南) 개포동 일원◆ 면 적 : 512,302평(1,693,560m2)</PRE>

* 지명유래

<PRE>- 경낙(京洛)과 경사(京師)라는 이름도 서울을 뜻하는 이름인데, 경낙은 낙양을 말하며 경사 역시 낙양을 낙사(洛師)로 표기한 예를 본딴 것이다.- 또 경조(京兆)란 궁성이 있는 도시 곧 서울을 말하며, 경도(京都)는 서울과 도읍지라는 두 가지 뜻이 겹쳐진 이름이다.- 한편 서울을 뜻하는 이름으로 광릉(廣陵)과 수선(首善)이라는 이름도 있다.- 광릉이란 넓고 큰 언덕이란 뜻으로 분지화된 거대한 도읍지를 뜻하며 수선은 교화(敎化)의 시초, 곧 천하에 모범을 세운다는 뜻으로 수도를 '수선지지(首善之地)'라 하는 데서 따온 것이다.- 이 외에도 궁성의 아랫거리를 뜻하는 도하(都下), 도성의 성문 안을 뜻하는 문안, 국왕이 있는 성이라는 뜻의 왕성(王城)등이 있고, 또 고려시대에는 서울의 풍수지리를 논하면서 목멱양(木覓壤) 또는 오덕구(五德丘)라 했던 것도 참고로 밝혀 둔다.- 한양(漢陽)은 한산(漢山:북한산)의 남쪽, 한강의 북쪽이라는 뜻이다.한문표기 지명에서 '양(陽)'은 산의 남쪽, 강의 북쪽에 붙이는 지명 접미사이기 때문이다.- 한편 '서울'이라는 이름은 순 우리말이므로 한문글자로 표기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이로 인하여 중국, 대만 등 한자문화권에서는 아직도 서울을 '한성(漢城)'으로 쓰고 있으므로 '서울'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의역(意譯)이 아닌 소리 그대로의 음역(音譯)에 의한 표기방법이 필요하고, 또 발음만이 아닌 좋은 의미도 담길 수 있도록 관계당국과 학계의 충분하고 진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서울의 강남구(江南)는 한강이 서울을 가로질러 흐르면서 크게 남북으로 나누므로 대개 서울을 강북과 강남으로 구분한다. 강남구는 한강 이남의 전체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의미는 같다. 본래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新東面)과 광주군 언주면(彦州面)지역이었으나 1963년 1월 신동면 지역은 영등포구로, 언주면 지역은 성동구로 편입되었다가 1975년 10월 강남구가 신설되었다. 1979년 10월 강남구에서 강동구가 나누어졌고, 1988년 1월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나누어졌다.- 개포동(開浦)은 한강변에 위치하여 갯벌에 있으므로 '개펄'이라 하던 것이 '개패'로 변하였고,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소리가 비슷한 글자를 빌려 '개포(開浦)'라 한 것이다</PRE>
 
서울 고덕(高德)
 
 
- 옛 선비의 높은 덕을 기린다는 뜻

<PRE>◆ 위 치 : 서울특별시 강동구(江東) 고덕동(高德), 하일동(下一) 일원◆ 면 적 : 952,405평(3,148,446m2)</PRE>

* 지명유래

<PRE>- 강동구(江東)는 한강의 남쪽, 강남지역에서는 동쪽 끝에 위치하므로 강동구라 하였다. 이 지역은 광주군 구천면(九川面), 중대면(中垈面), 대왕면(大旺面)에 속한 곳이었으며1963년 1월 성동구에 편입되었다가, 1979년 10월 강남구에서 나누어져 강동구가신설되었고, 1988년 1월에는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나누어졌다.- 고덕동(高德)은 일명 고더기라고 부르며, 부근에는 고지봉(高志峰)이라는 산이 있다.- 고려 말엽에 형조참의를 지낸 이양중(李養中)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이성계가 혁명을일으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자 이양중은 '두 임금을 섬길 수가 없다' 하여이곳에 숨어 살았다. 그 후 왕이 된 태종이 옛 친구의 정을 생각하여